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수필|(중)

빛과 그림자

전 정 옥

 

 

 

갑작스레 정전이 되었다. '무서워'하는 세 살배기 아들놈을 안고 더듬더듬 초를 찾아 불을 밝혔다.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촛불만 보면 거의 조건반사라고 할 정도로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대는 아들놈을 나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전구와 비길 바는 못돼도 작은 촛불 하나가 어둠과 함께 공포도 몰아내기엔 충분했나보다고 생각한다. 밝은 형광등 아래에서는 볼 수 없었던 우리들의 그림자를 아들에게 설명해주려고 했다. 애고사리 같은 손이 움직일 때마다 커졌다 작아졌다 따라서 움직이는 자신의 그림자를 유심히 보던 아들은 와~ 울음을 터뜨리며 내 품을 파고든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랬지

어린 시절 나도 ……

기억 속의 그림자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영화보기를 즐겨하셨던 엄마 덕에 나는 엄마 손에 이끌려 집에서 30분은 족히 걸어가야 하는 향 영화관으로 가끔 영화 보러 갔다.

어린 내 눈에 영화들은 어떤 장르를 막론하고 재밌기만 했었지만 끝나고 돌아오는 길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저녁 9시면 시골은 고요히 잠든 시간이다. 끝없이 펼쳐진 논밭 한 가운데로 뻗어 있는 길을 걸을 때면 나는 거의 엄마 팔에 매달리다시피 했다.

계절 따라 색깔을 달리하는 논밭, 그리고 하늘하늘 춤추는 수양버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한적한 시골 도로는 대낮에 걷기엔 조용하고 운치 있지만 밤은 아니다.

달빛에 가로수가 산발한 여인 같은 희미한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어 음산하기만 하다. 멀리서 보이는 키 작은 나무는 사람이 웅크리고 앉아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하고 가까운 곳에 서있는 키가 훌쩍 큰 가로수는 내가 지나치고 나면 누군가 뛰쳐나와 뒤통수를 칠 것 같기도 했다. 강렬한 광선을 잃어버린 물체는 형상이 희미해진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물을 대할 때면 인간은 두려움을 느낀다. 선이 뚜렷하지 않은 희미한 물체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고자 우리는 마치 살얼음판을 걷듯이 쫓기듯이 걸었다.

손전등을 들고 대개는 마을 사람 몇 명이 같이 다니기는 하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기는 다들 마찬가지인 듯 했다. 금방 감상한 영화를 필요이상의 높은 목소리로 평가를 하는 것도 이상했다.

손전등 불빛이 닿는 곳이면 희미한 가로수 그림자는 자취를 감추고 우리 일행의 그림자들은 부지런히 뒤를 쫓아온다. 뒤처진 사람의 손전등에 비춘 내 그림자는 길기만 하다. 발을 부쩍부쩍 높이 들면서 앞에서 걷는 나의 그림자가 우스꽝스럽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나도 혼자만이 아닌 그림자랑 둘이었었네,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여러 사람의 손전등 불빛에 내 그림자가 여러 개로 쪼개졌다 겹쳐졌다 할 때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엄마한테 말할 용기는 없다. 말을 꺼내면 그림자 중 하나가 흐물흐물 귀신으로 변해버리기라도 할 것 같다. 숨을 죽이고 발걸음만 재촉해야 한다.

그러다가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한숨이 휴~ 나온다. 그나마 고요함 속에서도 사람의 온기가 느껴져서일 것이다. 조금은 안전감을 느낀다. 그때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멀리 가로수들은 일자 두 줄로 뭉쳐져 있다. 아주 잠깐이지만 가로수 사이 그림자가 겹쳐서 저렇게 보이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한다. 어둠은 그림자가 겹쳐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무들의 그림자 꽃과 풀들의 그림자 그리고 집들의 그림자…… 모든 그림자들이 겹치고 겹치면 그것을 하늘이 덮어버려 어두운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의 원리를 알 수 없었던 어린 나이에 나는 어둠은 그림자의 농간이라고 생각했다. 산발한 여인 같던 가로수 그림자며 여러 개로 쪼개지던 나 자신의 그림자까지 모든 그림자들이 실은 아주 무서운 존재라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땀나는 손으로 엄마 팔을 더욱 꼭 붙들고 매달린다.

