|해외수필| (중국)


대만해협에는 장벽이 없었다


전 춘 매



얼마 전에 나는 2012년 해협량안 도서출판 교류활동으로 열흘간 대만에 다녀왔다. 물론 직장에서 배려해준 덕분이다.
나에게 있어서 대만이란 곳은 워낙 별 의미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 나라의 불가분리의 일부분으로서 “한 나라 두 가지 제도”의 존재양상을 보려면 홍콩을 택하면 되는 것이고 섬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바다를 구경하려면 제주도나 해남도를 택하면 되기에 관광대상으로조차도 굳이 대만을 선택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조선족인 나에게는 대만에 사돈에 팔촌과 같은 친, 인척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대만과의 관계가 개선된 지도 오래고 대륙의 많은 관광객들이 드나들며 각 분야의 교류가 이루어진 지금 대만이 더 이상 신비의 세계가 아니다.
그러나 막상 내가 단순한 관광이 아닌 문화교류로 대만에 가게 된다고 하니 그 어느 외국에 가는 것보다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여러 지역의 신문출판국, 출판사, 잡지사들에서 모여온 이번 모임의 참가자들은 2012년 11월 22일 대만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으며 3시간이 지난 후 대북 도원(桃園)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는 대만도서출판사업협회의 책임자와 여행사 가이드가 나와 있었다.
우리는 대북소거단(小巨蛋) 부근의 왕조호텔(王朝大酒店)에 들었다. 이 호텔은 돈화북로(敦化北路)에 자리 잡았는데 연변태생인 나에게 있어서 “돈화북로”며 “연길가(延吉街)”는 참으로 친절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감회가 깊었다.
장개석이 얼마나 대륙에 미련이 남았으면 대북의 일부 거리명칭을 대륙의 동서남북 상응한 지명에 따라 명명했을까. 동북전장에서의 참패가 얼마나 타격적이었으면 세상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시골인” 연길이며 돈화의 지명이 버젓이 적혀 있을까. 내가 일행에게 지금 밟고 있는 이 “돈화”라는 곳이 내 고향 연변의 한 지역이라고 말하자 적지 않는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중경이며 남경은 들었어도 돈화라는 지역은 못 들었나 보다.
도서전시회와 해협량안 도서출판포럼 등 행사가 끝난 후 우리는 대북에서 대만해협을 끼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최남단에서 태평양을 바라보며 다시 대북으로 향하는 대만관광을 시작했다.
대만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섭이였으며 대만 사람들은 친절하고 문명한 사람들이였다.
우리는 가이드로부터 대만의 풍토와 소수민족, 1945년 이후의 국민당의 역사와 대만 건설 상황을 료해하였다. 5년이나 이 교류활동의 안내를 맡아왔다는 가이드는 국민당 당원이다. 50을 바라보는 가이드의 본적은 강서성이다. 어려서부터 “도탄 속에서 허덕이는 대륙의 인민들을 구해내자”는 정치교육을 받아왔다면서 그녀는 여행 도중에 어렸을 때의 어려웠던 생활과 이념의 차이로 인한 재미나는 이야기들을 간간이 들려주었다. 그들은 어렸을 때 “내일이면 대륙에 건너가고 모레면 대륙을 해방한다”고 믿었다고 했다. 그녀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관광 버스 안은 한바탕 웃음소리가 넘치군 했다. 대륙에서도 비슷한 연대에 비슷한 사고를 하였으니까.
지금 이렇게 웃으면서 지난날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많은 상처들이 보다 밝은 미래가 약속 되어 있다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르는 곳마다 기회가 닿는 대로 대만의 원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이는 새로운 발견이 아니다. 대만에 다녀온 사람들이라면 한결같이 느꼈을 생각일지도 모른다. 대만과 대륙이 하나라는 사실을.
대만에서 우리들은 불편함이 없었다. 비록 민남방언이나 객가(客家)언어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대부분 표준어(普通話)를 사용하였기에 언어상에서 아무런 장애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는 물론 적지 않은 가게들에 은련(銀聯)카드가 허용 되었으며 동네마트의 현금인출기에서는 인민폐가 직접 대만 돈으로 환산되어 인출되기도 하였다. 그뿐 아니라 일부 관광용품 상점에서는 인민폐가 직접 교역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타국인의 눈에 대만과 대륙이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그냥 하나처럼 보였다. 내가 만난 대만의 사람들도 대륙이 다른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만에 14개의 소수민족이 있는데 우리는 통칭 고산족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만에서는 세분화 되였으며 원주민들의 요청에 의해 각 소수민족의 명칭을 법으로 규범화 하고 있다.
