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2009년도 <해외문학> 신인상 당선작


<그린스보로의 눈이 녹으면>



― 티나 정(한국명/ 정윤숙)


부엌으로 통하는 뒷문을 열고 보니 온통 다 하얀 세상 이었다. 차가운 바깥공기가 얼굴에 스쳐 닿아 정신이 번쩍 났다. 연한 장밋빛 가운을 여미며 서니(선희)는 어제 밤에 내린 눈으로 온통 눈이 부시게 하얗게 된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눈은 약간 내려간 온도 덕분에 살짝 얼기까지 해서 눈이 내린 잔디의 표면을 더욱 반짝거리게 했다. 그 강한 눈의 광선에 부엌 안이 갑자기 환해졌다. TV를 틀어 보니 이 쪽 길포드 카운티는 2시간 등교 시간이 늦춰진다고 한다. 몇 년 전에 학교 스쿨버스가 눈 속에서 사고가 난 이후로는 더 조심을 한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났다. 눈이 없던 캘리포니아에서 오래 살다 노스 캐롤라이나로 이사 와서 좋은 점을 꼽으라면 눈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서둘러 준비를 하고 차에 시동을 걸고 창밖으로 보이는 잔디 위에 눈이 하얗게 덮여 있고 지붕 위에 미끄러질 듯 걸쳐 있는 눈들이 서니의 눈 속으로 가득 차 들어 왔다. 밀려 내려오는 눈의 무게를 따라 지붕 한 끝에는 눈이 녹아 내려 왔었는지 고드름이 밤새 얼어 있었다.

어제 눈 덕분에 하루를 쉬어서 느슨해진 심신이 오늘 있을 예정인 프레젠테이션을 생각하니 약간 긴장이 되었다. 회사에서 쓰는 자료는 유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전체적인 마무리는 출근해서 해야 했다. 길이 많이 얼어 있어서 차들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다들 천천히 가고 있어 가까운 거리인데도 다른 때에 비해 훨씬 시간이 걸리는 듯 했다. 아침에 먹은 두통약이 아직 효과가 없는지 양 이마를 가로지르는 통증이 조금씩 심해 졌다.
지난 해 가을 처음 센서스(인구 조사) 인터뷰를 하던 생각이 났다. 서니의 이력서를 훑어보던 사람은 자기가 먼저 난색을 표하며 일할 수 있겠냐고 물어 보았다. 네모난 금테안경 너머로 느껴지는 따듯함이 무척 가정적일 것이라는 짐작을 하며 오히려 그런 순간에 놀랍게 침착해 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가만히 인터뷰하던 사람을 살펴보았었다. 솔직하게 생각보다 임금이 적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 일 말고 사람을 모집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기에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함께 같이 일하고 싶은데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하며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서니는 짙은 감청색에 하얀 테두리가 있는 정장을 입고 안에는 하얀 블라우스를 받쳐 입었다. 너무 딱딱한 느낌이 들 것 같아 약간 망설이긴 했지만 첫 인터뷰 복장으로는 손색이 없을 것 같아 그렇게 입고 나갔다. 그 때 만해도 사람이 많지 않아 덩그러니 큰 사무실 공간이 썰렁하게 느껴졌었다. 창문은 많이 있어서 색색 깔로 물들은 단풍을 볼 수 있었는데 유난히 주홍색 나뭇잎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색깔이 너무 곱고 강렬해서 꼭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사람들은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그림 같다하고 근사한 그림을 보면 진짜 같다고 표현하는지 모르겠다. 그 날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인터뷰에 나갔었는데 사무실의 분위기가 그리 나쁘진 않았다. 아마 아무 장식도 없고 그럴싸한 가구도 없었지만 형식적이지 않고 임시직이란 선입감이 준 편안함이었지 싶다. 그 날 저녁에 전화가 왔다. 서니를 인터뷰 했던 그 사람의 목소리였는데 현재는 일반 사무직 밖에 없지만 그래도 해 보겠느냐고 하기에 그러마고 대답했다. 어차피 임시직인데 까다롭게 고르려고 하지도 않았었으니까. 그렇게 시작한 일이 벌써 일 년이 넘어 간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도 많이 친해지고 일도 익숙해져 재미도 있었다. 서니가 늘 해 오던 회사 업무만큼 복잡하지도 않고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라서 그냥 건들거리며 다니기가 아주 십상인 쉬운 일이었다. 굳이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노력을 하지 않아서 인지 혼자 시간도 많이 가질 수 있었고 지난 일도 가끔 생각해 보며 그렇게 소리 없이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잠깐 동안 그런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68번 하이웨이 도로를 지나 사무실 앞에 다다랐다. 왼 쪽으로 차를 돌리고 잠깐 창밖을 보니 아, 하는 찬사가 절로 나오게끔 바깥풍경이 서니의 시선을 붙잡았다. 며칠 동안 내린 눈과 녹은 얼음이 어우러져 있다가 다시 얼은 나무 가지마다 얼음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이 곳 나무들은 수분을 충분히 취할 수 있어 나무들의 키가 장난이 아니게 컸다. 그런 덩치에 얼음 꽃이 가득 피었으니 놀랄 수밖에. 나무와 나무 사이를 스치면서 지나갈 때마다 빛이 반사된 것이 엇갈려서 아름다운 동화나라에라도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서니가 오랫동안 살았던 캘리포니아는 따듯한 곳이어서 이런 풍경을 볼 수도 없었으며 말로만 듣던 얼음 꽃은 실로 사람의 마음을 현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나무에 걸려 있는 얼음 꽃들을 보고 있자니 초대형 크리스탈을 보는 것 같았다. 서니가 좋아하는 스와로브스키의 반짝거림보다 몇 백배 매혹적이기까지 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훅하고 느껴지는 따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문 입구에서 안내를 도와주는 일레인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비만증 때문에 다닐 때 보면 밸런스가 맞지 않게 살이 오른 뒷모습이 불안하기도 하지만 늘 웃음을 잃지 않는 그녀에게는 적당한 안락함과 풍요로움에서 오는 쾌적함이 있다. 정확히 출근시간에서 몇 분씩 일찍 오곤 하는 서니는 습관처럼 출근노트를 보았다. 일찍 오는 사람은 대부분 일찍 오고 늦는 사람은 또 늦는 모양인가보다. 잠깐 동안 출근노트를 훑어보다가 눈을 들어 사무실을 보니 낯선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한 여섯 사람은 족히 되 보이는데 멀리서 봐도 복장이나 분위기가 도시 사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장차림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기존의 사무실에 일하는 사람들과는 뭔지 다른 느낌을 갖고 있었다. 이쪽으로 돌아 서는 사람들을 보니 가슴에 정부마크가 제각기 붙어 있는 것이 언뜻 보였다. 