손전등 불빛을 집어삼키려는 어둠의 행로에서 나는 그림자를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했다. 누구를 막론하고 그림자는 어둠과 연관되고 어둠은 공포와 연결된다는 생각은 똑같이 할 것 같다. 세 살배기 아들이 느끼는 그림자에 대한 공포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느끼는 아이의 공포 그것은 거짓일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러다가 날이 밝아 햇살이 비추면 언제 그랬냐싶게 모든 것이 간단명료해진다. 강렬한 광선 아래서 그림자는 아름다운 하나의 풍경일 뿐 공포의 상대가 아니다. 넉넉한 수양버들 그림자를 우리는 그늘이라고 부른다. 그 그늘에서 수다도 떨고 밭일하다가 잠시 허리 쉼도 쉰다. 그러다가 황혼이 깃들어 다시 광선이 희미해지기 시작하면 그림자는 그늘이 아니라 어둠으로 우리에게 부각이 된다. 그래서 다시 공포의 상대로 인식되는 것이다.

빛과 그림자는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 사물의 실체와 그림자는 또 무슨 상관성이 있는 것인가?

어린 시절 그림자밟기놀이를 자주 했던 기억이 난다. 상대에게 그림자를 밟히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몸을 피해 달아나야 하는 그런 놀이다. 그런데도 상대에게 그림자를 밟히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면 괜히 기분이 언짢아진다. 머리를 밟혔을 때는 더 싫다. 왜일까? 아픈 것도 아니고 그냥 그림자가 있는 부분의 땅을 밟았을 뿐인데 왜 기분이 나쁜 것일까? 어린 시절에는 미처 몰랐던 그 해답을 나는 계속 찾으려 애를 써본다. 그렇다면 사물에는 실체 말고도 그림자라는 것도 하나의 속성으로 내포되어 있었단 말인가?

'제자는 스승님의 그림자도 밟아선 안 된다.'는 말도 스승이라는 존재에 그 그림자까지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해석하기가 조금 껄끄러워진다. 건방진 발상일진 몰라도 모나리자가 명화로 남을 수 있는 것도 적절한 명암처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표본실에서 박제된 채로 진열돼 있는 동물들이 굳은 시체로 느껴지는 것은 환한 불빛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리나 발톱, 깃털의 미세한 부분까지도 그대로 있지만 영혼을 느끼게 해주는 움직임과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서울대학교 교수님들을 모시고 백두산에 간 적이 있다. 9월 중순 추석날이었다. 산 아래는 녹음이 우거진 늦은 여름이었지만 천지를 관망할 수 있는 정상은 눈이 쌓여있는 겨울이었다. 사계절의 변화를 한 번에 보는 즐거움도 좋았지만 살을 에이는 듯한 바람을 맞으면서 내려다보는 천지는 감동 그 자체였다. 천지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해가 지기 시작하는 시각이었다. 백운봉에 흰 구름이 감돌고 있고 아차 하는 순간에 해는 자취를 감추어버렸지만 그런 시간을 배경으로 서서히 그림자를 포옹하는 천지의 모습은 장렬하기까지 했다. 숙연한 마음으로 얼마동안이고 홀린 듯 천지를 바라보았었다.

그러나 화창한 어느 여름날 다시 찾은 천지는 맑고 깨끗했지만 그날의 감동은 느낄 수가 없었다. 높은 산들에 둘러싸인 파아란 천지물을 보면서 참 깨끗하구나 신기하구나 하는 생각만 맴돌 뿐이었다.

그림자가 사물의 실체에 주는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가 되겠다. 그림자를 떠난 실체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감히 말하고 싶어진다. 어둠이 없는 광명이 의미가 없듯이, 그리고 죽음이 없는 생명이 의미가 없듯이 그림자는 사물의 실체를 돋보이게 해주는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다. 내 그림자를 누군가 밟았을 때 기분이 나빠지는 것 그것은 내 생명의 한 부분을 아끼는 마음과 꼭 같은 것일 것이다.

물과 빛이 없었다면 생명도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빛이 생명에 주는 역할을 부인하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그런 빛에 의해 사라지고 그런 빛에 의해 생겨나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그림자도 그 역할이 작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빛과 그림자……

드러내려 하는 것과 감추려 하는 것 강렬한 것과 애매모호한 것 밝은 미래와 짙은 공포…… 극단의 모순을 가지고 묘한 통일을 이루고 있는 이들 역시 모순의 통일체임은 분명하다. 이제 나는 공포로만 인식해 왔던 그림자가 나에게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일만 남았음을 알고 있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 그것은 영혼이 있는 것이고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림자들에 대한 추억의 편린들이 오늘은 나에게 한 사람의 그림자로 되어 또 나만 쳐다보는 애들의 그늘이 되어주며 조용히 살아가는 불만투성이 인생일지라도 고마운 생명의 드라마임을 일깨워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