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중국)


비천飛天



조 광 명


바다가 달려오고 있었다. 눈이 시리게 아물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달리는 차 앞에 차를 맞받아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바다. 사막이 피워 올리는 아지랑이가 일으키는 착시 현상이었다. 뜨거운 햇볕에 수분을 잃을 대로 잃고 마를 대로 말라버렸음에도 그래도 그 밑으로 밑으로 아직도 더 잃을 수분이 남아있어서 하늘로 피워 올리는 사막의 아지랑이….
포장도로 양쪽의 사막은 노란 황금색도 흰 은백색도 아니었다. 천만년 세월이 기침을 토해낸 각혈이 그대로 흑갈색 피딱지로 말라붙었다가 강한 바람에 부서져 가루가 되고 모래로 된 듯, 길 량켠의 사막은 차라리 멍든 흑갈색이었다. 그건 멀리서 보면 검푸르게 보이는 바다의 색깔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그 흑갈색의 사막이 태양의 강한 직사광선아래 아물거리는 착시현상을 주며 바다처럼 막 사품쳐 달려오고 있었다.

돈황시에서 북서쪽으로 거의 백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실크로드의 서역 첫 관문 옥문관을 찾아보고 돌아선 길이었다. 옥문관은 동서로 그리고 남북으로 각각 이십 여 미터씩 모래 섞인 황토로 쌓아져 십 미터쯤의 높이를 자랑하는 누런 흙무덤에 지나지 않았다. 그 커다란 흙무덤조차 울타리를 쳐놓아 북쪽과 서쪽으로 대문같이 뻥 뚫려있는 그 <관문>을 한번 지나쳐 볼 수가 없었다. 그 <관문>을 건너 서역 땅을 찾고 그 <관문>을 지나 장안을 향했을 화씨벽(華氏璧) 교역의 주역 월지인들… 얼마나 많은 부귀영화의 꿈들이 이 관문을 지나쳤고 얼마나 많은 낙타들이 등에 옥이 담긴 주머니 짊어지고 방울소리 울렸을까… 그러나 이제는 깨어진 옥 조각 하나조차 찾아볼 수 없게 텅 빈 폐허의 흙무덤.

흥성의 자취는 어데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 관문으로 넘나들었던 역사 속 상인들의 숨결은 순식간에 증발된 아지랑이처럼 황토색 흙무덤 속에도 깃들어 남아있지 못했다.
바람도 새도 날아 넘지 못했다는 옥문관, 그 옥문관을 나도 오늘 건너보지 못하고 그저 한참동안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다가 돌아선 길이었다. 관광이란 건 그런 거였다. 왔노라, 봤노라, 돌아서노라… 먼 길을 달려와서 잠깐 훑어보고 허무만 안고 돌아서는… 그렇게 점을 찍고 돌아서는 일이었다.
-어떠세요? 느낌이…
핸들 우에 왼손을 가볍게 올려놓은 채 거칠 것 없이 일직선으로 시원하게 뻗은 포장도로에서 차를 달리며 줘마가 물어왔다.
-뭔 느낌? 화려했던 긴 시간의 역사가 그저 저렇게 별로 웅대하지도 못한 흙무덤 하나로 덩그러니 놓여있구나 하는 거? 그 속을 통과하던 수많은 숨결들은 이제 이 사막의 한 알 모래 속에도 남아있지 못하고…….
-해골이 보여요… 이 길옆의 모래알들이 다 해골로 보여요. 영욕을 위해 버둥거리다 죽어간 수많은 목숨들. 그렇게 버둥대다 결국은 어느 날 길 위에 쓰러져 그렇게 사막의 강한 바람에 피와 살을 다 잃고 해골로나마 남으려다 그것으로도 남지 못하고 모래알로 부서지고 마는 그 무자비한 사막의 시간들… 이 사막에선 시간을 묻지 말아야겠죠? 우리네 짧은 인생으론 사막에 시간이란 두 글자를 감히 쓰지 말아야겠죠? 시간 자체도 이 사막에서는 알알의 모래알로 부서지고 만다면 한낱 티끌 같은 우리네 인생들이야…….
줘마답게 담담한 어조였으나 그러나 떨림이 강한 언어들이 내 심장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줘마, 우리 춤이나 출까?
나는 내가 듣기에도 황당할 제안을 느닷없이 줘마에게 꺼냈다.
-춤요?
-그래, 이 너른 사막에, 거칠 것 없는 이 사막에, 마음껏 우리 거치른 숨결 토해 춤을 추는 거지 뭐… 우리 춤을 추자… 모래로 부서진 해골들을 밟으며 그 해골들의 신음을 밟아주는 환락의 춤을 추자.
나도 모를 춤의 충동이었고 어느새 줘마는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길옆에 세웠다.
-좋아요, 우리 춤을 춰요.
줘마와 나는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가시 돋친 낙타 풀들이 듬성듬성 나있는 사막에 두 손을 마주잡고 섰다. 이미 우리는 서로 알고 있었다. 우리가 휘뿌리게 될 춤사위의 동작들을…….
입으로 아니고, 눈으로 아니고, 벌써 사막의 뜨거운 열기로 서로의 몸속에 흐르기 시작한 춤의 기운을 교감으로 느껴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자기의 느낌대로 서로에게 맞춰 추면되는 춤이었다.
모래알들이 숨을 죽이고 손잡고 마주선 우리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발바닥에 역사 속에 사라져간 뭇 영혼들의 신음소리가 치덕치덕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 신음소리들이 사막 위를 달리는 바람의 합창 같은 리듬으로 우리 둘의 발바닥으로부터 쭈욱 발등으로 그리고 다리를 따라 무릎관절을 통과해 허벅지로, 그리고 몸으로 올리뻗기 시작했다. 몸을 지나 두 팔에까지 그 리듬의 기운이 뻗치고 있었다. 발뒤꿈치가 들려지고 있었다. 손끝에까지 그 리듬이 뻗어와 이제는 손끝이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자, 줘마야, 이제는 달리는 거다, 춤으로 이 사막을 달리는 거다. 몇 천 년 몇 만 년의 그 시간 속으로 춤으로 달려 들어가는 거다. 그 시간들과 춤으로 만나는 거다. 
붓대를 휘날려 그림을 그리는 대신 나는 줘마와 함께 사막에 춤을 휘뿌리고 있었다. 모래를 밟아 해골들이 밟히는 소리를 들으며, 그 해골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신난 춤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춤추는 내 상상 속에, 나와 줘마는 방금 우리가 가까이 바라만 보고 그 밑으로 지나가 보지도 못했던 그 폐허의 흙무덤 옥문관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그 흙무덤을 무대로 그 무대 위에 춤자락 날려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우리의 춤자락이 일으킨 바람에 사막의 모래들이 막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땅에 납작 달라붙었던 가시 돋친 낙타 풀들이 몸을 세우고 일어서서 우리의 춤에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우리의 춤과 함께 설레고 있었다. 그 풀을 뜯어먹는 낙타들의 입에 방울방울 맺혀 흘러 떨어지는 핏방울이 찬연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핏방울들을 사막에 고개 저어 휘뿌리며 낙타들이, 단봉의 낙타들과 쌍봉의 낙타들이 방울소리 크게 울려 사막에 춤을 추듯 달리고 있었다.

절렁 절렁 절렁 절렁
투닥 투닥 투닥 투닥
신난 락타들의 춤이여
빨라지는 낙타들의 속도여…

나와 줘마도 그 낙타의 무리를 쫓아 춤의 템포를 더 빨리했다. 스텝을 더 빨리 밟아 이제 우리는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날아가고 있었다. 낙타들의 등 위를 날아가며 낙타무리를 몰아 사막의 잠든 시간들을 깨우고 있었다. 사막에 잠들어 있던 역사 속 죽은 영혼들을 깨우고 있었다. 해골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춤에 합세해 함께 춤 자락을 휘날리고 있었다.
온 사막이 환호성처럼 일어서서 박수를 치고 발을 구르고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 춤의 한가운데서 생긴 회오리바람이 사막을 휘익 휩쓸며 큰 용트림바람으로 변하여 황사를 휘날리기 시작했다. 황사바람이 태풍처럼 우리의 춤을 덮어오고 있었다. 그 황사 속에 나와 줘마의 춤은 더욱더 광적으로 이어졌다.

1
같은 도시 다른 대학에 미술교수로 있는 대학원 동창 형익에게서 전화를 받은 건 점심 퇴근시간이 거의 되어가는 오전 늦은 시각이었다.
-오늘 점심시간이 어때? 다른 약속 없으면 너희 대학 앞에 있는 로우즈레스토랑에서 나랑 좀 만나자.
다짜고짜 혼자 부르고 쓰고 이미 만남의 장소까지 다 결정해놓고 통보해오는 전화였다.
-몇 시에?
다른 약속이 없는 날이라 나도 가볍게 그 시간만을 물어 약속에 응했다. 저렇게 일방적으로 모든 걸 결정해놓고 오는 전화라면, 내게 다른 일이 있더라도 다 미루고 응해줘야 할 사연이 꼭 있을 터였다.
-바쁜 일이 없으면 지금 나와라마…
노련한 형익 교수답지 않게 급한 만남을 재촉해 오길래 알았어, 하고 전화를 끊고 헹거에 걸었던 캐주얼 양복을 몸에 걸쳤다.
만나서 악수하고 자리에 앉아 차 한 모금을 방금 넘기는데 형익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너에게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고민 좀 했다.
-너답지 않게 왜 이러냐? 해야 될 말이면 하면 될 거구, 하지 말아야 할 말이면 할 필요도 없구….
남들 앞에서는 서로 교수 호칭을 붙여 존중해주지만, 우리끼리 만나면 그냥 대학원 한 침실에서 나누었던 호칭 그대로 아직도 반말을 주고받는 우리 사이였다. 그게 이십 여 년 꼬아온 우리 우정에는 편한 것이었다.
형익이 괜히 심각한 표정을 얼굴에 담고 내 눈빛을 응시해왔다.
-뭔 일이냐? 빨리 불어버려.
-그래, 불렀으니까 말해주마.
그래놓고도 형익이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괜히 뜨거운 차물을 꿀꺽꿀꺽 연거푸 두 모금이나 삼켰다. 좀 심각한 일이군, 하고 속으로 추측하며 나도 더는 형익이를 재촉하지 않고 그 눈빛만 마주보았다.
드디어 형익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인수 그 녀석 많이 아프다.
인수?!
나는 대뜸 내 뒷덜미로 확 올리뻗는 강한 통증을 느꼈다. 지금까지 가슴 속에 억지로 눌러 묻어두고 있던 어떤 살인마적인 충동이 다시 막 뒤통수를 강하게 때리며 벌써 나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그래, 미안하다. 니 앞에서 인수 이야기를 꺼내서… 근데 인수… 진짜 많이 아프다. 이제는 폐인이 다 된 거 같다.
차 잔을 잡은 내 오른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미 가슴 속에 터질 것 같은 분노의 불길로 내 입술도 파랗게 질려있는지 몰랐다. 내 눈에서는 이미 퍼어런 불덩이가 뚝뚝 떨어지고 있을 것이었다.
다른 이야기는 다 괜찮았다. 그러나 인수에 관한 이야기만은 절대 안 되었다.
다른 이름은 다 좋았다. 그러나 인수라는 이름만은 절대로 내 앞에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그건 우리 사이에 근 십년간 지켜져 온 불문율의 약속이고 룰이었다. 손에 쥔 차 잔을 그대로 땅에 둘러메칠 수 없어 식탁에 엎치듯 내려놓고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 말 않고 그대로 돌아서서 레스토랑을 나섰다.
형익이가 급히 따라 일어서서 나를 뒤쫓아 나오는 걸 알 수 있었으나 나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조금만 진정해.
형익이의 손이 내 팔을 붙잡았고 나는 드디어 참고 참았던 분노를 터뜨렸다.
-경고하는데, 너 내 앞에 다시는 그 짐승의 이야기 꺼내지 마. 친구로 남고 싶다면.
-그래… 날 어떻게 욕해도 좋아. 그러나 너도 이제는 용서해라. 인수 곧 죽을 것 같다.
뭐? 용서? 내가 인수를 용서해? 내가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일은 있어도 인수를 용서하는 일은 없을 거다.
뭐? 인수가 죽어? 내가 죽이지 않았는데 감히 자기절로 죽어? 지금까지 너무 뻔뻔스레 잘 살아왔잖아? 근데 갑자기 죽음이라니? 왜? 함부로?
속으로 이렇게 울부짖으면서도 나는 내 걸음이 멈춰지는 걸 느껴야 했다.
-지금 막 병원에서 오는 길이다. 사실 인수가 아픈 건 썩 오래전부터였다. 너에게만 말하지 않고 있었을 뿐이지…
……
-인수, 사실… 몇 년 전부터 마약을 했다. 마약중독자로 여러 번 입원도 했었다. 재활센터에도 여러 번 들어갔었고… 그러나 중독증상은 점점 더 심해졌고……. 이번엔 완전히 구제불능인 것 같다. 재활치료 중 마약인이 배겨 자기학대로 벽에 머리를 박았는데 심하게 박았는 모양이다. 피가 안으로 많이 떨어져 수술을 했지만 이미 늦었고… 신경을 눌러서 사지가 다 마비되고… 완전히  폐인이 다 되었더라.
……
-그래도 나를 알아보고 간신히 웃더라. 네 이름을 부르더라. 네가 보고프다 하더라…
여기까지 말하고 형익은 내 팔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시립병원 입원병동 903병실에 들어있다. 한 번 가봐라…
그러고 형익은 나를 남겨둔 채 내 옆을 떠났다.
나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내가 인수를 만나러 가? 내 손으로 인수 그 녀석의 목을 조르기 전에는, 내가 인수를 만날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다. 뭐? 죽을 정도로 폐인이 다 됐다구? 어디 함부로 자기 맘대로? 인수 넌 죽음도 니 맘대로 할 자격이 없는 놈이야……. 네가 저지른 그 죄 값을 다 치르기 전에는 그렇게 함부로 죽어서도 안 돼, 이 짐승 같은 놈아….
나는 미칠 것 같은 자신을 주체 못해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확 당겼다. 그대로 오른 손에 한 움큼의 머리칼이 뽑혀 나왔다.
짐승 같은 놈, 기다려, 내가 널 죽이러 가주마.
그대로 미친놈처럼 캠퍼스를 맴돌다가 연구실로 돌아오니 책상 위에 편지봉투 하나가 놓여있었다. 신강대학에서 날아온 편지였다. 대충 그 내용이 짐작이 가는 편지였으나 귀찮아서 뜯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서랍 속에 넣어버렸다.
인수, 인두껍을 쓴 짐승 같은 놈… 아니, 짐승보다 못한 놈이었다.  어찌 인간으로서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어찌 자기의 욕정을 채우려고, 십 년을 넘게 한 친구와의 우정을 그렇게 짓밟아버리고, 그 친구의 사랑하는 여인을 그렇게 짓밟을 수 있단 말인가? 죽여야 할 놈이었다. 세상이 너무 눈이 멀어 아직까지 그런 놈을 이 세상에 살려두고 있지, 그런 놈은 진작 죽었어야 마땅했다.
-교수님, 수업에 안 들어가세요? 이번 학기 마지막 데생 강의가 제 3실기실에 있는 데요…
조교가 조심스레 귀띔해주어서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나는 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리솟는 뜨거운 불길 같은 바람의 용트림을 느꼈다. 나를 불태우려고, 또다시 나를 활활 불태우려고 내 안의 불길이 그렇게 바람같이 내 내부에서부터 불어서 올리치솟고 있었다. 연구실을 나서려던 나는 다시 돌아서서 서랍을 열고 아까 개봉하지 않고 처넣었던 편지를 꺼내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여름방학에 신강대학에서 펼쳐지는 <중국 경내 실크로드에서 발견된 불교 미술작품에 관한 국제학술세미나>에 참가해달라는 초청장이었다. 수천 키로 떨어진 신강대학에서 내 이름을 알아 나를 요청할 리 없었지만, 그러나 이미 예상했던 초청장이었다. 이미 전에 미리 받은 엔지고헤르씨의 메일내용에 이제 신강대학으로부터 국제학술세미나에 참석해달라는 초청장이 올 거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조교에게 부탁했다.
-이 초청장에 적힌 메일 주소대로 회신을 줘요. 참가한다고…그리고 세미나 일정에 맞춰 신강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 편도로만 알아봐요…
아직 대학장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은 채 나는 내 의지만으로 벌써 이번 여름방학의 신강행을 결정내리고 있었다. 아니, 그건 내 결정이 아니었다. 바람의 결정이었다. 바람이 다시 나더러 길에 오르라고 꼬드기고 있었다.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한 건 답답하고 막막한 이 도시의 공기가 아닌 다른 지역의 공기였다. 그 공기를 찾아가고자 내 가슴 안의 바람이 또다시 푸닥거리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푸닥거림 같은 것이었다.