서니가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짓자, 일레인이 그 사람들은 워싱턴에서 나온 조사반 일행 이라고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이곳에서 올린 서류에 몇 번 오류가 나서 서류를 조사하러 나온 센서스(인구조사) 중역들이라고 했다. 어제 밤에 호텔에 와서 묵고 아침 일찍 출근해서 미팅을 벌써 끝낸 후라고 한다. 아마도 이 곳 지점 몇몇 사람들은 경질되리라는 말도 같이 전해 주었다.
잿빛 머리에 항상 같은 포니테일 스타일을 하는 캐롤은 한 번도 늦는 법이 없다. 색깔 별로 정리돼 있는 그녀의 파일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게끔 일목요연하게 되어 있었다. 오늘은 까만 터들스웨터에 폴로회사 그린체크 자켓을 입고 왔는데 하얀 얼굴에 그린색이 썩 잘 어울렸다. 고급 캐시미어 제품인지 색도 곱고 포근하게 보였다. 옷이 예쁘다고 했더니 그린스보로에 있는 폴로 아울렛에서 큰 맘 먹고 장만한 것이라며 까르륵 웃는데 평소의 엄격하게 느껴지던 분위기와는 또 다르게 보여 졌다. 그 나이에도 긴 생머리 포니테일을 할 수 있는 미국사람들의 자유로움이 싱그러웠다.

한번은 그녀가 보여준 노트를 보았는데 꼼꼼하게 정리해 놓은 컴퓨터 자료가 단어 외울 때 쓰는 플래시 카드에 가득히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잊기 쉬운 사항에는 여러 색깔의 하이라이트가 되어 있었다. 서니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며 그것을 복사 해 주었는데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그녀의 곁으로 가보니 디스켓을 정리하고 있었다. 모든 일을 디스켓에 정리하고 꼭 관리하는 습관은 오랜 훈련에서 나왔을 텐데 어디에서 일했었는지는 통 얘기하지를 않는다. 화학물질 알러지 때문에 먼저 직장에서 휴직을 했었노라 는 얘기까지만 들었을 뿐이었다.
분위기가 다른 때와 틀려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캐롤은 유독 여유가 있어 보였다.
“내 참, 일은 안하고 쓸데없는 회의만 하더니 결국 임금서류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것이 누락되어 워싱턴에 누가 말을 한 모양이야. 그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 하는데 한번 보자고. 어떻게 되는지.”
“디렉터가 점검을 잘못했으니 책임을 면키는 어려울 텐데?”

“그거야 서니 생각이고. 그 뺀질이가 그렇게는 안할 거야. 누군가에게는 책임을 미루겠지. 학교 교수직을 은퇴했으니 여기를 그만두면 어디서 일을 하겠어. 이번에 또 신형 랙서스를 샀던데 그 페이먼트도 해야지 않겠어?”
“근데 캐롤은 어떻게 알았어?”
“응, 샬롯 본사에 아는 친구가 있어.”
“그랬구나.”
“만만한 누구에게 책임을 미나 한번 보자고. 에드워드는 백인이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할 꺼야. 그 사람은 센서스 헤드 오피스에 친한 학교 선 후배도 많거든.”
에드워드는 디렉터 바로 밑에 있는 사람으로 그 사람이 바로 서니를 인터뷰했던 사람이었다. 늘 말을 길게 하지 않고 무슨 생각이 있긴 한데 그것을 잘 표현하지는 않는 속을 잘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캐롤과 같이 있을 때 서니에게 와서 이 사무실에서 제일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일을 배우는 것이 행운이라고 말을 해 준 적은 있었다.