나는 우연히 원주민의 후예이며 부농(布農)족이라는 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였다. 음식이며 복식이며 이야기를 하다가 대륙에 대한 인상을 물었더니 그는 종래로 대륙과 대만을 다른 나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대륙에서 패배한 국민당이 대만으로 들어가 원주민들의 생활 질서에 혼란을 가져다주면서 적지 않은 마찰을 빚었기에 그들은 국민당에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원주민들한테는 대륙 사람들이 몇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꼭 같았다. 그들은 정성공이 대만을 수복한 후로 대만과 대륙을 갈라본 적이 없다고 한다. 청조조정의 무능함으로 1895년 이후 50년 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기도 하였지만 그들은 언제나 대륙의 일부 분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 친구는 “대만독립”은 일부 정치인들이 생각하는 것이지 민간인들은 관심이 없다고 했다. 대륙과 오가면서 평화로운 지금이 얼마나 좋으냐고 하였다.
곰곰이 따져보면 대만의 사람들도 다른 나라라고 생각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다만 누가 집권당이 되느냐하는 문제였지 가이드의 말처럼 “도탄 속에 허덕이는 대륙의 동포들을 구하려했다”고 하던 “도탄 속에서 허덕이는 대만 동포들을 구하려했다”고 하던 모두들 하나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송미령도 임종 전에 “중국은 하나”라고 강조했으며 고궁박물관의 문물 운반을 맡았던 진성(陳城)도 생전에 “저 문물이 북경의 고궁”으로 가야한다고 했다. 고궁박물관의 문물은 로구교사변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군이 고궁에 쳐들어와 문물을 약탈할까 두려워 장개석이 문물을 서천(西遷)하였던 것이다. 8군련합군한테 당했던 과거가 있었으니까. 문물은 한 나라와 민족의 역사이며 자존심이다. 그러다 해방전쟁시기 그들은 세 차례에 거쳐 문물을 대만에 옮겨갔다. 대만의 고궁박물관에서 같은 역사를 소유하고 있는 그들의 해설을 들으면서, 력사교과서에서 읽었던 내용을 되새김하면서 나는 내가 대만에 왔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였다.
가이드의 소개에 의하면 문물을 보관 진열하기 위하여 박물관을 지어야 했는데 당시 대만도 상상처럼 유족하지 않았기에 자금이 모자랐다고 한다. 이때 해외의 한 거상이 거금을 내놓으면서 도자기 하나만 달라고 했다. 하지만 대만의 인민들은 그 자금을 거부하면서 문물을 팔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팔지 않았어요.”라고 가이드가 말했다.
기념관 같은 것을 소개할 때마다 가이드는 “건국 100주년”을 맞으면서 지은 거라는 말을 자주 하였으며 년도를 설명할 때에도 “민국××년”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60돌”기념행사를 한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제야 중국의 현대사에 “중화민국”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였다.
물론 지금도 외국인들의 눈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이 동등한 자격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백성들 사이에는 이미 아무런 장벽이 없었다. “대만의 사람들은 아무도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나는 대만해협에는 애초부터 장벽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념의 차이는 있었지만 아무도 둘이라고 갈라서 생각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나는 일종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바다를 사이 두고도 벽이 없는데 우리 고국에서는 멀쩡한 땅에 금을 하나 그어놓고 오가지 못하다니. 어찌 보면 현재 2차세계대전후의 제일 슬픈 민족으로 남은 것 같았다.
몇 년 전에 한국 강원도에 갔을 때 원“38”선의 작은 돌비석을 보게 되였다. 후에 “38”선을 약간 조절하면서 그 돌비석이 한국 쪽에 속하게 되였는데 비록 작은 돌비석 이였지만 그 땅덩어리를 멍들게 하기에는 충분하였다.
같은 역사를 지니고 있고 같은 한을 지니고 있으나 “아리랑”노래만 남았을 뿐 아직도 허물 수 없는 커다란 벽을 사이 두고 있다. 혈연관계도 점점 멀어져가는 휴전선 이남과 이북은 많은 것이 다른 세계이다. 정치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조선과 한국의 백성들 중 구경 얼 나마 되는 사람들이 진정 통일을 원하는 걸가?
이런 거창한 주제를 생각하기엔 내가 너무 보잘것없는 미미한 존재이지만 부담 없이 오가며 마음이 하나로 되여 가는 대만과 대륙의 사람들을 보며 나는 긴 한숨과 더불어 부러운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전춘매(全春梅)
  1970년 4월 28일 길림성 룡정출생
  1997년 연변대학 조문학부에서 석사학위 획득
  2009년 중앙민족대학 소수민족언어문학학원에서 박사학위 획득
  현재 민족출판사 조선문편집실 부편심
  시집 「느끼며 살아가며」를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