길에 오르리
길에 오르리
미친 것처럼

길에 오르리
길에 오르리
무작정 미치러…

2
안전검사를 마치고 공항 대기실에 들어가 탑승권에 적힌 게이트 번호를 찾아 빈 의자에 몸을 던지자 저도 모르게 눈이 감겨져왔다. 세미나라는 건 항상 이렇게 사람을 많이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어쩜 내가 참가하지 않아도 될 세미나였다. 세미나 주최 측인 신강대학은 우룸치와 거리가 그렇게 멀리 떨어진, 중국 가장 동북부 변방도시의 민족대학에 서역의 옛 그림을 연구하고 있는 한 조선족 미술가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 신강대학에서 나를 이번 세미나에 초청한 건 이번 국제학술세미나의 기조논문 발표자인, 부탄 낭주바뜨대학 미술대 학장 엔지고헤르 교수의 강렬한 추천에 의해서였다. 
3년 전쯤 나는 서장대학으로부터 보내온 편지 한 통을 받게 되었다. 내가 벌써 서장대학을 떠난 줄 모르고 아직도 서장대학에 있는 줄 알고 서장대학을 수신인 주소로 해 날아갔던 편지를 서장대학에서 다시 내 현재의 정확한 주소로 돌려보내온 국제우편 서한이었다.
발신자 주소는 내가 들어도 보지 못했던 부탄 팀부시 낭주바뜨대학이었고 발신자는 그 대학 미술대 부학장 엔지고헤르 씨였다. 편지내용은 이러했다.

-친애하는 장진우 교수님께:
부처님의 자비로운 미소가 따사로운 아침입니다. 부처님과 왕을 우러러 아침공양을 마치고 아주 즐거움이 넘치는 마음으로 이렇게 교수님께로 보내는 첫 문안의 편지를 드립니다.
낯선 이로부터 무작정 받으시게 될 서한이라 교수님께 당혹감을 드릴까 저어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너그러운 아량으로 다 품어주시리라 믿습니다.
부처님의 나라 부탄의 수도 팀부에 위치한 낭주바뜨대학의 미술대 부학장으로 있는 엔지고헤르라고 합니다. 서장불교에 심취해 서장에 가서 2년 동안 서장불교와 서장불교미술을 배웠던 적도 있습니다. 저와 저희 대학에 대한 소개는 편지봉투 제일 윗부분에 인쇄되어 있는 사이트 주소로 들어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더지줘마라는 이름을 기억하시는지요? 이곳의 전통불교사찰 잠베이 라캉에서 펼쳐진 부탄 최대의 불교 행사인 잠베이 라캉 드룹축제에서 부처님의 은총으로 만날 수 있었던 춤의 여신입니다. 너무 젊고 너무 아리따운 몸매를 자랑하는 춤꾼으로 몸으로 추는 춤이 아닌, 영혼과 자연의 힘으로 춤을 추는 서장 전통춤의 1인자입니다. 그 춤의 주술적이고 마술적인 힘을 저의 그림에 담고파 한 번 더 찾아가 모셔 만났었는데 그 춤의 여신으로부터 교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의 그림 <만년무신>에 대한 평가가 대단했습니다. 춤에 관한 그림을 그리려면, 청장고원의 전통무용에 대한 그림을 그리려면, 서장 미술인이 아닌, 중국 조선족 미술인인 교수님의 그림을 먼저 참조하라고 강하게 추천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교수님께 무작정 서한을 드리는 바입니다.
교수님의 그 그림들을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해도 그 그림들을 사진으로 담은 이미지라도 보고 싶고, 그리고 교수님의 다른 그림들도 다 궁금합니다. 교수님의 프로필과 함께, 그리고 교수님의 그림에 대한 연구결과물들… 다 궁금합니다.
모쪼록 저의 이 궁금증을 날려주시는 회신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그 편지를 받고 나는 내 기억 속에 많이 잊혀져 있던 줘마의 앳된 얼굴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고 언젠가 미얀마의 국경 시가지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신비의 나무 앞에서 떠올렸던 생각이 맞았음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분명 그 줘마일 것이었다. 엔지고헤르 씨가 편지에 떠올린 더지줘마는 분명 언젠가 내 그림 앞에서 춤을 추던 서장대학의 그 학생 무용수임에 틀림없었고 내가 미얀마의 그 신비의 나무 앞에서 느꼈던 것처럼 그녀는 이미 내 운명 속에 들어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 줘마의 현황이 더 궁금해서, 그리고 국명이 서장의 끝이라는 뜻을 가진 부탄이란 나라에 대한 호기심과, 한때 내 청춘의 1년 시간을 몸담았던 서장이라는 지명이 주는 동질감 같은 것이랄까… 그런 것 때문에 엔지고헤르 부학장에게 회신을 날려 보내게 되었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으로 나와 엔지고헤르 씨의 메일연락은 그냥 이어졌고… 작년에 엔지고헤르 씨가 미술대 대학장이 되면서 낭주바뜨대학에서 개최한 국제세미나에 나를 초청해주어 나는 그 신비의 불교왕국에 다녀오는 행운까지 지니게 되었었다. 물론 그 부탄행에 나는 수도 팀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잠베이 라캉 사찰도 줘마의 자취를 찾아 찾아갔었고, 그러나 이미 줘마는 그곳을 떠난 지 1년도 더 된다는 아쉬운 소식만 전해 들어야 했다. 그 번 부탄 방문 후 나와 엔지고헤르 씨는 아주 친구사이로 가까이 지내게 되었고, 엔지고헤르 씨는 내가 서장대학에서 그렸던 <무신(舞神)> 계열의 그림들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는 글을 그 박식한 불교지식에 서장전통설화 이야기까지 곁들여서 평해 부탄왕국의 가장 권위적인 미술 전문지에 소개해주기까지 하였다. 나 역시 그 친구가 보내온 자료를 종합해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 교내 학술지에 부탄 불교 미술의 발전사를 소개하는 글을 기고해 발표하기도 했고.

그런 인연의 엔지고헤르 씨가 이번 <중국 경내 실크로드에서 발견된 불교 미술 작품에 관한 국제학술세미나>에 공동 주최 측 일원으로 참가하면서 기어코 그 세미나에 나를 초청한 건 어쩜 당연한 것이었고 당연히 그 초청에 내가 내 자신 미술의 연구방향과 이번 세미나의 테마 사이에 거리가 멀어 굳이 꼭 참여해야 할 이유가 충분치 못하면서도 네 시간 넘게 비행기 타고 기어코 참석하러 왔던 건, 역시 세미나 참가 목적보다 엔지고헤르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는 게 더 정확한 이유였다.
그러나 세미나는 세마나인만큼 3일간의 연속되는 논문발표 시간에는 그 장소에 참석자로 앉아 논문 발표자들의 논문을 다 들어주는 <고역>도 치루어야 했고 엔지고헤르 씨는 엔지고헤르 씨대로 대회의 가장 발언권 있는 참가자로 항상 정신없이 바삐 보내야 했다. 그래서 옛 친구와 편하게 앉아서 대화를 나눌 사이도 별로 없었고 세미나가 끝나고 다시 이어지는 3일간의 실크로드 현장 유적지 견학이 시작되기 전에 돌아가는 항공편을 주최 측에서 통일로 예약해 줄 때 나는 고향행이 아닌, 돈황행 티켓예약을 부탁했다. 기왕 우룸치에까지 나온 김에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감숙 돈황까지 가서 돈황막고굴의 불교그림들을 찾아보고 싶었고 나의 이런 결정에 제일 좋아한 건 당연히 엔지고헤르 씨였다. 부탄 자기네 대학에서 명년에 펼치게 될 불교 벽화 관련 세미나에서 돈황막고굴의 <비천(飛天)> 벽화를 테마로 한 논문을 꼭 발표해달라고 미리 요청해 왔다.
뭐 딱히 어떤 연구를 목적으로 돈황벽화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저 이렇게 가까운 곳에까지 왔으니까 가보는 것일 뿐이라고, 내 미술창작의 풍격과 거리가 먼 벽화이고, 연구방향이 다른 분야여서 억지연구가 가능하겠냐는 나의 겸손이 아닌 사양에 내 <무신> 계열의 그림들이 아직까지 너무 인상 깊게 남아있다며 내가 그린 춤 계열의 그림과 돈황벽화에 나타난 비천 그림들 사이에 어떤 연연성이 있는지,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춤을 테마로 그림을 그린 미술가로서 돈황석굴의 벽화에 등장하는 <비천> 그림들을 연구 목적으로 다시 대하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그 어떤 비천무 관련 연구자들과 다른 시각으로의 접근이 가능하지 않겠냐며 극구 나의 이번 돈황행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나의 이번 돈황행이 결코 어떤 학술연구의 목적이 아닌, 내 내부의 알 수 없는 어떤 바람 같은 것의 꼬드김 때문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막, 돈황의 사막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사막 위를 달리는 바람소리가 내 귀전에 맴돌고 있었다. 모래알들이 그 바람 안에 부딪쳐 더 작게 부서지는 소리가 나의 세포 속으로 이미 흘러들고 있었다. 그건 거부할 수 없는 힘이었다. 그건 반드시 응해야 할 유혹과 꼬드김이었다. 나는 무작정 돈황으로 향해야만 했다. 신강행을 결정할 때 이미 나는 또 한 번 길 위에 울리는 내 운명의 부름소리를 듣고 있었다.

돈황행 비행기의 게이트 앞은 다른 게이트 앞보다 많이 한산했다. 내 먼저 도착한, 일여덟 명쯤 되는 일본 관광객 팀이 높지는 않으나 꽤나 흥분된 목소리들로 돈코우시 돈코우시 하며 돈황시에 대한 이야기들을 쏼라쏼라 쏟아내고 있는 것이 귓가에 그냥 들려왔고, 아직 다른 탑승객들은 도착하지 않은 듯 더 새로운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엔지고헤르 씨의 말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장 교수의 그림에는 어떤 주술적인 코드 같은 것이 숨어있어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춤사위 같은 거, 그러나 기어코 그 운명의 춤사위들을 거부하고 그 운명에 맞서는 대항마로 춤사위를 흩날리려는 반항아로서 춤추는 자의 처절함이 또 다른 부호로 그림들 속에 숨어있어요. 이제 그것들을 더는 숨기지 말고 그대로 활짝 열어서 다 터뜨려버리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엔지고헤르 씨의 눈 속에는, 사랑의 상처 때문에 새로운 사랑에 대해 가슴의 문을 닫은 채 아직도 홀몸으로 지내는 나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대로 묻어있어서 친구로서의 그 진정이 더욱 가슴에 맞혀왔다.
친구의 그 진정에 나는 웃음으로 빙그레 대답을 대신하고 말았지만 그러나 속으로 이렇게 대답했었다.
-그래, 나도 활활 다 터뜨리고 활활 다 담아내고 싶지만. 그러나 그게 어디 내 뜻대로 되는 건가요? 당신 말대로 운명적인 것이라면, 그 운명이 아직 나더러 그 아픔을 다 버리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죠. 그 운명이 나더러 활짝 터뜨리라고 할 때까지 나로서도 나 자신을 어찌할 수가 없겠지요… 그렇게 길 위에 헤매는 내 시간들이 얼마나 힘든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헤매어도 운명은 아직 내게 답안을 주지 않고 있네요…
그래, 운명, 아직도 내게 답안을 주지 않고 있는 운명. 어쩜 이번 돈황행도 운명이 미리 그려놓은 내 정신방랑의 또 한 번의 새로운 시작일지 모른다. 돈황, 그 황폐한 사막의 도시에 나는 왜 기어코 찾아가야만 하는가? 단순히 막고굴의 그 색 낡고 피폐해진 벽화들을 보기 위해서?
아니겠지, 꼭 그것만은 아니겠지…
그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스스로의 물음에 스스로 아무런 대답도 찾지 못하며 나는 막연하게 또다시 내 내부로부터 쏴 하고 올리솟는 바람의 용트림 같은 것을 징조같이 느끼고 있었다. 이미 은은히 다시 아파오기 시작하는 가슴 밑바닥의 통증이 그것을 살짝 귀띔해 오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발작하는 이 운명의 통증이란…
그래, 운명이 나더러 다시 바람이 되라 하는데
난들 어찌하라구
운명이 나더러 또 한 번 길 위에 가슴 비틀어 피 흘리라는데
난들 어찌하라구
나는 내가 곧 만나게 될 돈황막고굴의 비천상을 머릿속에 상상하며 내 자신에게 이렇게 속으로 속삭이고 있었다.
너는 전생에 춤꾼이었다지?
줘마가 그랬잖아?
그 신비의 나무가 그랬잖아?
그 신비의 나무 앞에 너는 홀로 신들린 듯 춤을 추었댔잖아? 아무도 배워준 적 없는 춤을, 네 생에 춰본 적 없는 춤을.
그때부터 너는 이미 춤의 방랑 아였어.
길 위에 춤을 휘뿌릴 운명의 방랑아였다구…  
공항 대기실 의자에 눈 감고 기댄 채 나는 내 가슴 가장 깊은 곳에 꽁꽁 눌러두고 있던 아픈 이름을 다시 떠올려 심장이 비틀리는 듯한 통증으로 가슴 안에 외쳐 부르고 있었다.