그 때 캐롤은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피, 하도 아는 것이 많은 까닭에 나는 미운털이 박혀 승진도 안 되는 걸요.”
“지금이라도 승진시켜줄까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혼자 조용히 지내게 해주세요.”
캐롤은 아무리 보아도 특이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다. 너무 흠 잡을 데 없이 열심히 일하는 캐롤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고 이해는 하지만 은근히 알력을 넣는 것을 모르는 척 자기 할 일만 하는 캐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렉터가 새로 직원을 채용할 때 공정하지 않게 한다는 소문이 난 지도 꽤 되었으며 그 사실이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사무실 안에 내근을 하는 사람들이 약 100명은 되는데 알게 모르게 백인과 흑인들이 서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밖에 베트남, 인도, 쿠바, 멕시코, 중국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같이 일을 하고 있었다. 인구조사라는 것이 각종 나라 사람들을 다 꼼꼼히 조사를 해야 하는데 그 나라사람들의 협조 없이는 곤란했기 때문이다. 일에 있어서도 서로 은근히 파워싸움을 하는데 다행히 양쪽 사람들이 다 동양 사람인 서니에게는 우호적이었다. 겉으로는 다 같이 친절하고 공정한 것처럼 보여도 보이지 않는 차별과 편견이 있었다. 그래도 동양 사람들에게는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 특히 한국 사람들이 교육수준이 높고 생각이 깊다 라는 인식이 있어서가 아닌가 싶다. 처음에는 남한인지 북한인지 출신을 물어 볼 땐 좀 당황하기도 했지만 이곳이 시골인 것을 감안하면 놀랄 일도 아닌 것이다. 
처음에 일레인이 일을 캐롤에게 배우면 될 것이라고 서니에게 귀띔을 해 준 것을 서니는 두고두고 고맙게 생각했다. 동그란 안경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눈은 총명함과 정확함이 느껴졌다. 무엇을 해야 할 지 잘 몰라 하고 있을 때 캐롤은 서니에게 무조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이 돌아가는 것을 읽히라고 했다. 일의 성격상 세계 각국사람이 모인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 때만 해도 아직 일이 바쁘지도 않고 체계가 잡히지 않아 산만한 분위기였던 때에 캐롤의 조언 덕택에 컴퓨터도 많이 익히게 되고 승진의 기회도 빨리 오게 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이란 주어진 일만 해서도 안 되고 주어진 일이라고 다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지혜 없고 열심만 있는 사람들이 조직 사회에서는 적도 많이 만들고 일의 성과도 항상 좋지만은 않다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하는 통에 캐롤과 함께 그 사무실에서는 실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나란히 옆에 앉아서 컴퓨터를 이것저것 가르쳐주기도 하고 조심해야 할 일들, 주의해야 할 것 등을 상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컴퓨터 시스템이 정부에 속한 것이라 비밀번호도 3주 만에 꼭 바꿔야 하며 그 안에 있는 정보를 누설하면 안 된다는 것은 여러 번 강조하였다. 서니가 이해를 잘 못하는 것 같으면 반복해서 참을성 있게 가르쳐주곤 했는데 그녀가 소곤거리며 설명해준 사람들의 얘기는 흥미로웠다. 나중에는 친해져서 스스럼없이 얘기하게 되었을 때에 디렉터가 실력은 없으면서 지나치게 권위적이며 아이같이 유치하다는 말을 하기도 해서 같이 킥킥대며 소녀들처럼 웃기도 했다. 
캐롤은 어중이떠중이가 다 모여 있는 이 사무실에서 그 동안 외로웠던 것 같았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말도 섞지 않는 성격이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제한되어 있고 또한 적도 많았다. 보수적이고 인종적인 편견이 있다고 느꼈으나 어느 정도 서니도 그런 관점에 동의한 점도 없지 않아 있었다. 백인들은 흑인들을 게으르고 머리가 모자란 멍청이라고 생각하며 흑인들은 백인들이 이기적이고 차가우며 깍쟁이라는 선입감이 있는데 그런 편견은 너무 오래된 것이라 쉽게 뭐라 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임시직이라서 그런지 은퇴한 노인들이 많았었는데 쉬는 시간에 팝콘을 먹으면서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친해졌는데 나이든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여유로움과 너그러움이 참 편한 기분을 갖게 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서니의 큰 아이가 다니는 사우스 웨스트 중학교의 전직 교장선생님이었는데 파운드케잌을 가끔 손수 만들어서 갖고 오기도 해서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했다. 처음에 서니가 입사했을 때에 비하면 사람들이 세 배는 늘은 것 같다. 총무부와 인사부 사업부와 기획부로 나누어 뼈대가 잡혀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금씩 긴장감이 들게 되었다. 본사에 실적상황을 계속 보고를 해야 했기에 다른 지점과 비교분석이 되고 있었다. 조직적이고 미리 일을 계획하는 미국사람들의 습관 때문에 일이 때론 지체된다고 하지만 꼼꼼한 것은 후에 있을 착오의 비율을 많이 낮추는 결과를 갖고 오기도 하기에 바람직한 방법이었다. 일을 빨리 처리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서니에게는 예전에 비해 반의반도 하지 않는 적은 양의 일이었는데 그래도 일이 많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서니는 생각을 멈추고 습관처럼 에릭을 찾았다. 자기 자리가 있음에도 자리에 있는 법은 거의 없고 늘 사무실 어디엔가에서 누군가를 돕고 있을 사람이지만 서니의 일이라면 열일을 제치고 도와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느새 의지하게 되고 친근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박스를 만들 때 쓰이는 것으로 책상을 만든 것을 서니가 처음에 보았을 때 놀라는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아무리 임시로 있는 사무실이라지만 이년 이상을 지내야 할 텐데 이런 것을 쓰는 미국사람들의 검소함과 실용성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었다. 디렉터와 인사부 매니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독립된 공간도 없이 탁 트인 공간에서 지내야만 했다. 
에릭이 사무실 대각선 저 끝에서 손짓을 한다. 늘 바쁜 사람이었지만 더군다나 오늘은 워싱턴에서 조사반이 특파되었기에 그 일을 도와주느라 더 바빠 보였다. 멀리서 보니 새삼 애릭의 인물이 수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풀을 먹인 하늘색 와이셔츠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더욱 깨끗해 보였다.
한번은 같이 점심을 사러가는 기회가 있었는데 늘 농담 잘하고 우스운 소리만을 하던 에릭이 이렇게 말을 건넸다.

“서니는 왜 반지를 안 끼나요?”
반지를 빼서 현욱의 책상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생각한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해변가의 집.
“그냥 귀찮아서 끼지 않았어요.”
“어-어 그러면 안 돼요. 나도 처음에 마음이 설레었었단 말이 예요. 싱글인지 알고”
“아무리. 그 말 농담인지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면 미안해요. 그럴 뜻은 없었는데”
“내일은 게시판에 붙일 께요. 서니가 결코 싱글이 아니라고”
“후훗. 내가 이 나이에 싱글이라고 한들 어쩌겠어요?”
“나 참, 농담인지 아시네, 사람들에게 물어볼까요? 서니가 30살이 넘었다고는 아무도 생각 안 해요. 나야 기록 찾아보고 알았지만.”
“어머,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니에요?”

“아니, 일부러 본 것은 아니고 우연히 보게 되었어요. 미안합니다. 하하하. 그런데, 반지는 꼭 끼고 다니세요. 나도 가끔 잊어버릴 때가 있으니까.”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크고 선한 눈이 꼭 소를 연상케 하곤 하는 두 눈을 끔벅하며 장난스레 웃는 그 얼굴에 미소가 순진하게 퍼져갔다.
약간 짙은 피부색에 반듯한 이마와 서글서글한 눈매가 늘 사람을 기분 좋게 하지만 그날은 좀 쓸쓸해 보였다. 

“근데 괜찮아요? 저 사람들 뭐 조사하러 왔다면서요.”
“투서가 들어가면 일단 조사반이 나오게 되어 있는데 돈이 관계된 것이라 해결을 하긴 해야 할 것이에요.”
“잘 해결이 돼야 할 텐데!”
“참, 어제 우리 집에 전화 했었지요?”
“네, 연락망 때문에 했었지요. 갑자기 또 눈이 오거나 할 때를 대비해서요.”
“보고 싶어 한 것은 아니고요? 아-아 농담이에요. 농담. 안 그럴께요. 그렇게 무섭게 보지 말아요.”
“어떤 여자 분이 받던데요?”

“하하. 제 어머니세요. 근데 뭐라 하시냐면요, 서니의 목소리가 너무나 예쁘다고 하시는 거예요.”
“아무리요.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데요.”
“사실은 어머니께 그랬어요. 모습은 목소리보다 훨씬 매력적이라고요.”
“믿기진 않지만 고맙군요.”
“서니의 목소리는 참으로 근사해요. 음. 내가 맞춰 볼까요. 성가대에서 앨토지요?”
“후훗. 맞아요. 늘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부러워하곤 했어요. 그런데 제가 교회에 다니는 것은 어떻게 알았어요?”
“요즘은 데니엘 스틸의 책을 읽던데 얼마 전까지 쉬는 시간에 성경 읽곤 했잖아요.”
“피, 그래서 알았군요? 그나저나 타냐가 찾던 그 파일 찾았데요?”
“아니요, 아직 찾고 있는 중이예요.”

타냐는 총무 인사부의 매니저고 에릭은 그 밑에 수퍼 바이저였는데 에릭이 일을 잘 해줘서 타냐가 편하게 일을 처리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참, 오후에 있을 프레젠테이션 준비는 다 했어요?”
“네, 디스켓에 정리 했으니까 프린트해서 검토만 하면 되요.”
“타냐 일은 걱정하지 말고 회의 준비나 마무리해요. 내가 뭐 도와 줄일 없어요?”
“없어요. 에릭.”
“필요 없는 서류는 다 버렸지요? 그런 서류가 혹시 보이면 기밀누설이 어쩌구 저쩌구하면서 워싱턴에 이르는 멍청이가 꼭 있으니깐요.”
“네.”
“이번에 회의 진행이 잘 끝나면 매니저가 될 확률이 많으니까 잘 해봐요.”
“매니저가 된 들 임시직인데 무슨 도움이 많이 되겠어요.”
“이력서 쓸 때 도움이 되어 좋구요, 임금도 시간당 $6이나 뛴답니다. 하여튼 잘해보세요.”
“오케이.”
“고마워요.”

에릭과 말을 하다보면 긴장이 풀어지곤 한다.  다른 사람에겐 꼭 필요한 말만 하곤 하는데 에릭과는 무장을 해제한 사람처럼 편하고 느슨하게 되어 버리고 만다. 유리창 안으로 보이는 디랙터 방에서는 아까부터 회의가 끊이지 않았다. 회의를 유난히 좋아하는 디렉터도 오늘은 좀 사정이 다른지 얼굴이 심상찮아 보였다. 
수퍼바이저들 가운데서 매니저를 뽑는데 그동안의 실적도 보지만 이따 있을 프리젠테이션과 인터뷰가 중요한 요건이 되는데 하필 이런 날 워싱턴에서 사람들이 와 어수선 하기도 해 웬만하면 동요하지 않는 서니도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았다. 실력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캐롤이 서니보다 먼저 물망에 올랐어야 했는데 전혀 관심이 없는 본인은 물론 사람들도 캐롤이 되리라고 생각도 하지 않는 까닭을 나중에나 알게 되었다. 

디렉터가 흑인이어서 그런지 백인을 다루기가 불편해서라고 하지만 공정하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곤 하다.  캐롤은 생글거리면서 하는 말이
“자기네 잘못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어떻게 나를 승진시켜. 내가 디스켓에 파일을 다 챙기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걱정 마, 서니. 서니가 잘 되도록 내가 도울께.”
“실력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캐롤이 돼야 하는데 왜 신청을 안했어?”
“하긴 나도 돈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내가 안 되리라는 것을 내가 알기에 아예 신청을 안 한거야. 나 신경 쓰지 말고 꼭 매니저가 돼야 해. 서니가 안되면 누구 차례인지 알잖아. 그 멍청이 하고 어떻게 일하겠어.”