신아야, 신아야,
너는 지금 어디메니?
줘마야, 줘마야,
내게 신아가 있는 곳을 알려다오…

3
몇 년 전 언젠가 미얀마의 국경 시가지 마을 만나뮤스키 한가운데로 난 비포장도로를 배낭 하나 달랑 메고 걸을 때였다. 마을 한복판을 지날 때 즈음해서 길옆에 치솟아 있는 특이한 나무 한 그루에 갑자기 시선을 빼앗겨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그 나무 앞에 서 있었던 적이 있다.
처음 보는 이름 모를 열대나무였는데 이미 몇 십 년 혹은 몇 백 년을 거기에 그렇게 서있었는지 두 사람이 함께 두 팔을 벌려도 안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둘레를 자랑하는 거목이었다. 그 키도 몇 십 미터쯤 될지 눈짐작이 어렵게 아스라하니 솟아 있었다. 아름드리 거목들이야 열대지방을 돌면서 수없이 보아 와서 그 크기에는 별로 놀랄 것이 없었다. 특이했던 건, 그 나무가 뿌리에서 올리뻗은 줄기 하나로 자라다가 어른의 키 높이쯤에서 두 가닥으로 갈라져 자라는 부분에서였는데, 그중 한 줄기는 그냥 그 나무의 껍질 색과 문양을 유지한 채로 위로 뻗는데 비해, 다른 한 줄기는 완전히 그 나무와 다른 껍질과 문양을 가진, 엉뚱한 다른 한 나무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얼핏 보기에도 완전히 다른 색깔의 가지와 다른 모양의 잎을 거느린 것이어서, 꼭 마치 다 성장한 완전히 다른 두 종류의 나무를 내가 그곳에 도착하기 방금 전에 그렇게 한데 뚝딱 접목시켜 놓은 듯한 착각을 주기에 충분한 나무였다. 
혹시 다른 한 나무가 뻗어 나온 그 곳이 상처를 입어 썩은 곳이거나 혹은 오목하게 파인 흔적이라도 있어 하늘 새가 떨군 똥 속에 들어있던 씨앗이 싹틀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거나 혹은 빗물이라도 고여 바람에 날리던 나무씨앗이 떨어져 발아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부분인가 싶어 자세히 살펴봐도 전혀 그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원래 땅 밑에 뻗은 뿌리에서 올리뻗은 원래의 줄기가 껍질 하나 상하지 않은 채로 아주 미끈하게 그냥 우로 쭉 올리뻗은 싱싱한 상태였고 다른 한 종류의 나무는 그냥 그렇게 그 줄기에서 무작정 다른 한 엉뚱한 가지처럼 그렇게 뻗어 나와 역시 원래 줄기가 펼친 가지와 무성한 잎들 못지않은 생명력을 과시하며 커다란 잎과 그늘을 펼치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한 나무 안에서 다른 한 나무가 나온 것이라고 밖에는 달리 더 해석할 수 없는 나무였다. 다른 한 뿌리를 내리지 않고 그냥 그렇게 다른 한 가지로 뻗어 다른 한 나무의 모양을 자랑하며 싱싱하게 한 뿌리에 공생하는 두 나무의 모양…

그 마을 사람들도 그 나무의 신기함에 그 나무를 신수로 모셨는지 그 나무 거의 꼭대기 부분부터 손바닥만 한 오색 삼각기를 가득 매단 채 색 띠를 여러 겹 그 나무 둘레로 나무 밑둥까지 감아놓고 있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조용히 속으로 흐느적이고 있을 나뭇잎들만큼이나 그렇게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처져있는 채색기들의 해지고 색날은 모습을 보며 나는 열대 무더위 속을 걷느라 많이 거칠어져 있었던 내 숨결을 어느새 속으로 차분히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렇게 그 나무 앞에 얼마쯤 서 있었을까, 나는 속으로 시구절 비슷한 이런 글귀를 뇌이고 있었다.

나무 안에
다른 한 나무가
있었네

시간 안에
다른 한 시간이
있었네

서로 제각기 
억겁쯤 흐르다가
그렇게 어느 한 순간
만나서 얼싸 안았네

한 나무 안에 만나
이젠 한 시간 안에
다시 억겁쯤 함께
그늘 만들기로 약속했네

내안의 다른 한 내가
지금 그 나무 앞에
억겁쯤 숨어 지냈던 듯 나에게
미소를 보내네…

뭐… 여행길에 특별히 눈길을 잡아끌거나 가슴을 탁 치는 풍경 같은 것을 만나게 되었을 때 스케치북을 배낭에서 미처 꺼낼 상황이 아니거나 손에 카메라를 들고 있지 않을 때면 이렇게 머릿속에 엉성한 글 구절이라도 떠올려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내 예술가인 체 하는, 혹은 방랑시인인 체 하는 고약한 버릇이니, 그날 그렇게 두 얼굴의 나무 앞에 이런 시구를 떠올렸던 건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그때 그런 글귀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나는 분명 나무가 나에게 무엇인가를 속삭이는 듯한 소리를 들었고 그 나무의 소리를 들어 나는 내 내면에서 울리는 다른 한 나의 목소리에 귀를 앙구어야만 했었다. 그때 나무는 분명 나에게 이렇게 속삭여왔고 그 속삭임에 내 안의 다른 한 나는 분명 이렇게 대답했다.
-너는 전생에 춤꾼이었어. 바람 속에 춤추는 춤꾼이었어.
-알아, 전생에 나는 바람이었고, 그리고 나는 또 그 바람 속에 맨발로 춤을 추던 춤꾼이기도 했어.
그 속삭임소리를 분명 귀가에 아닌 심장에 들으며, 나는 그 순간 내 가슴 안에서 쏴 하고 파도처럼 올리솟으며 회오리치는 소리도 함께 들어야만 했다. 그건 바람이 태어나는 소리였다. 길에 오른 후 얼마쯤 잠들어 있던 바람이, 바람이, 내 가슴 안에서 다시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고 있었다. 해마다 한두 번씩 내가 미처 예상도 못했던 곳에서 내가 아무런 방비도 못하고 있을 때 문득 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용트림 치듯 회오리치며 올리솟는 바람, 바람.

그때마다 나는 그 바람의 정체를 알 수 없으면서도 그 바람이 이끄는 대로 바람 따라 길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그러나 그렇게 길에 올라 바람처럼 방향 없이 걸어지는 대로 걷고 또 걸어도 바람은 가슴 밖으로 불어나갈 대신 더 가슴 안으로만 불어들곤 했다. 그 바람은 가슴을 시원하게 식혀주는 것이 아닌 뜨거운 바람이여서, 나는 화산구처럼 더 뜨겁기만 해지는 내 가슴 안의 열기 때문에 길 위에 항상 뜨겁게 뜨겁게 헐떡여야만 했다. 그 열기를 길에다 털어내려고, 길에다 버리려고 나는 길 위에 걸음걸음 숨고르기를 해야만 했고, 그러나 그렇게 걸음걸음에 숨을 고를수록 내 가슴속의 뜨거움은 더 강해지는 듯했다.

아, 어데 가면 토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다 비워낼 수 있을까,
타려면 어서 다 타버려라.
불타려면 어서 활 불타올라라.

그러나 이번에도 그리 쉽게 토해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리 단번에 비워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뜨겁기만 할뿐 불타오르지 않았고, 이번에도 역시 스스로를 태우고픈 데 도무지 태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길 우에 헤매는 내 시간들은 더 길어졌고, 나는 더 길 우에 오래 오래 걸어야만 했다. 그리고 더 자주 자주 길에 올라야만 했다.
그렇게 걷는 길 우에 다시 또 느닷없이 가슴 안에 불기 시작하는 바람, 그리고 그 바람소리 속에 들려오는 내 내면의 다른 한 나의 속삭임, 그 속삭임은 내게 춤을 요청하고 있었다. 내가 알 수 없는 어느 아득한 시절의 어느 춤꾼의 춤사위를 바람에 실어 내 몸을 휘저어오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몰래 발레리나처럼 사뿐 들려지는 내 발뒤꿈치를 의식해야만 했고 어느새 나는 바람처럼 가볍게 그 나무둘레를 발끝으로 자박자박 즈려밟아 돌기 시작했다. 그 나무 앞에 서서 그 나무를 바라보던 내 몸이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내 몸 안의 다른 한 내가 그렇게 내 몸 안에서 바람처럼 빠져나와 나무주위를 바람처럼 에돌며 춤자락을 휘날리고 있었다. 그런 내 춤에 화답이라도 하듯 바람 한 점 없는 허공에 매달려 있던 채색 띠들이 살랑살랑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참으로 아리따운 몸매로 내 앞에 춤을 춰주었던 어느 한 여자애를 떠올리고 있었다.
줘마, 양 볼에 빨간 색 고원홍(高原紅)을 빨갛게 물들인 채 그렇게 매혹적인 자태로 내 앞에 서장 전통춤을 춰주었던 서장소녀 줘마… 줘마도 내게 이렇게 속삭였었다.
-당신은 전생에 춤꾼이었어요… 하아얀 산 위에 하아얀 춤자락 날리던 흰색의 춤꾼이었어요.
라고.

서장대학에 서장미술 연구 교수로 있은 지 거의 1년, 이제 서장에서의 시간에도 마침표를 찍고 고향에 있는 대학으로 복직하러 돌아가기 전에, 서장대학 예술학부에서 해마다 졸업시즌을 맞아 펼친다는 미술계 졸업생 회보전시회에 지도교수로 학생들의 작품과 함께 내놓은 내 그림 <만년무신(万年舞神)> 그림 앞에서였다.
마침 강의가 비어있는 시간대여서 다른 교수들이 출품한 작품도 감상할 겸 학생들의 그림도 다시 한 번 더 살펴볼 요량으로 전시장을 찾았을 때 너른 전시장에는 달랑 여성관중 한 사람뿐이었다. 하긴 오전 시간이니까 대부분 학생들과 교사들은 거의 다 교실에 들어가 있을 시간대였다. 애티 나는 얼굴로 봐서는 교직원이 아닌, 학생임에 틀림없었다. 순백의 하얀 실크 소재로 만든 서장전통 치마를 입은 그 여학생은 우연인 듯 면바로 내가 출품한 작품 앞에 서있었다. 전시장의 일인관중이 다른 사람의 그림이 아닌, 내 출품작을 감상하고 있다는 사실이 약간 뜻밖이면서도 기분에 나쁘지는 않아, 조용히 그 여학생 옆에 다가가 섰다. 그러나 그 여학생은 내가 자기 옆에 가까이 다가간 걸 분명 문소리와 구둣발소리로 느꼈을 것임에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고,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무아경에 빠져 그림감상 모드에 들어간 것이라면 내게는 너무 고마운 일이었다.

이번에 출품한 나의 그림 <만년무신(万年舞神)>은 작년 여름 내가 라싸에 도착해서 그린, 서장에서의 첫 그림이었다.
세상에 라싸하라는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이 고원 최대의 도시에까지 찾아온 나였다. 10년간 가꾸어온 첫사랑 그녀와의 결혼을 앞두고 그녀의 배속에 이미 두 달 동안 잉태되어 있던 아이를 잃고 나서야 알게 된,  내 가장 친했던 친구의 너무나 철면피한 배반과 짐승 같은 행위 앞에 치를 떨어야 했고 결혼 후의 달콤한 사랑의 둥지 가꾸기에 정신이 없던 내게 너무 갑작스레 내려진 청천벽력 같은 사건은 내 정상적인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되고 허용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법적으로 해결하는 길만이 유일한 정상적인 선택임에, 그 선택만은 할 수가 없어서 오히려 살인이라도 저지르고 싶은 충동에 허덕이며 분노와 절망으로 거의 미쳐갈 때쯤, 그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인 그녀 역시 소리 없이 내 옆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건 더구나 내가 전혀 예상 못했던 사건이었고 나는 차마 살인만은 저지를 수 없어서 버리고프지만 버려지지 않는 내 몸뚱이에 분노와 절망, 저주와 악만을 넘치게 담은 채 거의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렇게 무작정 길에 올라 방랑하다 이제 너무 걸어 지쳐 쓰러질 즈음 도착한 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도시-라싸. 전 세계 도시 중 가장 높은 해발고를 자랑하는 이 도시에 그런 큰 강물이 흐르고 있을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었다. 그런 내게 설산의 흰 눈이 녹아서 내린 물결로 그렇게 도도히 흘러 내 몸 먼저 내 가슴속을 적셔 흐른 강물. 그래서 라싸에 도착한 첫날 고소 증으로 고열에 시달리는 몸을 끌고 병원을 찾아가는 대신 무작정 라싸하에 몸을 던져 미친 듯 미역을 감았던 나였다.
아아, 잊을 수 없이 뼈 시리고 가슴 저리던 그 라싸하의 달밤아래 미역 감기… 그 라싸하에 신열에 뜨거운 몸을 던져 넣은 채 고개 들어 하늘의 달빛을 보는 순간  무작정무작정 내 입에서 터져 나오던 아우성 같은 흐느낌과 그리고 두 눈에서 보물이 터진 듯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 그건 쌓이고 쌓였던 분노와 저주의 울부짖음이었고 미칠 수 없어 미칠 것 같던 광기 같은 것이었다. 얼마나 흐느끼고 얼마나 울부짖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가? 흐르는 라싸하의 물보다 더 많이 흘렀을 것 같은, 내 몸 안 어디에 그렇게 많은 눈물이 숨어 있었던가 싶게 그렇게 내 몸의 무게 열배보다도 더 많은 양의 눈물이 끝없이 멈춤 없이 줄줄 흘러내렸고 나는 그 눈물과 그 오열에 지치고 지친 몸을 그대로 맡긴 채 신열에 멈출 수 없이 와들와들 떨리는 몸을 그대로 맡긴 채 그냥 그렇게 라싸하에 잃어버린 내 떠나간 첫사랑을 흘러 보내고 그 첫사랑이 남긴 용서 못할 죄들을 고통과 함께 실어 보냈다. 