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팸이 말만 앞세울 뿐이지 정작 일은 잘 못한다는 것을 서니도 알고 있었으나 캐롤이 그 정도로 말을 하는 것은 이외였다.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도 없어 보였는데 일에 있어서는 철저한 사람이라 성실하지 않거나 겉으로만 열심히 하는 척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척 차갑게 대하는 편이었다. 서니가 보기에는 그것은 교만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철저한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어느새 많이 지나갔으므로 프레졘테이션 준비를 마무리해야 했다. 그런데 서니가 프린트를 하려고 디스켓을 넣었으나 이상하게도 그 안에 파일이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그 디스켓 안에는 서니가 필요한 것이 들어 있지 않았다. 마지막에 디스켓을 정리한 일레인에게 물어 보았으나 디스켓에 넣어 놓았다는 말 밖에는 들을 수가 없었다.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져 있는 일레인을 계속 붙잡고 있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 말을 않고 자리에 돌아와 디스켓을 꼼꼼히 검토해 보고 컴퓨터 데스크로 가서 그 쪽에 있는 디스켓을 다 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캐롤이 자기 디스켓을 혹시나 하며 찾아보아 주었지만 역시 찾을 수 없었다. 서니는 차츰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창밖을 무심코 내다보다가 서니의 시선을 붙잡는 것이 있었다. 나무위에 걸려 있던 눈과 얼음이 녹으면서 햇빛을 받아 무지개 색깔로 변하여 내리는 것을 보게 된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나뭇가지들이 그 크리스탈 얼음 꽃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밑으로 축 쳐져 있다가 어느 정도 녹게 되면 다시 탄력을 받아 “딱”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로 솟구치는 것이었다. 그 움직임 때문에 옆에 있는 얼음들이 타 타닥 떨어지곤 했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인지 간간히 나는 소리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녹는 순간의 그 아름다움은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장관이었다. 수백만 개의 무지개가 서니의 눈 속으로 가슴속으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감동이 가슴을 흔들었지만 지금 상황은 녹아내리는 얼음 눈꽃을 감상할 때만은 아니었다.

4시에 하기로 한 회의시간이 점차 다가오자 마음이 불안해져 견딜 수가 없었다. 서니의 표정이 심각해 보였는지 에릭이 다가와서 물어 보았다. 
“서니,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어요?”
“저기, 디스켓에 보관해 놓은 파일을 찾을 수가 없어요.”
“누가 그 일을 했는데요?”
“데이터 정리는 일레인이 했는데 디스켓에 없어요.”
“큰일이군요. 나도 아직 서류를 찾지 못했는데 오늘 마감을 해야 주급이 제 날짜에 나가거든요.”
“타냐가 걱정이 많겠군요.”
“그러게요. 임신초기라서 조심을 해야 하는데.”
“내 걱정은 마세요. 나오겠지요.”
“그것이 복사본이 없어서 못 찾으면 곤란할 텐데?”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서니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캐롤이 회의 시간은 자꾸 다가오니 디스켓을 다 뒤져보자고 했다. 일레인에게 자꾸 뭐라고 해봐야 소용없으니 우리끼리 하는 데까지 해 보자는 얘기였다.
서니는 자꾸 불안해 지는 마음을 갖고 다른 방법도 없었으므로 그러자고 했다. 종류별로 디스켓이 보관되어 있으므로 하나하나 찾아보면 나오겠지만 100개가 넘는 디스켓을 뒤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찾을 수 있는 일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10년 만에 한 번씩 하는 인구조사에 관한 자료 중 누락되는 데이터와 현재 많은 오차가 있는 소수민족의 통계를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이 데이터는 서니에게는 참으로 심혈을 기울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가 일부러 없애지 않고서야 그것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순간이지만 팸이 그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랬을 리는 없지만 사람 마음이란 모르는 것이란 사람들의 말도 자꾸만 떠오르기도 했다.
피가 바짝바짝 타는 순간에 왜 갑자기 현욱이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한동안 현욱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서니가 받은 상처는 시간이 갈수록 아무는 것이 아니고 자꾸 현욱이를 타인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 괴로웠었다. 상처를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었는지 잊은 것도 아닌 것이 감각이 없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서니 본인은 알고 있었다. 그 상처는 서니의 자존심의 그늘에서 당분간 숨어 있었다는 것을. 부부란 정으로도 살고 타성으로도 산다지만 그렇게 얼어붙은 상태를 견디기란 부러지는 성격의 서니에게는 더욱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욱에게 다른 여자의 냄새가 난다고 느끼기 시작했을 때부터 서니는 서서히 자기 마음을 거두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남들처럼 울고불고 매달리고 하는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싶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이 없었다. 다 부질없는 노릇 이고 현욱이가 그렇게 서니의 가슴에 상처를 줄줄은 꿈에도 상상한 적이 없었기에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조차 어려웠다. 아니 잠재의식 속으로 모든 것을 미뤄놓고는 하루하루 그냥 지내는 것이었다. 더 이상 알려고도 하지 않고 현욱에게는 단 한마디도 묻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피가 철철 흐르는 순간들을 보낼 때 현욱은 서니를 질려 했다. 문제라는 것은 항상 상대적인 것이어서 서니의 문제를 드러내지 않고는 풀 수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서니 자신이 알고 있었다. 항상 부드럽고 사랑 많은 현욱의 배신을 서니의 자존심이 그런 것을 밖으로 표현하지 못하게 했다. 한 밤중에 어둠속에서 혼자 누워 있을 때에나 새벽에 눈이 떠졌을 때 가슴에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었다. 누르고 누른 고통이 한꺼번에 몰려오듯 가슴을 칼로 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눈물은 고통의 자각 없이 흐르지만 가슴은 통증을 가져다줌으로서 꼭 깨닫게 했다.