한여름 장맛비처럼 멈춤 없이 그냥 줄줄 흘러내리던 그 눈물… 얼마나 오래 동안 라싸하에 몸을 담그고 있었는지, 그렇게 덜덜덜 떨리던 고소증의 신열이 어느새 내 몸에서 다 빠져나가고, 밤기운이 차갑구나, 너무 온몸이 얼어들듯이 차갑구나 하는 걸. 느꼈을 때 나는 이미 내 가슴에 응어리져 있던 분노와 저주와 그리고 사랑의 아픔이 어느새 내 가슴 안에서 많이 사라진 걸 깨달았다. 그렇게 꽉 퍼런 피멍으로 막혀있던 가슴이 언제 그렇게 펑 뚫린 듯 시원해졌는지 믿어지지 않는 순간이었다. 아, 숨을 쉴 수 있구나. 내 가슴속으로 다시 이 세상의 시원한 공기를 받아들일 수가 있구나. 그 사랑의 아픔 때문에 지금까지 그렇게 분노와 저주와 절망에 허덕였던 자신이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분노와 저주와 절망과 아픔 때문에 온밤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백두봉 정상에서 목청이 터지게 웨치고 두만강 푸른 물에 뛰어들어 울부짖어도 씻어낼 수 없었던 그 모든 것들이 라싸 도착 첫날 밤 라싸하의 차가운 물 속에 이렇게 씻어져 나갈 줄 누가 알았으랴. 꿈을 꾸고 난 것만 같았다. 꿈속에 심한 열병을 앓고 난 것만 같았다.
이제 내 몸은 신열 때문이 아니라 너무 차가운 라싸하의 물 때문에 덜덜덜 떨고 있었고 그리고 나는 다시 태어난 나를 스스로 신기해하며 방금까지도 으아악 으아악 하고 아픔과 저주를 절규하던 입으로 어어어 추워 어어어 추워하면서 이젠 돌아온 내 몸의 감각 때문에 물 안에 옹크리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동녘이 희붐히 밝아오는 순간이었고 나는 라싸하 남쪽의 낮은 산봉우리 위에 하얀 눈이 쌓여 있음을 발견해야만 했다. 아아, 달려간다면 십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 저 가까운 산, 톺아오른다면 역시 십여 분이면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은 높지 않은 저 작은 산봉우리, 그 산봉우리에 흰 눈이 차분히 내려앉고 있을 때, 나는 온밤 그 산자락아래 라싸하에 몸을 담고 잃어버린 내 사랑의 상처를 라싸하물에 씻고 있었구나…
물에서 나와 옷을 입은 나는 무작정 그 산을 향해 걸었고 고소증 때문에 숨이 컥컥 막혀 십 분이 아니라 거의 반시간 만에야 산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막 넘어갈 듯한 숨을 겨우 고르고 그 산 꼭대기에 올방자를 틀고 앉았다. 저 멀리 만년설 떠이고 섰는 이름 모를 아아한 설산너머로부터 떠오르는 일출을 바라보며 저도 몰래 화구를 펼쳤다. 무작정 붓에 안료를 듬뿍 묻혀 캔버스에 붓을 날리기 시작했고 눈에 보이는 일출의 설산이 아닌, 아아한 설봉 위에 환락의 춤을 추는 춤꾼을 그리고 있었다. 그건 내가 그리는 그림이 아니었다. 분명 내가 아닌 다른 한 의지의 손이 나의 손을 잡고 마구 붓을 날리고 있었다. 그 그림을 그리며 나는 떠나간 사랑의 아픔 대신 그 사랑의 희열을 가슴 넘치게 받아 안고 있었고 빼앗기고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원망과 저주 아닌, 떠나간 사랑을 축복해주는 뜨거운 사랑의 환호를 그려 넣고 있었다.
그래, 잘 가라 내 사랑아, 내 너를 위해 춤을 춰주마.
그래, 행복해라 내 사랑아, 이 세상서 가장 행복해라.
그렇게 소리 없이 나에게서 떠난 그녀에 대한 용서와 축복을 그림에 담았다.
산 정상 바위에서 산자락까지 수십 갈래 수백갈래 빙 둘러 산을 한 바퀴다 덮듯이 매여져 있던 서장 특유의 오색 깃발 룽다가 찬연한 일출을 받아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그림 그리는 나를 그렇게 응원하고 있었다. 룽다에 인쇄된 불경들을 바람이 읊는 소리가 붓을 든 내 손의 움직임을 더 빨리 해주고 있었다. 나는 서장 땅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서장인들에게서 배운 6자 진언을 나도 모르게 웅얼대기 시작했다.

옴매니빼메홈
옴매니빼메홈

그 6자 진언을 수도 없이 반복해 읊으며 나는 신들린 듯 신들린 듯 그렇게 덜덜 떨며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에 나는 <만년무신(万年舞神)>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짧았던 첫사랑은 그렇게 갔지만 그 첫사랑을 위한 춤은 천년만년 이어지리라…  
그리고 여름방학이 다 끝나고 개학이 되어도 강단으로 돌아가지 않은 나의 책임을 추궁할 대신 고원에서 좋은 작품을 많이 창작하라며 오히려 서장대학에 추천서를 써서 보내준 대학장의 고마운 처사로 나는 라싸하 강변에 위치한 라싸대학에서 일 년 동안 미술교수로 교편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1년이 거의 되어가는 졸업시즌을 맞아, 서장대학 미술학부의 졸업생회보 그림전시회에 내가 라싸에 도착한 이튿날에 그렸던 그림을 출품했다. 그 그림 앞에 지금 아릿다운 자태의 서장소녀가 옆에 사람이 온 줄도 모르고 몰입해 감상모드에 들어가 있었다.
그 여학생은 내가 자기 옆에 서 있은 지 10여분이 지나도록 아무 움직임 없이 그 그림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고 그러던 어느 순간 그 여학생의 두 팔이 갑자기 들려져 휘익 하고 바람을 일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놀란 나는 엉거주춤 뒤로 둬 발작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그 여학생은 그렇게 선 자리에서 두 팔을 휘휘 저어 움직이던 데서, 이젠 두 발을 엇갈아 사뿐사뿐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건. 춤사위였다. 춤 동작이었다. 내 상상속의 <만년무신> 그림속의 춤의 신이 휘날리던 춤자락이었다. 무대가 아닌 미술작품 전시장에서 펼쳐지는, 그림 관중의 춤 세레머니… 너무 뜻밖의 광경에 나는 멍하니 그 여학생의 춤사위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고 분명 나와 눈길이 마주쳤으면서도 그 여학생은 전혀 개의치 않고 나의 존재 같은 건 안 중에도 없는 듯 아무 음악도 없는 전시장에서 그 춤사위를 이어갔다. 너른 전시장이 그대로 무대인 듯 홀로의 무아경에 빠져 춤의 삼매경에 빠져…
그녀의 춤은 점점 더 그 템포를 빨리했고 그 춤은 가히 수준급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춤은 10분쯤 이어졌고 그녀의 그 춤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그저 어안이 벙벙해질 뿐이었다. 그림을 감상하다 그렇게 신들린 듯 장소에 구애 없이, 옆에 다른 방해자가 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의 춤에만 몰두하고 충성하는 여학생. 어느새 그녀의 숨결이 가빠지는 소리가 전시장에 크게 울림으로 들렸고, 그녀는 이제 막 솟구치고, 막 쓰러지며 춤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의 춤은, 빙글빙글 돌아 다시 내 그림 앞에 돌아왔을 때 딱 멈추어졌고, 고원홍(高原紅)으로 원래 빨갛던 볼은, 방금 강렬했던 춤 때문에 더 노을처럼 붉게 상기된 채 약간 땀에 젖어 촉촉하니 뜨거운 김을 토해내는 듯싶었다. 그렇게 내 그림 앞에 다시 선 그 여학생은, 다시 아까처럼 부동의 자세로 그림에만 눈길을 둔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기를 한참… 전시장에 그녀의 혼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전생에 춤꾼이었어요. 붓을 들어 이렇게 멋진 그림을 그렸지만, 당신은 분명 전생에 춤꾼이었어요. 하아얀 산 위에 하아얀 춤자락 날리던 흰색의 춤꾼이었어요.
내게 등을 보인 채, 그림을 마주 향해 그림과 말을 나누듯 중얼거리는 목소리. 그러나 그 중얼거림의 내용은 분명 나에게 하는 말인 듯  싶었다. 나더러 들으라고, 나에게 속삭이는 말인 듯싶었다.
-당신은 한을 품은 춤꾼이었어요. 춤 때문에 맺힌 한이었어요. 그 한을 춤으로 풀었어야 하는데, 춤으로 맺힌 그 한은 춤으로 밖에 풀 수가 없는데, 당신은 그러지 못하셨군요. 그림으로 푸셨군요. 춤의 한은, 춤으로 풀어야 하는데…
다시 속삭이는 듯한 그녀의 중얼거림은 분명 그림의 작가인 내게 말해오는 내용이었다.
어? 어떻게 알았지? 그림에는 내 사진이 붙어있지 않는데, 어떻게 내가 이 그림의 작가인줄 알았지?
그리고 또 어떻게 보아냈지? 저 그림 속에 담은 나의 그 뼈에 사무치는 한을, 아픔을.
사라진 줄 알았던 통증이 다시 내 가슴을 탕, 하고 명중해왔고, 나는 잊었다고 생각했던 나의 그녀를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내 앞에 한없이 한없이 춤을 춰주던 내 사랑 그녀, 그러나 그 사랑의 상처와 한을 안고 나를 떠나가 버린 그녀…
다시 그 여학생의 중얼거림이 귀가에 울림처럼 들려왔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당신은 춤을 추게 될 거예요. 춤으로 그 한을 다 풀 거예요. 그건 운명이예요. 운명이 당신더러 춤을 추라 할 거예요. 그때 당신은 그 춤을 거부할 수 없을 거예요. 거부해서는 안 되는 운명의 춤이니깐요. 전생의 한까지 다 푸는, 운명의 춤이니깐요…
속삭이듯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그러나 그녀의 중얼거림에는 강한 울림이 있었다. 자석 같은 이끌림이 있었다. 거의 텅 빈 전시장이여서 공기의 울림이 커서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그 중얼거림은 내 귀에, 그리고 내 가슴에 하늘이 들려주는 운명의 계시록처럼 큰 울림으로 맞혀왔다.
-당신은 춤을 추게 될 거예요. 출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때 춤을 거부하지 마세요. 그건 운명이니까. 운명을 거부하지 마세요. 운명은 거부하는 게 아니예요. 운명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기세요. 당신이 아닌, 당신의 운명이 당신을 이끌어 한풀이 춤판을 한마당 벌여 줄 거예요. 그때 마음껏 춤을 추세요, 가슴을 열고 몸을 열고 숨결을 다 열고 몸속에 흐르는 피의 흐름에 맡기세요. 뜨거운 피가 달리는 대로 따르세요.
그렇게 그림을 향해 속삭이던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나를 향해 쌩긋 웃어주었다. 너무 고혹적인 미소였다.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전에, 내 가까이로 미끄러지듯 움직여 와 내 귓가에 대고 다시 한마디 속삭였다.
-언젠가 우리 꼭 다시 만날 거예요. 운명이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할 거예요. 제 이름은 줘마예요. 무용학과 올 졸업생이예요.
속삭임을 마친 그녀는, 미처 내가 반응하기도전에 다시 미끄러지듯 치맛자락 날려 전시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홀연히 내 앞에서 사라졌다.

이제 그 큰 전시장에는 나 혼자뿐 이었다.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쩜 진짜로 꿈을 꾼 것인지도 몰랐다. 둘러보아도 전시장 그 어디에도 그녀의 흔적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출입문 유리창 너머로 멀리 복도에 보이는 그녀의 뒷모습은, 분명 방금 전에 내 앞에서 벌어졌던 모든 상황이 실제 사실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도대체
도대체…

한참 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분명 꿈은 아니었다. 직접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내 앞에서 본 신들린 춤이었고, 그리고 분명 내 두 귀로 들었던 그녀의 속삭임이었다. 주술사처럼 중얼거려 예언가인 듯 내게 내 운명의 춤을 약속처럼 예언해준 그녀… 학생인 그녀가, 무용학과 졸업생이라는 학생신분의 그녀가 교수인 내게 그런 말을 하다니? 그녀가 알려준 신분이 그녀의 진짜 신분이 맞다면, 그건 도무지 믿기지 않을 불가능한 것이었다. 도무지 어린 여학생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하늘의 목소리 같은 것이었다. 주술사의 입에서만 나올수 있는 주술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나는 신기하게도 방금 내 앞에 신들린 듯 무아경에 빠져 춤을 춘 그녀의 그 행동과, 내게 내 운명의 춤을 속삭여준 그녀의 언사를 비현실적이기는커녕 오히려 꼭 믿어야만 할 운명의 속삭임처럼 너무 당연히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방금 그녀가 알려준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줘마…줘마라…….
그날 오후 나는 무용학과에 전화해서, 무용학과 졸업생 중에 확실히 줘마라는 여학생이 있고, 올 무용학과 졸업생 중 최고의 수재로 졸업한 학생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서장의 강남이라 불리는 린즈지방의 원시림이 우거진 신비의 원시부락 마을에서 온 여자애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졸업하면서 우수한 학업성적과 최고의 춤 실력으로 서장가무단 무용수로 분배받았으나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그 분배를 거절한 이해 못할 괴짜여학생이라는 말도 함께 들었다. 아버지가 추던 그 원시림속의 주술적인 신비의 춤 바통을 이어 받는 것이 자기의 춤꾼으로서의 운명이라며 기어코 고향 행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서장대학에서의 1년 생활을 마치고 나는 그 고원에서 내려왔고, 그 후 나는 다시 그녀를 다시 보지 못했다. 그러고 그녀를 거의 내 기억에서 잊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미얀마 국경 시가지 마을 한복판의 한그루 이상한 나무 앞에서 나는 다시 떠올리고 있었고, 그때 줘마가 내게 해줬던 그 운명의 예언 같은 것을 방금 들었던 것같이 그대로 다 떠올리고 있었다. 그건 분명히 기억하려고 해서 기억되었던 말이 아닌데, 내 본의 아닌 시간의 흐름에 씻겨 거의 다 잊혀져 가던 것이었는데… 그런데 나는 지금 이국의 이름 모를 한그루 나무 앞에서 그날 그 전시장에서의 줘마의 황홀하던 춤사위와 조용하나 울림이 강하던 줘마의 속삭임을 다시 생생히 떠올리고 있었다.
줘마라고 했지? 줘마…
줘마, 너는 지금 어데서 어떤 춤꾼으로 어떤 춤을 추고 있는 거지? 이 신비의 나무 앞에서의 내 춤을 너는 보고 있는 거니?
나는 내 운명 가까운 곳 어딘가에 이미 줘마가 다가와 나를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날 그 나무 앞에서 했다.
그리고 잃어버린 내 첫사랑 그녀의 이름도 다시 떠올려 속으로 외쳤다.
신아야. 신아야… 너는 지금 어데 있니? 잘 살고 있는 거지? 죽지 않고 잘 살고 있는 거지? 제발 그렇게 살아만 있어다오. 이 세상 끝까지 뒤져서라도 내 꼭 내 두 발로 너를 찾아가고야 말거다… 내 사랑 신아야…
그때 나는 이미 내 운명 속에 들어와 자리 잡은 줘마의 힘을 믿어 내게 신아가 있는 곳을 가르쳐달라고 줘마를 향해 외쳤는지 모른다. 줘마, 너는 알지? 신아가 있는 곳을.
그곳으로 나를 인도해다오.