아무에게도 의논하지 않고 혼자서 견뎌온 서니는 주위사람들에게 동정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은 지독한 여자가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현욱을 천하에 없는 나쁜 놈이라고 하던 사람들도 시간이 흐르자 서니의 지나친 결벽증과 맺고 끊음이 분명한 성격까지도 현욱이가 밖으로 나돈 이유가 되었을 거라며 용서하지 못하는 서니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곤 했었다.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나 금방 바뀌는 마음들이 힘든 것이 아니라 한번 마음을 정하면 자신도 어쩌지 못하게 가는 방향으로 가속도를 더하여 가고야 마는 자신의 엄격함이 싫어서 징그러운 고독감과 외로움을 향해 싸워야만 했던 지난 시간들이 생각이 났다. 아니면 알게 모르게 현욱의 푸근함과 넉넉함에 기대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일을 알고부터 그렇지 않아도 뻣뻣하던 서니의 몸은 현욱을 몸으로라도 받아들일 수도 없게 황폐해져 갔다. 그러면서도 그의 따듯한 손길과 입술의 느낌을 밤마다 그리워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현욱 뿐만 아니라 어쩜 자기 자신에게도 배신을 당한 것 같은 참담함을 어떻게 내어 놓는다는 말인가. 
현욱이 잘못은 했으나 성품이 좋고 사람에게 정을 느끼게 하는 그에게 사람들은 손을 그 편을 향해 서서히 들어 주었다. 그런 점에 끌려서 결혼을 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순간부터 서니는 자기만의 공간에 있었던 적이 많았던 것 같았다. 현욱이가 주는 편안함과 푸근함에 익숙해져 있어서 이런 전쟁의 소용돌이에 갇히게 될 것을 예상도 못했을 뿐 아니라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던 것이다.
서로에게 허락된 약간의 무관심과 냉정함이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은 아닌가. 서로가 틀려도 한참 틀린 현욱과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진 않았을는지 모르나 편하고 안락했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현욱의 입장에서 보면 서니와의 결혼생활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서니는 성공하고 싶었고 그래서 맹렬히 앞만 보고 달렸고 현욱은 같이 여행도 하고 한가롭게 책도 읽으면서 그렇게 살고 싶어 했다. 현욱은 회사에서 아틀란타 지사에 파견근무를 제시했을 때도 좋은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식구들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거절했다. 안주하려는 현욱이 점점 답답했고 달려가기만 하는 서니를 현욱은 힘들어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현욱에게 딴 여자가 생긴 것과는 틀리다. 그것은 또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현욱은 그런 서니에게 잔인하다고 했다. 잘못한 사람에게 사과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그렇게 냉정한 것이라고 했다. 서니는 정말 차갑고 냉정한 여자인가. 자신에게 물어 보기도 지루한 질문인 것이다. 자신만을 아는 이기적인 여자인가. 남자의 품안에 안기려 들지 않는 멋없는 여자인가. 아님 복 없는 여자인가.

현욱의 생각을 밀어내고 일을 다시 생각하려 했다. 에릭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번 프레젠테이션을 잘해내고 싶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기회가 온 것을 잡고 싶었고 서니는 그만한 실력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이 있다고 해도 디스켓이 없는 상황에서는 문제가 틀리다. 혹시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 자꾸만 팸이 마음에 걸렸다. 서니 때문에 수퍼바니저 승진이 늦기도 했고 늘 서니를 경계하며 질시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쪽 구석 컴퓨터에서는 워싱턴에서 나왔다는 사람들이 데이터를 뽑고 있었다. 원본과 대조를 해 가며 산더미 같은 서류를 조사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을 해 나가는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 노련함이 자신감과 어우러져 일을 척척 해 나가고 있었다. 에릭은 타냐의 서류를 찾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서니의 디스켓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지 자꾸만 서성거리며 눈짓을 했다.

“괜찮아요, 에릭. 걱정 말고 그 쪽 일이나 신경 써요.”
“어떻게 그래요.”
“그런데, 이것은 혹시 하는 것인데요. 내 디스켓 누가 가져간 것은 아닐까요?”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요. 하지만 남을 의심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그 사람도 그렇게까지 할 사람은 아니에요. 인내심을 갖고 찾아보기로 해요.”
“너무 속이 상하니까 그래요.”
사람을 미워하는 법이 없고 순진한 성품의 에릭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을 금방 후회했다. 서니의 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깥에 있는 나무들의 얼음 무지개 꽃잔치는 계속되고 있었다. 정 찾을 수 없으면 프리젠테이션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준비하며 애쓴 생각을 하니 마음이 허전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한 20분쯤 지났을까 에릭이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서 서니를 보며 싱글거렸다.
“서니. 내가 그 디스켓 찾으면 선물 뭐 줄래요?”
“어머, 찾았어요?”
“아니, 그러니까 뭐를 줄거냐니깐요.”
“점심 살께요. 프린트도 해야 하고 마지막 준비를 하려면 지금 서둘러야 해요.”
“알았어요. 알았어. 이리로 따라와 봐요.”

에릭이 손짓하는 데로 따라 가보았다. 입구에서 왼쪽에 있는 구석컴퓨터로 가서 에릭이 앉았다. 
“디스켓은 어디 있어요?”
“없는 디스켓을 어디서 찾아요?”
“찾았다면서요?”
이 상황에서도 농담을 하는 에릭에게 좀 짜증이 났다. 늘 서니에게 후하게 대해 주는 에릭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짜증 섞인 말투를 내뱉은 후였다. 서니의 표정에는 아랑곳없이 에릭은 여전히 싱글거리면서 컴퓨터를 키고 있었다. 독수리의 마크가 보이고 에릭이 컴퓨터를 로그인을 하는 순간까지 서니에게는 너무나 오랜 시간처럼 느껴졌다. 본사 사람들 이 여럿이 동시에 컴퓨터를 쓰고 있기에 속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느렸다. 컴퓨터를 키고 나서 에릭이 스크린에서 한 구석을 가르쳤다. 잘 모르는 표시가 보였는데 그것을 열어보니 서니가 찾고 있던 파일이 있었다. 