4
우룸치 디워바오공항에서 돈황으로 향하는 비행기는 지금까지 내가 탑승해본 비행기 중에서 가장 작은, 33인승 프로펠러 비행기였다. 기내에는 나를 포함 도합 10명의 승객뿐이었고, 그래서 그 작은 비행기도 오히려 넓어 보일 지경이었다. 비행기 앞부분과 양쪽 날개에서 돌아가는 프로펠러가 만들어내는 강한 소음과 진동에 기체는 불안하게 기수를 들어 하늘로 날아올랐고, 비행고도에 올라서도 구름 속을 날아 지날 때 기류의 강한 저항에 심하게 요동치며 세 번씩이나 덜컥 하고 갑자기 고도를 팍 팍 낮추어 등골이 오싹해지군 했으나 그러나 무사히 돈황공황에 도착했다.
돈황공항은, 역시 내 상상을 뒤엎기에 충분하게 시골역사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작은 공항이었다. 전체 비행장에 비행기라곤 달랑 우리를 싣고 날아온 한대뿐이었는데도 브릿지를 통해 비행기에서 직접 공항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건물 가까이 비행기를 대는 것이 아니라, 비행장 활주로 끝머리 콘크리트 바닥에 그대로 비행기를 세워 승객들을 부려놓았다. 비행기에서 공항건물까지 승객들을 실어 나르는 셔틀버스도 없어서 그대로 걸어서 그 건물로 향하였고, 건물 가까이 도착하여보니 건물 안으로 들어갈 필요 없이 건물 옆에 난 작은 쇠그물 문으로 직접 공항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었다. 참으로 시골역사처럼 편하게 되어있는 시스템이고 상상을 초월하게 작은 공항이여서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게 밖으로 나와서 다시 공항 건물 안으로 들어가 비행기에 수화물로 부쳐 보낸 짐이 언제 나오나 하고 한참 기다렸으나 빙빙 돌아가야 할 검은색 벨트는 도무지 움직일 기미를 안 보인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그 벨트 앞에 기다리는 사람은 달랑 나 혼자뿐… 돈황관광을 마치고 돈황을 빠져나가려고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 관광 팀이 하나 있어 관광기념품을 판매하는 매대 앞은 그나마 흥정소리로 흥성했다. 천정으로부터 쭉 내리 걸린 그림족자속의 그림들은 대부분 비파를 품에 안고 있는 천녀를 그린 비천도였다. 얼핏 보아도 그 화법이 엉성하기 짝이 없는, 상업목적으로 붓질이 서투른 사람들이 마구 붓을 날려 기계로 찍어내듯 그렇게 모사하여 수량작업으로 완성한 관광 상품용 그림이었다.
비천 그림을 만나기 위해 돈황에 왔으면서도 왠지 이상하게 공항 한쪽 벽을 거의 다 차지한 그림족자속의 비천상에는 아무런 관심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어서 저 검은 벨트가 빙빙 돌기 시작해 내 가방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좀 더 기다리면 나오겠지 싶어 멍하니 서있는데 옆에서 캐득 하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첨 돈황에 오시는 거죠? 
명랑한 톤의 여자목소리여서 고개를 돌려보니 인도 여인들의 사리 같은 머플러로 얼굴을 절반이상 가리고 짙은 커피색 선글라스까지 끼어 얼굴을 거의 알아볼 수 없는 낯선 여성이었다. 모래바람이 강하고 일사광선이 강한 사막의 도시에서 황사와 자외선으로부터 얼굴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단장이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어망 결에 그렇습니다만, 하고 대답했다. 그 여자의 입에서는 다시 캐드득 하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짐 가방을 기다리고 계시는 거죠? 그렇게 그 앞에 온 하루 기다려도 짐이 안 나올 거예요. 직접 비행장 안으로 들어가서 비행기가 섰던 곳에 가서 자기 짐을 찾아 들고 나오셔야 되어요.
-네?
처음 듣는 천방야담 같은 소리여서 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질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저도 몰래 그 여인을 따라 다시 공항 밖으로 나와 아까 나왔던 그 쇠 그물로 된 철문 앞으로 다가갔다. 철문 한옆에 무료해서 죽겠다는 듯 눈을 반쯤 거슴츠레 감고 페인트칠 다 벗겨진 낡은 의자에 앉아 조을고 있던 보안요원이 꽥 소리 질러 내게 왜 들어 가냐고 물었다. 나 대신 그 여인이 대답해주었다.
-돈황에 첨 오는 손님이여서, 비행기에서 자기 짐을 기다려 직접 찾아들고 나오지 않고, 짐을 놔두고 자기 몸만 나와서 그래요. 짐 찾으러 들어가니까 그대로 들어가게 하세요.
그녀의 말에 그 보안요원은 아 알만하다는 표정을 눈에 담으며, 탑승권 확인이나 신분증 확인 같은 것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내게 명령하듯 말했다.
-빨리 들어갔다 빨리 나오세요.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이예요. 담부턴 못 들어가게 할 겁니다.
그렇게 민간인인 나는 걸어서 다시 비행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비행기 날개 밑에 버려진 듯 달랑 혼자 놓여있는 내 짐 가방을 찾아들고 다시 그 철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왔다. 너무 허술한 공항 안전관리 시스템에 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건 어쩜 이 사막의 도시가 자기를 찾아오는 여행객들에게 던져주는 최고의 너그러운 첫 쇼크와 유머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속으로 참 재밌는 곳이군, 하고 이 도시에 찾아오기 위해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부터 느꼈던 경이로움에 다시 한 번 속으로 키들거릴 수가 있었다.
방금 내게 짐을 찾는 방법을 알려줬던 선글라스의 여인은 그냥 그 철문 밖에 서 있었고, 나를 기다렸다는 듯 환히 웃으면서 나를 맞아주는 그 여인을 그제야 나는 다시 눈여겨 살펴볼 수 있었다. 머플러로 절반 넘게 가려진 얼굴과 짙은 선글라스 뒤의 눈빛을 제대로 볼 수 없어서 아쉬웠지만, 그러나 충분히 현대인의 패션 감각을 보여주는 차림새로 몸을 가꾼 젊고 세련된 3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눈빛으로 저를 기다리고 계신 거예요? 하고 묻자 그 여인은 내 눈빛의 뜻을 알아챈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돈황에서의 당신의 시간을 저에게 맡기시면 됩니다.
내 의사 같은 건 물을 필요도 없다는 듯 그렇게 차분한 목소리로, 그러나 거절 같은 건 아무 필요 없다는 결연한 어투로 한마디 던지고는 무작정 손을 내밀어 내 손에 들린 짐을 자기 손에 빼앗아 들고 돌아서 걸었다. 
-어, 전 가이드가 필요 없는 데요…
어정쩡한 기분에 대꾸같이 겨우 한마디 중얼거리며 그러나 나는 어느새 귀신에 홀린 듯 그 여성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여행길에 간혹 만나게 되는 삐끼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순간 들긴 했지만, 그러나 그 여인의 목소리에 들어있는 묘한 이끌림의 힘이 나더러 순순히 그 뒤를 따라가도록 했다.
작은 공항광장을 가로질러 건너자 작은 주차장이 나왔고, 그 주차장 한가운데 녹색 잎 색깔을 자랑하는 팔라딘 지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 짐을 차에 먼저 싣고 운전석 옆의 조수석문을 열며 그 여인은 내게 차에 오르라는 손짓을 했다. 그 여성의 뒤에서 걸으며 살펴본 그녀의 걸음걸이라든지, 차문을 열고 짐을 싣고 다시 조수석 문을 열어 나에게 승차를 권해오는 그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너무 탄력이 넘치고 세련되어 있어서 마치 무대 위에서 신비한 마술쇼를 펼치는 미녀마술사의 동작 하나하나를 보는 듯 했다. 그래, 마술쇼라면, 나도 이제 그 마술쇼의 주인공으로 혹은 조수로 함께 무대 위에 올라주면 되겠지. 
나는 더 아무 말 않고 조수석에 올라 안전벨트를 당겨 맸다. 낯선 곳에서 첨보는 여인에게 무작정 끌려서 차에 올라 그렇게 될 대로 되라지, 하고 나를 맡겨버리는 이 황당함이란…
그녀도 어느새 운전석에 올라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고, 오른 손으로 트랜스미션 기어를 뒤로 당겨 드라이브 모션으로 넘어갔다. 부릉, 하고 차체가 꿈틀하고 요동치며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제야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믿어줘서 감사해요.
나는 내가 미리 예약한 호텔이름을 알려줬다.
-돈황호텔로 가주시겠습니까? 이미 예약이 되어있어서.
-그 호텔 예약 전에 미리 우리의 운명의 만남이 예약되어 있었던 거 아닌가요?
그 여인은 묘하게 말끝을 올리끌며 나를 향해 웃었다. 운명의 예약이라… 불현듯 뒤통수를 탁 쳐오는 어떤 예감 같은 것에 나는 대답을 잃은 채 멍하니 그 여인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 여인이 얼굴을 가렸던 머플러를 풀고 눈을 가렸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아, 줘마!
내 입에서는 저도 몰래 비명 같은 감탄이 튀어나왔고, 줘마는 그렇게 내 옆에 나를 보며 따사로이 웃어주고 있었다. 거의 십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얼굴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얼핏 그렇게 딱 한번 잠깐 십여 분 동안 전시장에서 춤으로 보았던 그 얼굴. 그 얼굴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나 자신에게 신기할 정도였다.
-아직 기억해주고 계시는군요. 잘 지내셨죠? 우리 다시 만난다 했죠? 운명 속에 다시…
-줘마.
아무 말도 못하고 다시 줘마의 이름만 부르며 나는 덥석 줘마의 오른 손을 잡았다. 줘마도 앞으로 미끄러져 나가던 차를 브레이크 밟아 세우고, 내 눈빛을 마주해 한참 동안 그렇게 나를 바라봐 주었다. 줘마, 줘마…
그 얼굴에 흐르는 빛은 그렇게 안온하고 따스한 성숙된 여성의 것이었다.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흘렀구나. 앳된 소녀의 얼굴이 이렇듯 세월과 함께 성숙된 여인의 얼굴로 바뀌었구나. 그런데 네가 이곳에 어쩐 일이지? 내가 오늘 이곳에 올 줄 알고 미리 와서 기다린 거니? 그럼 아까부터 나를 알아봤던 거니? 알아보고도 일부러 능청을 떨었던 거니?
입 안에 맴도는 말이 많았으나 묻지 않았다. 이제 물음 같은 건 아무 필요 없는 것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운명, 그래 운명 속에 우리 둘은 이곳에서 만나기로 되어있었을 뿐이었고, 그 운명 속에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났을 뿐이었다. 다른 해석은 다 필요 없는 것이었다.
운명인데
운명인데
어찌하라구…

한 없이 한 없이 감격될 뿐이었다. 그녀의 예언대로 다시 만난 우리…
전시장에 함께 잠깐 했던 그 인연이 이렇게 거의 십년의 시간이 지난 후의 해후로 다시 이어진 사실을 믿기 어려웠지만, 그러나 지금 나는 줘마의 차에 앉아 있었다. 몇 분 전에도 상상 못했던 일이었다.  
이름 모를 희열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자꾸 올리 치솟아 나는 막 울 것 같아지는 자신을 겨우 참았다.
왜지?
왜서 이렇게 반갑지?
그렇게 잠깐 스쳤던 인연일 뿐인데…
그 스치는 인연의 시간에 나는 말 한 마디 건네 보지 못하고, 그녀만 내게 몇 마디 속삭였던 그런 인연일 뿐인데…
나로서도 이해되지 않는, 너무 쉽게 어느새 감동으로 차 넘치는 내 가슴의 격정이었다.
-호텔 같은 거 잡을 필요 없어요. 예약을 취소하고 직접 저희 집으로 가면 되요. 저하고 언니가 함께 사는 집인데, 언니는 지금 네팔에 명상 수행하러 가고 없어요. 빈 칸이 두개 더 있으니까 아무 염려 말고 사용하시면 돼요.
격동되어 어쩔 줄 모르는 나에 비해 줘마는 오히려 너무 차분한 어투였다.
감사하다는 말도 잊은 채 나는 그냥 멍하니 줘마의 얼굴만 바라보아야만 했다. 애티 나던 그 얼굴은 이젠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대신 인간 삶의 희로애락을 다 겪어 삶의 진의를 깨우친 듯한 그런 성숙된 표정이 온 얼굴의 세포마다에 숨겨있는 듯 했다. 너무 세련된 그 얼굴엔 너무 편안하고 풍요로운 미소만 넘치듯 담겨 있었다.
-이젠 출발해도 괜찮은 거죠?
달래는 듯한 어투로 나의 의사를 물으며, 줘마는 다시 기어를 드라이브로 바꾸어 능란한 솜씨로 핸들을 꺾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앞에 너른 사막이 막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래, 가는 거다, 줘마야, 운명이라면, 네가 내 운명의 운전대를 잠시 대신 잡아 쥐고 있다면 그 운전에 내 운명을 맡기도록 하마. 그게 하늘의 뜻이라면…
5
얼마를 잤을까? 분명 온몸의 탕개가 다 풀리도록 늘어지게 잔 것 같은데 기지개를 켤 수가 없었다. 눈조차 뜰 수가 없고,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분명 귓가에 줘마의 발걸음소리가 들리는데 입을 벌려 줘마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었다.
돈황에 온지도 벌써 일주일, 그 일주일동안 나는 내내 잠만 잔 것 같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밑졌던 잠을 다 봉창하려는 듯 그렇게 사막에서의 내 몸은 한없는 잠의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 있었다. 줘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줘마가 끓여주는 따끈한 쑤유차를 마시고 나면 저도 몰래 자꾸만 식곤증처럼 하품이 나오고 눈두덩이 무겁게 내려왔다. 그런 나의 손을 잡고 줘마는 나를 안방 큰 침대로 안내했고, 그 침대에 나를 눕히고 내 손등을 살살 쓰다듬어줬다. 그러면 나는 최면에라도 걸린 듯 스르르 잠 속에 빠져들고…
자꾸만 몸이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침대 아닌 사막 언덕 위에 누워 있었다. 내가 누운 사막 그 아래에 구멍이 하나 뻥 뚫려 모래들이 그 구멍으로 솨르르 솨르르 소리 내며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그 구멍은 끝없이 깊은 심연이어서 모래들이 그 구멍으로 흘러들어가려고 내 몸 밑으로 몰려와 그 구멍을 통과해 몸을 던지는 소리만 들리고 밑바닥에 떨어져 쌓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너른 사막의 모래들이 다 그 구멍 속을 향해 내 몸 아래로 달려 모여들고 있었다. 내 몸도 그 모래들과 함께 밑으로 추락하려 하는 걸, 그나마 나는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경직시켜 그 구멍에 떨어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사막 전체가 모래시계가 된 듯, 그 구멍으로 흘러 떨어지는 모래알들의 시간은 이제 쏴아 쏴아 하는 폭포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모래알들 속에 인수의 모습이 보였다. 아주 악마의 얼굴을 한 채 징그럽게 웃으며 모래알들 속에 머리만 해골처럼 대굴대굴 굴러오고 있었다. 내 앞에 도착해 두 발 대신 머리만으로 발딱 서서 나를 골리려는 듯 메롱 하고 혀를 홀랑 내밀었다. 뱀의 혀보다도 더 징그러운 뱀파이어의 혀가 검은 피를 뚝뚝 떨구며 나불대고 있었다. 저 징그러운 혀, 저 혀에 징그러운 욕망의 끈덕진 침 질질 바르고 내 사랑하는 신아의 몸을 핥고 유린했을 저 짐승 같은 놈… 나는 손에 모래를 한줌 넘치게 움켜쥐고 있는 힘껏 그 혀를 향해 날렸다. 날아가는 그 모래를 피하려고 다시 뒹굴던 인수의 대갈통이 그만 모래 구멍 속으로 쑤욱 빨리듯 들어가고 있었다. 나 살려줘! 하고 외치는 인수의 외침소리가 들리고, 어데서 나왔는지 검은 색 긴 팔 하나가 그 모래구멍 밖으로 올라와 구원을 호소하고 있었다. 나는 이번엔 그 손을 향해 내 발길질을 날렸다. 그래, 죽어라 이놈아. 니 스스로 죽기 싫거든 내가 너를 죽여주마.
그리고 나는 이제 벌떡 일어서서 그 심연 속으로 한없이 추락하는 인수의 꼴을 내려다보며 침을 뱉고 있었다. 그 순간, 그 검은 심연 속에서 아스라하니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용서해줘, 내가 잘못 했어…
또 꿈을 꾸세요?
귓가에 줘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요… 푸세요… 꿈으로라도 풀 수 있으면 푸세요… 그 한을… 그 아픔을…
내 꿈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 내 귓가에 따스한 입김을 불며 속삭여주는 줘마의 목소리, 꿈속에 분노로 미쳐가던 나를 차분하게 달래주는 마의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나는 꿈에서 완전히 깨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꿈밖에서 내 귀에 속삭이는 줘마의 목소리를 다 듣고 있었고, 그 숨결도 다 느껴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내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겨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내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 손길을 잡고 팠다. 그러나 나는 그냥 가위에 눌린 채 눈을 뜰 수가 없었고,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 내 손가락 하나만이라도 움직여줘, 그러면 나 깨어날 수 있는데…
그때 기적같이 정말로 줘마의 손이 내 손을 잡아왔다. 꽉 움켜쥐고 있던 내 오른 손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펴서 꼭꼭 눌러주고, 내 손바닥을 살살 어루쓸어 주었다. 드디어 나는 내 눈을 뜰 수가 있었다.
-고마워, 줘마…
-깨셨군요… 아침식사 후 지금까지 꼬박 또 열 시간 넘게 잤어요. 점심식사도 거르고… 벌써 저녁식사 시간도 지났어요. 해가 다 지고 있잖아요?
방 안을 둘러보니 창문으로 들어온 노을빛이 마지막 긴 그림자를 붉게 마룻바닥에 던져놓고 있었다. 참으로 따스한 빛이었다. 그 빛이 내 얼굴에까지 비쳤는지 얼굴도 한없이 따스한 것 같았고, 눈이 부셔왔다.
그제야 후유, 하고 가슴에서 큰 숨이 터져 나왔다. 숨쉬기 어렵게 답답하던 가슴이 많이 시원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동안 가위에 눌렸는지 아직 일어날 기운은 생기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자애롭게 나를 내려다보며 웃기만 하는 줘마를 바라보며, 나는 그 줘마의 품에 안겨 애기처럼 그렇게 다시 잠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줘마야 줘마야, 네 품이 너무 따사롭게 보이는구나, 그 품이 저 노을빛처럼 너무 푸근하게 보이는구나. 그 품에 안겨 모든 걸 잊고 싶구나… 그저 그렇게 잠자는 애기가 되고 싶구나… 나보다 열 살은 더 어릴 줘마를 보며 나는 안식처 같은 엄마의 품을 떠올리고 있었다.
줘마가 내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내 손에 따스한 찻잔을 쥐어주었다. 하얗게 짙은 우유 색에 노란 기름이 동동 뜬 쑤유차였다. 훌훌 불어 두어 모금 마시자 가위에 눌려 한없이 움츠렸던 가슴의 세포들이 쭈욱 기지개켜며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살 것만 같았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방금 꾼 그 악몽의 기억을 털어버렸다.
-배고프죠? 얼른 씻고 우리 함께 식사해요. 그리고 나랑 함께 어데 가요.
나는 쑤유차를 한 모금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시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몸이 많이 가벼워진 듯 했다. 잠의 수렁에 빠질 때마다 악몽의 가위에 눌려 한없이 고통스럽고 죽을 것처럼 힘들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한없이 허둥거리며 식은 땀을 쫙 흘리고 깨면 정작 몸은 많이 가벼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악몽으로, 가위에 눌리는 악몽으로 내 몸 안의 많은 것들을 비워낸 듯, 그렇게 내 몸은 많이 비워져 가벼워져가고 있었다.
문이 열려있는 저쪽 칸에 그날 옥문관에서 돌아온 후 내가 시작해 그리다만 <비천> 그림이, 내가 세워놓은 높이 그대로의 캔버스에 내가 그리던 그대로 놓여있는 게 보였다.
돈황 도착 이튿날, 비천 벽화를 찾아 막고굴을 방문하기 전에 줘마의 안내로 먼저 옥문관을 다녀온 그날 저녁 나는 줘마의 언니가 사용하던 작업실에서 나의 <비천> 그림창작을 시작했다. 돈황벽화의 비천 이미지들이야 이미 책에서, 그리고 싸구려 관광 상품들을 통해 수없이 보아왔기 때문에 굳이 막고굴 그 현장에 가서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그 그림들의 형상은 이미 머릿속에 담고 있은 지 오랬다. 돈황이라는 도시 자체가 비천 그림 속에 나오는 천녀 이미지를 내세워 관광수입을 올리는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게 돈황은 거의 모든 상점마다에서 비천그림이 그려져 있거나 새겨져 있는 관광 상품들을 팔고 있었고, 이 도시의 랜드 마크 역할을 하는 조각상 역시 천녀가 비파를 등 뒤로 높이 추켜들고 탄주하면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새긴 비천조각상이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인의 옷자락 길이가 좀 다르고 여인의 얼굴과 가슴의 풍만한 정도가 좀 다를 뿐 거의 비슷비슷한 그림들이었다. 막고굴 벽화속의 비천 형상을 거의 그대로 카피하여 좀 더 진하고 예쁜 현대 미술 안료로 더 찬란하게 그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옥문관에서 돌아온 그날 저녁 내 붓끝에 그려진 비천 그림은 완전히 그 벽화의 이미지들을 배반한 새로운 <비천>이었다. 옥문관에서 돌아오는 길에 줘마와 함께 추었던 남녀 2인의 혼성무용이 그림에 담겨지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춤자락 날려 역사 속에 사라져간 해골들의 신음소리를 남녀의 열락의 춤으로 새로이 해석하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그 춤은 다른 비천 그림처럼 배경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옥문관 그 누런 흙무덤을 찬란하고도 황폐한 역사의 단단한 벽으로 그려 넣고 있었다.
옥문관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그렇게 무작정 신들린 듯 줘마의 손을 잡고 추었던 광막한 사막에서의 춤, 황폐한 사막에서 그 사막에 죽어간 영혼들의 신음을 밟으며 무작정 그렇게 마구 스텝 밟아 춘 그날의 그 춤은 줘마의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릴 때까지, 내 팔다리가 지쳐 축 늘어질 때까지 그렇게 음악의 반주 없이 이어졌고, 그렇게 예고도 없이 터진 황사바람 속에도 멈춰지지 않았다.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지는 황사바람 속에도 우리는 서로의 숨결로 서로의 위치를 느껴 항상 서로를 맴돌며 우리의 춤을 이어갔고 드디어 황사바람이 멎어 하늘을 뿌옇게 덮었던 모래알들이 사막에 다시 소리 없이 내려앉을 때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린 우리도 비틀거리며 낙타 풀 위에 쓰러졌다. 낙타 풀 가시에 찔려 손에서 피가 흐를 때에야 우리는 우리의 주체할 수 없었던 그 신들린 춤의 광기에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리 왜 춤을 췄지?
우리 무슨 춤을 췄지?

서로에게 묻지 않았다. 그저 피 흐르는 서로의 손을 잡고 그렇게 헐떡이는 숨결로 서로를 마주보며 나와 줘마는 한 세기를 함께 한 연인처럼 서로에게 기대어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사막에 앉아 있었다. 춤으로 한껏 헝클어졌던 숨결을 다시 고르는 것 역시 춤추는 만큼이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내 의지대로 춘 것이 아닌 그날의 춤, 다시 차에 올라, 돈황에서의 내 임시 거처를 정한 줘마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내 화구를 펼치고 그림 그리기에 들어갔다. 온밤 정신없이 붓을 날려 나는 허공에 높이 날아예는 천녀의 비천 그림이 아닌, 남자와 여자가 옥문관 위에 함께 춤을 휘뿌려 만들어내는 운명의 외침을 캔버스에 담았다. 남녀가 함께 하는 혼성의 비천 그림을 그리는 내 옆에 줘마는 온밤 아무 말도 않고 좌선의 자세로 앉아 바닥에 흰 종이 한 장을 크게 펼쳐놓고 그 위에 손가락 새로 모래를 흘려 그림을 만들어 갔다. 내 그림이 그 윤곽을 드러낼 즈음 줘마의 모래그림도 그 윤곽을 드러냈다. 원과 사각형의 이미지들이 여러 개 겹치고 포개지면서 만들어내는 만다라 그림이었다.
그려도 그려도 완벽한 완성은 없는, 그 완성에로의 영원한 미완의 그림―  만다라,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얼마나 많이 깨우쳤으면 저 만다라 그림에 그걸 다 담아낼 수 있을까. 삶과 죽음 그리고 허무 그 밖에서 돌아가는 우주의 윤회의 법도를 담아낼 완성의 그림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며, 그것을 담아낼 인간의 손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듯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좌선의 자세로 진지하게 숨결을 가다듬어 손가락 새로 모래를 흘려 그림을 그리는 줘마의 모습은 그대로 살아있는 여자부처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누가 붓다를 깨우친 자라 했던가. 붓다 싯다르타에게도 삶과 죽음에 대한 철저한 깨우침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 깨우침 없음에 대한 자각이 싯다르타를 인류의 선각자로 남게 했을 것이다. 싯다르타에게 물어 얻을 수 있는 생의 유일한 답안 같은 것은 없을 것이며, 싯다르타에게 물어 얻을 수 있는 죽음의 궁극적인 의미 같은 것도 없을 것이다. 싯다르타 역시 그 보리수 아래 어쩜 지금 만다라 그림을 모래로 그리고 있는 줘마처럼, 고뇌로 피폐해진 마음의 황야에 저런 영원한 미완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영원한 미완을 깨닫는 순간, 자기가 그린 만다라 그림 속에 생로병사를 이길 수 있는 생명은 없다는 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는 걸 깨우쳤는지 모른다. 그때 싯다르타는 보리수 아래, 손에 쥐고 있던 모래를 털어버리듯 마음 안에 그리던 생의 이미지들을 다 털어 깨우쳤노라, 하고 외쳤을 것이고, 그 깨우쳤노라 했던 외침은 깨우치려고도 않고 생에만 집착하고 있던 이 세상 수많은 생령들에게 신선한 가르침의 메시지로 들리고, 녹야의 푸른 수림에 메아리로 울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줘마는 내가 그림에 무엇을 담는지 묻지 않았다. 나도 줘마에게 줘마가 그리는 만다라 그림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십여 년 전의 그 짧았던 인연으로 십여 년 후에 운명처럼 다시 만난 우리는 이미 그 십 여 년을 함께 한 사이기라도 한듯 서로를 너무 잘 알 수 있었다. 
그림이 거의 다 완성되어간다고 느끼던 어느 순간 나는 갑자기 너무 강하게 내 가슴을 강타해오는 아픔에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건 아무리 가슴을 크게 벌려 숨을 토해도 다 토해지지 않는 강한 것이었다. 그때 나는 나도 모를 그 어떤 충동으로 그대로 활 붓대를 캔버스 위에 쫘악 그어 지금까지 그린 그림을 망가뜨리고 싶어졌고, 그 충동으로 붓에 마지막 한 획을 위한 안료를 듬뿍 묻혔던 나는 차마 그 한 획을 긋지 못해 부들부들 떨다가 그대로 홱 붓을 휴지통으로 날려 내 그림 작업을 스톱시켰다.
그때 나는 줘마도 손에 들고 있던 모래를 스르르 다 흘려 지금까지 그렸던 만다라 그림을 망가뜨리고 있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랬다. 모든 건 부질없는 것이었다. 온 밤 숨결을 가다듬고 모아서 그린 줘마의 만다라 그림은 그렇게 한줌 모래에 의해 다 망가졌고, 나는 어쩜 마지막 한 획의 충동으로 지금까지 완성된 그림을 쫙 다 지우고 말았던 그 충동을 간신히 참아 붓을 휴지통으로 날려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줘마가 흐트러지지 않는 고른 숨결로 담담히 자기가 그린 만다라 그림을 망가뜨릴 때, 어쩜 나는 오히려 내 내부의 숨결을 걷잡지 못하고 그 숨결에 이끌려 부들부들 떨다가 결국은 그 마지막 한 획조차 감히 긋지 못하는 나약한 자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깨끗이 훌 버릴 수 있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훌 버리는 담담한 동작 하나와 버리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던 거센 동작 하나의 차이가 나와 줘마 사이의 차이인 지 몰랐다. 
그런 내게 줘마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고 일어섰고, 내 손을 잡아 이끌어 줘마는 나를 안방 큰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또 하루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고 있어요. 저 태양 따라 지금부터 당신의 하얀 밤이 시작되는 거예요. 눈 감고 쉬세요…

떠오르는 아침 해를 창문너머로 바라보며 나는 애기처럼 눈을 감았다. 그렇게 따사로울 수가 없는 아침해살을 온몸에 받아 안으며 나는 사막에서 걷다 지쳐 쓰러진 한 마리 낙타처럼 조용히 눈을 슴벅여 잠속으로의 잠행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나의 잠속으로의 여행… 모래알로 흩어졌던 사막의 천년 잠이 다 내 눈두덩에 모여 쌓인 듯, 만 년 간 아지랑이로 흩어졌던 사막의 수분이 방울방울 물방울로 응축 되어 그 잠의 세포들을 자박자박 적시듯, 나는 모래알 속으로 물방울이 스며들듯 그렇게 한없는 꿈의 수렁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거의 꿈속마다에서 악마의 얼굴을 한 인수 그 짐승보다 못한 놈을 만나야 했고, 그놈을 향해 저주의 모래를 뿌리고 분노의 발길을 날려야만 했다. 그림을 그리다 마지막 한 획을 남기고 홱 날린 나의 붓은, 인수를 향해 날린 원한의 칼날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꿈속마다에서 들리던 내 불쌍한 여자 신아의 그 처절한 울음소리와 가슴 허비던 울부짖음 소리, 나는 신아를 찾아 사막 그 허허로운 황야를 정신없이 헤매고 있었고, 신아는 항상 내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그 거리에서 나를 기다려 주다가는 또 홀연히 앞으로 달려가군 했다. 꿈속에서도 나는 신아를 쫓아 달리고 달리다가, 헤매고 헤매다가 지쳐 쓰러지군 했다. 신아의 이름을 너무 불러 꿈속에서도 목이 아프고 목에 핏덩이 같은 것이 꺽 막혀 그걸 토하고 싶은데 토해낼 수 없어 다시 가위에 눌리군 했다. 인수에 대한 저주와 신아에 대한 피타는 절규로 이중 가위에 눌려 헤매야만 했다.
나는 이 며칠 날마다 그런 악몽이 반복되는 잠의 수렁 속으로 추락하군 했고, 그 때마다 식은 땀으로 내 몸을 흠뻑 적시군 했다. 나는 아주 오래 전에 내가 서장 땅을 찾았을 때 겪었던 그 고소증보다도 훨씬 심한 <사막증>을 지금 이 사막에서 날마다 반복해 앓고 있었고, 그때마다 줘마가 내 손을 꼭 잡아 나를 그 악몽에서 깨워주군 했다.