“어떻게 이 파일이 하드웨어에 저장이 되어 있지요?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찾았어요?”
“하나씩 물어 보세요. 이젠 다 찾았으니 걱정 말고.”
“어저께 일레인이 일하던 컴퓨터부터 찾아보았지요. 사람의 실수란 때때로 생각지 않은 엉뚱한 곳에서 발생하니까. 내가 운이 좋았던 것이지요. 바로 그 컴퓨터 하드에 일레인이 저장을 하는 실수를 하리라고는 나도 몰랐었어요.”
에릭은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에 일레인이 컴퓨터에 미숙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사람이 일을 마무리했다라는 말을 듣고 꼼꼼히 일레인의 일을 챙겨본 것이었다.
“고마워요. 에릭”
“나는 그것도 모르고 엉뚱한 사람을 의심했군요.”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나 같아도 그랬을 거예요. 이제 타냐를 챙겨야 하니까 가 볼 께요.”
“에릭 정말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면서 중앙을 통해 복도를 따라 가는 에릭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 아까 짜증을 낸 것이 생각이 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던 것이다. 사람은 왜 좋은 사람에게 더 잘하지 못하고 무례하게 대하게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다 큰소리를 들은 것은 10분도 채 안 돼서였다. 에릭의 소리가 분명한데 그럴 리가 없었다. 디렉터의 흥분한 소리도 간간히 들렸으므로 순식간에 사무실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큰소리를 지르는 것은 흔치 않은 경우이고 더군다나 그 장본인이 에릭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놀랠 수밖에 없었다. 저마다 자기 일을 하기는 하지만 모든 귀가 소리 나는 쪽으로 향해져 있었다. 서니는 에릭이 큰소리를 냈다라고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그 사실을 사람들이 확인을 시켜주어서 믿을 수밖에 없었고 이어서 걱정이 되었다. 에릭의 평소의 성품으로 볼 때 큰소리를 내거나 화를 내는 것이 상상이 가지 않을 만큼 순한 사람이었다. 생전 누구와 말다툼조차 하지 않았을 것 같은 사람인데 방금 소리친 것이 분명 에릭이 맞는다면 필시 무슨 큰 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조금 있다가 알게 된 것은 디렉터가 타냐에게 모든 책임을 지고 사표를 쓸 것을 요구한 것은 물론이고 그 동안에 타냐가 실수한 것들을 워싱턴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보고를 했다는 것을 알고 난 에릭이 디렉터가 자기의 책임까지 미루는 것을 보고 항의를 하다가 참지 못하고 큰소리가 나게 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을 모집할 때에 공정하게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서류상으로 대조해 보면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에 디렉터가 그 동안 원칙을 벗어난 점이 발각될까봐 미리 타냐의 허점을 말했을 것이라는 얘기들이었다. 센서스에서 실시하는 시험 점수와 지역별로 연락을 해서 사람을 채용하게 되어 있는데 그 순서가 맞지 않거나 시험성적이 낮았는데도 채용이 되었다면 공정하게 채용된 것이 아니었다. 임시직이긴 해도 신청서가 쌓이는 입장이어서 경쟁률이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디렉터의 교회 사람이 부쩍 많이 들어온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한 주씩 임금이 나가게 되어 있는데 원본 서류가 늦게 입력이 되어 임금 날짜가 맞지 않게 되자 당황한 타냐가 그 원본서류를 버린 모양이었다. 타냐의 잘못도 있지만 현재 시스템으로 1,000여명의 임금을 시간에 맞추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었는데도 디렉터가 인원보충은 안하고 실적만 올리려고 그렇게 보고한 디렉터의 잘못이 컸던 것이다. 상황을 알게 되니 일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서니는 마음이 무거웠다. 서니는 계획대로 프리젠테이션을 해야 하지만 에릭의 일을 생각하니 간단하게 마무리 되어 질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마음이 어수선했지만 시간이 되어 서니는 회의장소로 가게 되었다. 디스켓 때문에 하도 진이 빠져 잘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막상 시작을 하고 보니 그런 대로 잘 진행할 수 있었고 서니의 자료수집이나 아이디어가 시기가 맞기도 해 호응이 좋았다. 샬롯 본사에서 나온 중역간부는 서니를 보고 영구 직으로 워싱턴에서 일해야 할 것 같다는 칭찬까지 아끼지 않았다.
회의를 마치고 너무 힘이 들어 쓰러질 것 같았으나 몸을 추스르고 갈증이 나 물을 마시러 사무실 뒤쪽에 위치한 카페테리아에 갔다. 캐롤이 쉬는 시간인지 혼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기척을 듣고 서니를 보더니 말을 건넨다.
“서니, 회의는 잘 끝냈어?”
“응. 고마워. 캐롤이 도와준 데이터가 도움이 많이 되었어.”
“내가 한 것이 뭐 있다고. 아참, 그리고 에릭이 파면조치 되었다고 하던데. 회의하느라 못 들었지?”
“그래? 정말이야? 왜?”
“상사에게 그렇게 대들었으니 어쩔 수 없지. 본사 사람들도 다 보았는데.”
“그럴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러게 말이야. 디렉터가 비인격적으로 말을 했다고 하더란 소리를 들었어. 자세히는 모르지만 모든 것을 에릭이 뒤집어썼다는 것 같아. 내 생각으로는 에릭이 일부러 일을 더 시끄럽게 한 것 같아. 그렇게 돼야 자기만 책임을 지게 되니까. 내 직감이 그래. 아무리 심한 소리를 들었더라도 그렇게 나올 사람은 아니거든.”

휴식시간인 15분이 다 되었는지 캐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니도 따라 일어나 사무실로 가 보았지만 에릭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얘기든 직접 듣고 난 후라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어느덧 자기 근무 시간이 끝난 사람들은 하나 둘 퇴근을 하고 어두움이 몰려오고 있었다.
창밖의 나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음 꽃의 자취조차 없었다. 
일을 마무리 하려고 컴퓨터에 앉아 데이터를 정리하고 있을 때 어느덧 에릭이 뒤에 와서 서 있었다.
“어, 에릭 언제 와 있었어요?”
하루 동안 너무도 많은 일이 생겨서 정신이 없었지만 에릭을 보는 순간 까닭을 알 수 없는 어리광이 생겼다.
“하도 열심히 일을 하고 있어서 아는 척을 할 수 없었어요. 내가 워싱턴에 가게 되면 미스터 클린턴에게 말을 해 줄께요. 이 나라의 이 잘난 인구조사에 서니같이 아름다운 여성이 희생하고 있다고. 여하튼 나는 인구조사라는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요. 쓸데없는 경비와 인력이 너무 많이 쓰여지는 것 같거든요. 다윗도 혼난 것이 이 인구조사하다 그런 것인데. 쯧쯧,”
“하여튼 에릭은 힘이 남았나보지요?  이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아니오. 사실은 무척 피곤해요. 서니 앞에서는 늘 농담이 하게 돼요. 농담이라도 자꾸 해야지 안 그러면 서니의 눈 속에 빠질 것 같거든요. 아 참, 프레젠테이션을 성공리에 마친 것을 축하해요. 물론 서니가 잘 해 내리라는 것은 알았지만요.”