6
줘마의 뒤를 따라 문을 나서자 생각지도 못했던 차가운 기운이 훅 얼굴에 끼쳐오고 등줄기에 싸늘한 기운이 맞혀왔다. 낮에 뜨겁던 사막은 밤에 생각보다 차가웠다. 일교차가 심한 사막의 기후에 이 며칠 잠만 자며 몸이 많이 허해진 나는 저도 몰래 오싹 몸을 한번 떨어야만 했다. 내 몸의 미세한 떨림을 눈치 채기라도 한 듯 줘마가 내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달빛이 참 따스하죠?
그제야 나는 밤인데도 몹시 환한 사막의 밤풍경을 볼 수 있었다. 하늘엔 아침 일출 때의 태양만큼이나 큰 달이 둥실 떠있었다. 둥근 만월이었다. 달 속의 그림자가 다 보일 정도로 훤한 달은, 낮에 바람에 불려 하늘에 날아올랐던 모래 먼지가 아직 채 가라앉지 못하고 하늘에 떠 있어서인지 차가운 하얀 빛 대신 따스한 노란색에 약간 뜨거운 빨간색을 머금고 있었다. 그 노랗고 발가우리한 달빛 아래 드러난 사막의 모든 풍경들도 눈에 따스하게 밟혀왔다. 그래, 참 따스하구나, 줘마 네가 따스하다고 하니까 금방 따스해지는 풍경들이구나…
나는 고마움의 마음을 손에 담아 줘마의 손을 꼭 잡았다.
차가운 밤인데도 오히려 하얀 치마차림으로 가볍게 차려입고 길에 나선 줘마는 달빛 아래 그대로 선녀처럼 아리따웠다.
미끄러지듯 살포시 걷는 줘마의 옆에 나는 무게를 잃고 텅 비여 가벼워진 듯한 걸음걸이로 태공을 걷듯 그렇게 허청허청 따라 걸었다. 무조건 끌리듯 따라나선 길이었고, 무조건 끌리듯 따라가고 있었다.
달빛을 쳐다보며, 그 달빛아래 산등성이처럼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며 뻗은 명사산의 반짝이는 능선들을 멀리 바라보며 얼마를 걸었을까, 길옆에 졸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 사막에 물의 흐름소리라니? 그러나 분명 귀맛이 즐거운 물소리였고 그 물소리 찾아 움직이는 내 눈에는 이미 달빛이 내려앉아 한들한들 그네 뛰듯 장난치는 작은 시내물이 길옆에 흐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시내물이 흘러가는 앞쪽에 아득하게 너른 푸른 유채 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건 인간이 이 사막에 펼친 기적의 주단이었다. 인간의 푸른 소망이 사막의 모래 위에 씌운 기적의 푸른 주단이 길옆에 달빛을 받아 안고 검푸르게 설레고 있었다. 사막의 그 세찬 모래바람과 살갗이 말라터지는 갈증에도 인간은 이 황폐한 사막을 포기하지 않고, 기어코  자기들 삶의 둥지로 거듭나게 하려고 푸르게 푸르게 가꾸기에 애쓰고 있었다.
그 유채밭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걷자 이번엔 앞에 푸른 숲이 나타났다. 포플러 나무숲이었다. 또 한 번의 경이로움에 나는 자연의 완강함보다도 더 완강한 인간의 삶의 욕망에 부르르 몸을 떨어야만 했다. 어떤 욕망이면 이 사막에 푸른 생명이 넘치게 하고, 어떤 욕망이면 이 사막에 숲이 우거지게 할 수 있을까? 그건 신의 욕망을 뛰어넘는 인간의 삶의 욕망만이 이루어낼 수 있는 기적이었다.
걸어오는 내내 전혀 몸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던 바람이 숲 안에서 잎들을 흔들면서 맴도는 소리가 솰라솰라 들려왔다. 달빛 아래 나뭇잎들이 모래 먼지를 두툼히 쓰고 있겠음에도 불구하고 푸르게 반짝이며 팔랑이고 있었다. 숲은 밤에도 자지 않고 자기가 뿌리내린 사막의 모래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반 고흐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달빛과 쏙닥쏙닥 속삭이고 있는 듯한 상상을 하며 나는 내 두 다리에도 힘이 생기는 걸 느꼈다. 고개 돌려 뒤돌아보니 방금 지나친 푸른 색 유채 밭은 이제 푸른 바다 위에 몸 솟구쳐 번쩍이는 은어 떼들의 등비늘처럼 더 신비로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지나치고 있는 숲의 푸른 잎들은 그 은어 떼들이 하늘을 날다가 그대로 사막의 허공에 은비녀로 고착된 듯, 풀어헤친 숲의 삼단 같은 머리칼 우에 칼날같이 예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자, 거의 다 왔어요. 무슨 소리 안 들리세요?
줘마가 손으로 가리키는 저 멀리 앞에 달빛 아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사막 위에 빙 둘러져 앉아있는 것이 아득히 보였다.
숲의 설레임 소리를 뒤로 밀어내며 앞쪽으로 귀를 강구자 은은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건 어떤 현으로 켜는 악기의 연주소리였다. 비파소리 같기도 하고, 양금소리 같기도 했다.
-비파소리 같은데…
달빛아래 빙 둘러앉아 비파를 타는 사람들…
-그래요, 맞아요. 비파소리라 해도 틀리진 않아요. 더 정확히 말하면 비파의 일종인 공후소리예요.
공후라… 들어본 이름 같기도 한데,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이름의 악기였다.
-역사 속에 거의 파묻혀 사라져가는 악기예요. 현대 음악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악기이지만, 이곳 원주민들이 세세대대 그 악기의 혼을 살려 지금까지 연주하면서 지켜온 소리예요. 원래는 봉황의 머리 모양으로 소리의 울림통을 만들어 궁중음악에서도 사용하던 존귀한 악기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이곳 주민들에 의해 낙타의 머리모양으로 공명통이 바뀌어 만들어져, 지금까지 그 모양을 지켜 전해 내려오고 있죠.
줘마의 설명을 듣는 사이, 그 달빛 아래 빙 둘러앉은 무리들의 모습이 좀 더 눈에 가까이 밟혀왔다. 10여 명은 족히 될 사람들이 빙 둘러 앉아 있었다. 그네들은 무슨 사연으로 저렇게 달빛 아래 앉아 공후를 켜서 밤공기를 설레이게 하고 있는 걸까.
나의 궁금증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줘마의 목소리가 다시 귀가에 울려왔다.
-저 사람들은 지금 낙타의 죽음을 천도하는 의식을 치르고 있는 거예요. 이곳 원주민들이 세세대대 전해 내려오는 풍습 중의 하나로 일종의 씻김굿 같은 것이지요. 낙타의 머리 모양으로 된 공후의 울림통에서 울려나오는 낙타의 울음소리 같은 음악으로 평생을 사막에 걷다 지쳐 쓰러진 낙타의 영혼을 달래 하늘로 인도하는 거지요. 아직 낙타가 채 죽기 전에 그 낙타의 귓가에 들려주는, 그 낙타의 등에 업혀 이 사막을 걸었던 인간들의 마지막 축복의 메시지인 셈이죠.
아, 오늘도 이 사막에 걷다가 지쳐 쓰러진 낙타 한 마리가 있다는 말이구나… 그렇게 쓰러져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숨결을 간신히 토해내는 낙타가 있다는 말이구나… 그 낙타의 죽음을, 낙타의 무리가 아닌, 인간의 무리가 바래주고 있다는 말이구나…
나는 신들린 듯 빨라지기 시작하는 내 발걸음을 느껴야 했다. 줘마의 발걸음도 어느새 춤의 스텝을 밟듯 그 템포를 빨리하고 있었다.

7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낙타가 가까이 다가서자 시야에 맞혀 들어왔다. 빙 둥그렇게 둘러앉은 사람들의 한 가운데 낙타 한마리가 무릎을 꿇고 턱을 땅에 댄 채 엎드려 있었다. 둘러앉은 사람들의 앉은 키보다 훨씬 높은 낙타의 쌍봉이 작은 두 개의 산처럼 사람들 사이에 우뚝 솟아 있었다.
나와 줘마가 옆에 이르러도 누구 하나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눈길로 우리를 맞아주었고, 음악은 끊기지 않고 계속되었다. 나와 줘마는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의 남아있는 공간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낙타의 머리 쪽에 낙타를 마주하고 앉아 공후를 타는 사람은 턱에 흰 수염을 한 발 기른 백발의 노자였다. 그 늙은 몸에 이제 뼈마디들은 굳을 대로 다 굳어졌겠건만 공후의 현 위에 움직이는 왼손가락의 떨림과 그 현을 튕기는 오른손가락의 움직임은 너무 현란하게 빨랐다. 18세 소녀의 손가락도 저렇게 유연하지는 못하리라. 잠자리가 꼬리를 살짝 튕겨 물결 위에 둥근 파문을 일으키듯 현줄 위를 그렇게 스쳐 지나는 손끝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달빛 아래 일망무제하게 펼쳐진 사막 그 한가운데, 빙 둘러앉은 한 무리의 인간들, 그 인간들이 만든 원의 정점 한가운데 한 점의 커다란 마침표처럼 엎드려 있는 낙타 한 마리. 사막에서 태어나 사막의 찬바람 속에 뜨거운 땡볕 속에 숙명처럼 터벅터벅 걷기만 했을 낙타의 생. 그 등에 실어 나른 짐의 무게는 도대체 얼마였고, 그 등에 태웠던 인간들의 희로애락의 두께는 얼마였을까?
이제 더는 네 다리로 버티던 사막에서의 생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무릎 관절 푹 꺾어 사막에 꿇어앉아 마지막 숨결을 듣는 듯 눈을 감고 있는 낙타의 안온한 모습. 어쩜 이미 그 마지막 숨결조차 버린 듯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그 앞에 낙타머리 모양의 공후는 슬픈 음악을 튕겨 낙타의 마지막 길을 바래고 있었다.
공후의 빨라지던 연주소리가 갑자기 뚝 끊겨졌다. 사막에는 모래알 한 알 구르는 소리도 다 들리게 적막이 흘렀고, 이때 내 오른쪽에 앉은 사내의 입에서 웅글은 소리가 굴러 나오기 시작했다.

두 다리로 이 세상에 온 사람이여
네 다리 낙타 등에 업혀 어디로 가는가
네 다리로 이 사막에 우뚝 선 낙타여
두 개의 큰 산을 등에 지고 어디로 가는가

아무리 사악한 바람도 그 두 산봉우리를 넘어뜨리진 못했네
얼마나 굳세게 뻗친 네 다리인가
아무리 무거운 인간의 욕망도 그 두 산봉우리보단 높지 못했네
낙타의 뜻은 하늘에까지 닿았거늘

낙타여, 그 큰 콧구멍으로 마신 사막의 모래바람
이제는 다 토해내고
낙타여, 사막에 남긴 자욱 모래바람 다 싣고 갔으니
이제는 더 걷지 않아도 좋네

낙타의 등에 업혔던 인간들 하나둘 세상을 떠나네
이 세상 왔던 모든 생명 하나둘 세상을 떠나네
낙타여, 무슨 미련이 있는가
아항 하고 크게 울부짖어 마지막 한번 울고
하늘로 가는 길에 모래마차 타고 가소
더는 사막에 걷지 말고 모래마차에 앉아 가소…

모래바람에 갈라터질 대로 갈라터진 목에서만 날 수 있는 석쉼한 목소리로, 시를 읊듯 주문을 외우듯 그렇게 중얼대는 사내의 찬가는 그대로 조용한 사막의 밤하늘에 큰 울림으로 메아리쳐 퍼졌다. 그 소리에 사막 능선의 모래알들이 무너져 쏴르르 쏴르르 흘러내리며 화답하는 듯 했다.
다시 공후의 현이 선율을 토해내기 시작하고, 그때 내 왼쪽에 앉았던 줘마가 살포시 내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저기 저 언덕 우에 하얀 치맛자락이 보이죠?
과연 우리 앞 멀지 않은 곳의 모래언덕 위에 하얀 치마자락이 하나 기발처럼 나부끼며 우리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꼭 내 옆의 줘마가 어느새 그곳에 달려가 서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화들짝 놀라 다시 왼쪽을 보니 줘마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그냥 내 옆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우리가 앉은 곳을 향해 달려오는 그 여인의 모습이 이 며칠 그냥 보아온 줘마의 아리따운 몸매만큼이나 내 눈에 너무 익숙한 몸매였고, 줘마와 꼭 같이 흰 치마를 입은 여인이였기 때문이었다.
줘마가 다시 조용히 내 귓가에 속삭였다.
-언니예요. 언니가 돌아오고 있어요. 몇 년 전 명상요가를 훈련하러 네팔에 갔을 때 만난 언니예요. 배속의 아이를 낳지 못하고 배속에서 잃어버린 한을 품은 여자예요. 그 아이가 명상 수행하는 언니에게 낙타의 모습으로 나타났대요. 언니의 배속에서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그 아이는 이 세상에 다시 낙타의 모습으로 왔대요. 그래서 언니는 낙타들의 고향인 이 사막을 찾아 삶의 터를 잡았고, 낙타가 있는 곳에는 언니가 나타났어요. 만나는 낙타마다와 눈으로 교감을 나눴고, 그 낙타들이 죽을 때마다 언니는 그 낙타의 죽음을 하늘로 천도하는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서장너머 히말라야산맥이 쭉 그냥 뻗어 닿은  네팔의 어느 깊은 산속에 들어가 명상수행하며 그 명상 속에서 배속에서 죽어갔던 그 아이와 그냥 만나다가, 이 사막에 낙타가 죽어가는 날이면 그 낙타의 죽음을 천도하러 귀신같이 다시 나타나군 해요. 낙타로 이 세상에 온 아이의 혼을 달래주러 오는 건지도 모르죠.
내가 돈황에 도착한 첫날부터 많이 궁금했던 줘마의 언니라는 여자에 대해, 줘마는 지금 이렇게 처음으로 저 멀리서 깃발같이 치맛자락 날리며 다가오는 한 여인을 가리켜 속삭이며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그 여인은 저승과 이승 사이의 큰 계곡을 뛰어넘듯 그렇게 큰 폭의 춤 자락을 날려 어느새 우리 앞에까지 다가왔고, 아무런 주춤거림 없이 빙 둘러앉은 사람들 한 가운데 낙타 가까이로 다가갔다. 길게 늘어뜨린 하얀 팔소매 휘저어 낙타의 몸을 한번 어루쓸어주고, 몸을 굽혀 낙타의 앞뒤 다리를 어루쓸고 몸을 어루쓸었다.
사랑하는 아기를 쓰다듬듯 그렇게 정성껏 낙타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짓은 그대로 끊김을 모르고 이어지는 춤의 동작처럼 우아하고 따스했고, 이제 그녀의 손길은 낙타의 목을 지나 낙타의 귀를 쓰다듬고 낙타의 눈두덩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낙타의 눈두덩을 쓰다듬을 때 낙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 나는 분명히 보았고, 그 떨림과 함께 그녀의 몸도 경련을 일으키듯 미세하게 떨리는 걸 그녀 뒤에 가까이 앉은 나는 달빛아래 흰 치맛자락의 흔들림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 그녀의 손길은 그 낙타의 머리를 수없이 어루쓸고 있었다.
내 오른쪽에 앉은 사내의 입에서 다시 갈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공후의 선율에 맞춰 부르는 노랫소리였다.

-선녀여 드디어 오셨군요
낙타는 당신을 사랑했답니다
당신이 낙타를 사랑한 만큼
낙타도 당신을 사랑했답니다.
이제 낙타는 이 세상에서의 애환을 다 마치고
이제 낙타는 하늘로 가려 하네요
낙타의 이 세상 마지막 길
선녀여 당신의 춤으로 밝혀주세요
사막을 떠나 하늘로 가는 낙타의 마지막 길
선녀여 사랑과 환락의 춤으로 바래주세요.

사내의 노랫소리가 끝나자 앉아있던 사람들은 다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에 손을 잡고 커다란 원을 그리며 낙타와 그 신비의 하얀 여인을 가운데 두고 빙빙 돌기 시작했다. 꼭 마치 서장의 전통무용 꿔좡춤이 이곳 돈황의 사막에서 재현되는 듯했다.
어느새 품에서 꺼내들었는지 여인의 손에는 작은 소고가 들려 있었고, 이제 여인은 공후의 슬프고도 경쾌한 선율에 맞춰 북을 두드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얼굴을 하얀 면사포로 가려서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나는 그 여인의 숨결조차 너무 내게 익숙한 듯싶어 저도 몰래 둥근 춤의 행렬에서 빠져나와 그 여인 가까이로 다가섰다. 줘마 역시 나와 함께 그 원의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이제 공후의 음악에 맞춘 둥근 마당 한가운데는 낙타를 중심으로 줘마와 나, 그리고 줘마의 언니 셋이 돌고 있었다. 나는 아까 저녁나절에만 해도 악몽에 지쳐서 허탈하기만 하던 내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는지 그 여인의 뒤에 서서 여인이 두드리는 소고장단에 맞춰 껑충껑충 몸을 솟구쳐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춤을 추는 내 눈에 땅에 엎드린 낙타의 슬픈 눈이 맞혀 들어왔다. 그 낙타가 나를 보고 눈으로 뭐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뚤렁하고 이 세상에 떨어지는 하나의 붉은 핏덩이를 보고 있었고, 그 붉은 핏덩이가 붉은 태양으로 사막의 한가운데까지 굴러와 등에 삶의 커다란 괴나리봇짐을 산처럼 짊어진 낙타로 우뚝 서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낙타는 어흥 하고 크게 울어 사막에 슬픈 생명의 선언을 토하고 뚜벅뚜벅 사막의 능선 위에 자기의 자욱을 찍어가고 있었다. 쉼 모르고 끝 간 데 없는 사막 그 위에 묵묵히 묵묵히 걷기만 하는 낙타 한 마리… 등에 짊어진 짐이 너무 무거운지 고개 숙여 잠깐 숨을 돌리는데, 그때 나를 향해 슴벅이는 그 눈빛이 너무 강인하면서도 애처로워 보여 나는 가슴 한편이 너무 아파오는 통증을 느껴야 했다.
나는 땅에 엎드려 마지막 숨을 모으는 낙타 옆에 춤추며 그 낙타가 걸어온 사막의 길을 다시 거슬러 걷고 있었다. 그렇게 걸어 도착할 곳이 어디일지도 모르며, 숙명처럼 그렇게 걷고 있었다. 걸어서 남긴 그 자욱을 바람이 불어와 모래로 덮어주었다. 사막에는 내 걸은 자취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 사막에 와서 두 번째로 추는 춤이었고, 그 춤에 나는 나를 그대로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울부짖었다.

-아들아 아들아 네가 살아있다면
너도 이 험한 세상을 낙타처럼
뚜벅뚜벅 말없이 걷기만 할 거니
운명처럼 그렇게 걷기만 할 거니
그렇게 걷다가 지쳐서 쓰러지면
너를 위한 춤은 누가 추어줄거니
아들아 아들아 네가 가는 길을
내가 낙타 되여 너를 등에 태우고
그렇게 너를 무등 태워 사막에 내가 가주마

여인의 소고장단은 점점 빨라졌고, 이제 한 마리 낙타인 나는 내가 넘어야 할 이 사막의 마지막 언덕을 향해 솟구치듯 달려 오르고 있었다. 그 언덕을 넘으면 푸르른 오아시스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차가운 모래바람 잠들어 평화로운 따스한 나라가 있으리라. 모든 아픔과 원한, 그리고 이별 같은 거 없는 행복의 낙원이 있으리라…
여인의 춤사위는 이제 낙타의 몸을 덮듯이 파도처럼 설레고 있었고, 나는 나도 몰래 내 두 손을 내밀어 여인의 두 손을 잡았다. 그 여인과 함께 쓰러지듯 낙타의 등을 쓰다듬어 낙타의 마지막 숨결을 다독여주고 있었다. 낙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린 건 그 순간 이었고, 그때 나는 여인의 눈에 맺혀 있다 굴러 떨어지는 눈물도 마주보아야만 했다. 나는 내 눈에서 굴러 떨어지는 눈물의 쓰거움도 입으로 삼켰다.

나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신아야, 내 사랑 신아야.
너는 어데 갔다 이제야 여기 이렇게 나타난 거니
우리 아들의 죽음을 천도하러
너 여기에 다시 나타나 준거니
운명이 나더러 너를 찾아 이곳까지 오게 했다면
너는 운명 속에 이곳에 미리 와 나를 기다리고 있은 거니

내 마음속 영혼의 울부짖음에 화답이라도 하듯 신아의 속삭임이 귓가에 들려왔다.
-고마워요, 끝내 이곳까지 찾아와서 먼 길 가는 우리 아이의 혼을 함께 바래주어서요.
나와 신아 사이에 누워있던 낙타의 몸이 한번 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 순간 나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한 송이 하얀 연꽃의 미소를 보았다. 몇 년 전 서장서 입에 익혔던 6자진언이 저도 몰래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옴메니빼메홈
옴메니빼메홈

그렇게 6자진언을 계속해 외우며 나는 신아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이때 옆에 있던 줘마도 손을 내밀어 우리 둘의 손을 자기의 두 손안에 꼭 잡아 쥐였다.

잘 가라 내 아이야
잘 가라 내 아픔아

이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형상이 있었다. 악마의 얼굴을 한 인수의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모습이었다. 참기 힘든 고통으로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인수의 얼굴이 마지막 안간힘을 쓰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귓가에 신아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우리 춤을 멈추지 말아요. 우리 춤으로 저 높은 사막의 언덕 위로 올라가요.
줘마가 앞장서고 그 뒤에 신아가 서고, 신아 뒤에 내가 섰다. 우리는 춤을 멈추지 않은 채 춤으로 사막을 달려 명사산 그 높은 능선 위에 올라서고 있었다. 능선 저쪽 아래 만월을 담은 반월 모양의 월아천의 모습이 거울처럼 누워 있었다. 그 거울의 조용한 수면을 흔들어 우리 셋의 춤은 이제 명사산 위에 모래들을 밟으며 다시 한 번 더욱더 고조로 달리고 있었다.
춤을 추며 신아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아픔 같은 거 다 버리세요. 원한 같은 것도 다 버리세요. 저주 같은 거 다 버리고, 분노 같은 것도 다 버리세요. 그 원한과 그 저주의 대상은, 이미 스스로 자기의 운명 속에 그 죄를 다 받아 지금 죽어가고 있어요. 저주하고, 아파하는 사람만 가슴에 더 상처를 안고 살게 되요. 다 버리고, 다 용서하세요. 어쩜 우린 운명 속에 원래 부부가 아니었나 봐요. 그런 운명의 우리가 잘못 만나 10년을 아프게 사랑했고, 그 사랑의 결실을 보지도 못한 채 결국 어긋난 인연으로 한을 안고 갈라져야만 했어요. 스쳐 지나쳤어야 할 인연인 나와 당신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아픔과 상처만 남기는 존재가 되었고, 우린 그걸 잘못 만나 어긋난 우리의 운명임을 승인할 수 없어, 우리 둘 사이에 죄인으로 끼어든 다른 한사람이 저지른 행위에 다 밀어버렸어요. 이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 운명을 정리할 때가 되었어요. 죄를 지은 그 사람도 지금 스스로 그 죄를 정리하고 있어요. 우리 그 사람을 위해 춤을 춰요. 스스로의 죄를 용서 못해 자학으로 죽어가는 그 불쌍한 영혼을 용서해주고, 그 영혼을 바래줘요. 
신아는 내게 인수를 용서하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 짐승보다 못한 자식을 용서하라고 권해오고 있었다. 마치 지금 병실에서 홀로 고통에 신음하는 인수의 그 몰골을 보고 있는 듯…
안 돼, 절대로 그 용서만은 불가능해! 하는 소리가 내 입에서 터져나갈 줄 알았는데, 이외로 나는 신아의 말을 너무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 용서해주마. 그 자식도 자기 운명의 길을 잘못 찾아들어 그렇게 평생 저주받을 죄를 지은 거겠지. 그 죄의 대가로 지금 그렇게 서서히 일그러져 죽어가고 있는 거겠지.
미술전공 대학원까지 함께 마친 동기들 중 유일하게 전공을 버리고 비즈니스의 길에 접어들어 성공한 기업가로 탈바꿈한 인수 그 자식, 자기 가장 친했던 친구의 여자를 강제로 겁탈하고도 뻔뻔스레 성공한 기업가로 매스컴에 오르내리던 그 자식은, 결국 그 죄를 스스로 이기지 못해 마약에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리라.
용서해주마, 용서해주마, 사막에서의 이 춤으로 다 용서해주마.
나는 신아에게 웃음으로 답했다. 네가 용서한다는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신아 네가 용서한다는데 내가 그 죄를 그냥 안고 갈 이유도 굳이 없겠구나. 그 죄의 영혼이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데, 그 죄를 용서 못해줄 것도 없지. 그래, 이젠 다 용서해주마, 다 잊고 다 훌훌 버려야 할 때가 된 듯싶구나. 지금 사막 하늘에 높이 떠있는 저 만월 아래에서는 용서 못할 그 어떤 이유 같은 거 있을 수 없으리라. 용서해주마, 용서해주마. 결국은 다 부질없는 것을… 지금까지 너무 오래 안고 있었구나.
그러나 그 용서의 뜻을 눈빛으로 신아에게 전하는 순간, 나는 너무 주체 못할 허무함으로 명사산 그 능선 위에 두 다리 꺾고 쓰러지고 말았다. 한 마리 낙타처럼.
그리고 그대로 달빛 아래 모래를 타고 명사산 아래 밑자락까지 구르듯 미끄러져 떨어졌다.

8
신아가 나를 버리고 내 앞에 저 멀리 도망치듯 달리고 있었다.

신아야, 신아야, 그렇게 날 버리고 가면 어쩌니?
신아야, 신아야, 날 버리고 가지 마!

앞에서 빨리 달려 나와 멀어지던 신아는, 내 외침에 다시 돌아서서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달려서 내 앞 가까이 다다른 하얀 치맛자락의 여자는 신아가 아닌 줘마였다.

줘마야, 줘마야, 이건 어찌된 일이니?
줘마야 줘마야, 신아는 어데 가고 너만 온 거니?

그렇게 허덕이다 잠에서 깬 내 옆에 줘마가 한없이 따사로운 모성의 미소를 담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신아를 찾았다. 그러나 방 안에는 신아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신아였는데, 분명 신아의 손을 잡고 춤을 췄었는데, 그리고 그 신아와 대화도 나누었었는데…
그러나 신아의 흔적은 방 안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신아는? 신아가 왔었잖아? 엊저녁 분명, 사막에 신아가 왔었잖아? 나랑, 너랑, 우리 셋이 함께 춤을 추었었잖아? 죽어가는 낙타를 천도하는 춤을… 그리고 또 다른 하나 죽어가는 불쌍한 영혼을 천도하는 용서의 춤을…
줘마는 내 말에 아무 말도 대꾸해오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 빙그레 한없이 따사로운 미소만 흘릴 뿐.
그때 내 눈에 어느새 이쪽 방으로 옮겨져 침대 옆에 세워져 있는 캔버스의 그림이 눈에 맞혀왔다. 내가 그리다 만 그림 위에 한 줄기 굵직한 흰 선이 서장인들이 축복의 메시지로 상대방의 목에 걸어주던 하얀 카다같이 길게길게 바람결같이 그어져, 비천의 남자와 비천의 여자를 한데 운명처럼 묶어놓고 있었다.
나는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길고 긴 흰 색의 한 획은 신아가 나 대신 그려놓은 것이라는 걸. 내가 실신상태에 빠져있을 때, 신아가 나 대신 내 미완의 <비천> 그림을 단 한 획을 길게 더 그어 완성해놓았다는 것을.
꿈은 아니었다. 달빛 아래 사막에서 내가 신아를 만났던 건.
그렇게 신아를 운명처럼 만나서 10년 전에 잃은 우리 아이의 혼을 하늘로 천도하는 춤을 함께 추고, 그 아이를 간접적으로 살해한 그 천벌 받아야 할 죄인도 용서해주는 춤을 추었던 건 꿈이 아닌 생시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춤을 아득한 옛날에 춘 듯, 나는 아득한 시간 속에서 신아를 만났던 것같이 생각되었다. 어젯밤 달빛 아래의 그 모습이 두터운 안개 너머의 그림자처럼 잘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가슴을 무겁게 지지누르던 모든 그리움과 원한들이 다 씻겨나간 듯, 나는 펑 뚫린 가슴에로 시원하게 불어드는 새벽의 공기를 깊이 들이쉬다가 찬바람에 쿨룩쿨룩 기침을 했다.
줘마가 어느새 준비해놓고 있던 따스한 쑤유차 한 잔을 권해왔다. 어제도 그러했고, 오늘도 그러했다. 내 옆에는 항상 따스한 쑤유차를 준비하고 있는 줘마만 있을 뿐이었다. 변한 건 없었다.
몇 모금에 찻잔을 비워버린 나의 손을 줘마가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나를 언니의 방으로 안내했다. 캔버스조차 이쪽 방으로 옮겨와 텅 빈 그 방바닥에는 어느새 오색의 모래로 그려진 만다라가 커다랗게 온 바닥이 넘치게 완성되어 있었다.
-언니가 그린 거예요. 당신의 잠을 지켜보며 미소로 온 밤 그린 그림이예요. 행복과 축복의 메시지만 담는다 했어요. 당신이 잠에서 깨어나면, 당신의 손을 잡고 이 만다라 위에서 춤을 추라 했어요.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줘마의 손을 꼭 잡고 그 만다라 모래그림 위에 올라섰다.
그 만다라 그림을 우리 운명의 춤으로 다시 헝클어놓는 일만 이제 나와 줘마에게 남아 있었다.
2010/ 10/ 11  청도 문우재서.



광명(趙光明) 소설가/ 시인
  중국 길림성 유수시 출생
  시집: 「좌선, 어느 30대의 아침」 출간
  현재 중국 청도에서 회사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