“네. 덕분에 잘 했어요. 근데 어떻게 된 것이 예요? 내가 물어봐도 돼요?”
“이미 물어보고 있잖아요. 잠깐 이리로 와 봐요.”
에릭은 타냐의 사무실을 가리켰다. 오늘 타냐가 겪었을 일을 생각하니 임자 없는 방이 쓸쓸하게 보였다. 안으로 따라가 보니 알 수 없는 정적이 그 둘을 감쌌다. 하루의 피로가 몰려와 주저앉고 싶었지만 에릭의 심정을 생각하면 그런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서니, 피곤해 보이네요.  퇴근해야 하는 것 아녜요?”
“괜찮아요.”
“아까 있었던 일. 들어서 알고 있지요?”
“정말 그만두는 것이 예요?”
“하하하, 걱정이 되는 모양이지요? 서니에겐 무슨 얘기인들 숨기겠어요. 사실은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고 난 임신하지도 않았으며 남편이 실직하지도 않았거든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버리고 파면된 것이지요.”
“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지고 그만두는 것은 억울하지 않아요?”
“억울하지요. 서니도 못 보는데.”
“에릭. 정말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그리고 사실 난 개인 사업을 구상 중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력서 쓸 일이 당분간 없을 거예요 하핫. 그러나 저러나 서니는 반지나 꼭 끼고 다녀요.”
“알았어요.”

그 순간 에릭의 얼굴에 장난기가 사라지는 것을 서니는 놓치지 않았다.
에릭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서니는 에릭이 악수를 청하는 줄 알고 손을 내밀었더니 그 손을 살며시 올려 자기 입에 가까이 대고 살짝 입을 맞추었다.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좀 당황이 되긴 했지만 그 입술의 감각이 손을 타고 어깨를 통해 머리까지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입술의 감촉이 부드럽고 감미로웠다. 너무나 오랜만에 느끼는 따듯함이라 입술이 멀어지는 것이 아쉬운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손을 잡은 채로 가볍게 서니를 안아 등을 왼손으로 도닥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마음 저 밑바닥에서인지 발바닥 저 아래부터인 지 무엇인가 자꾸 치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서니, 서니는 용모가 매력이 있기도 하지만 영혼이 아름다운 여성이에요. 그 점을 잊지 말고 지내도록 해요. 너무 자기 자신을 묶고 살면 자신에게 지쳐요. 자신에게 좀 너그러워지려고 노력 해봐요. 좀 넘어갈 땐 넘어 가고, 힘이 들면 쉬기도 하고, 알았지요?”

그 말을 하는데 에릭의 목소리의 울림이 돌아서 서니의 가슴까지 채우고 물기가 되어 서니의 눈을 적시게 하는 것이었다. 참았던 눈물이란 한번 터지면 제어가 되지 않는 법이라 쏟아지는 눈물을 닦을 수도 없이 흘러내렸다.
에릭은 자기의 손으로 서니의 눈물을 정성스레 닦아 주었다.
“울지 말아요. 서니의 눈물 볼 자신 없어요. 건강 조심하고요. 두통약은 습관적으로 먹어 버릇하면 안 돼요.”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이란 것은 알았지만 서니가 두통약을 자주 먹는 것을 알고 있는 줄은 몰랐다. 말 잘 듣는 학생처럼 대답했다.
“알았어요.”
“그럼. 가 봐요.”
“아 참, 그것 알아요. 애교가 있는 여성도 매력적이지만 차가운 척 하는 여성도 상당히 매력이 있다는 것. 하하핫.”

그 큰 키의 남자가 성큼 성큼 가는 뒷모습을 보며 점심을 사주기로 했는데 하는 생각이 뜬금없이 들었다.
그렇게 사무실을 나왔는데 한번 나오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 모르고 흐르기 시작했다. 서둘러서 건물을 나오니 벌써 어둠이 많이 내려 앉아 있었다. 날이 추우면 모든 것이 같이 얼어붙는지 건물도 하늘도 차갑게만 느껴졌다. 한참을 울어서인지 볼에 닿는 공기에 피부가 당겨져서 무척 아팠다.
이제는 날이 맑으려고 하는지 하늘이 깨끗해져 있었다. 황홀하게 매달려 있던 얼음 꽃도 사라지고 그렇지 않아도 신선한 그린스보로의 공기가 쨍하고 더 깨끗해진 것 같았다. 크게 심호흡을 해 보았다. 가슴 저 밑에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눈들 때문에 환한 거리는 집으로 가는 내내 서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하얗기만 했다.
백을 더듬어 찾아 캘리포니아에 전화를 했다.
“헬로우….”
현욱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부드러웠다.
“나예요.”
“음. 알아요.”
“나, 당신 정말 미워요.”
말을 막상 하고 보니 갑자기 현욱이 몹시도 그리워졌다. (*)


 □ 약  력
                                ․1962년 서울에서 출생
                                ․1981년 단국대 사대 중퇴
                                ․미주한국일보(LA) 근무
                                ․US Census 근무
                                ․부동산 회사 근무
                                ․현재 미국 North Carolina 거주
                                ․[해외문인협회](미국) 회원

날짜 : 10-01-14 13:26     조회 : 272   

 

 

 

 

 

[단편소설] 2009년도 <해외문학> 신인상 당선작
 



 ― 박 봉 금



  죽은 듯이 겨우 내내 얼어붙은 땅이 녹고, 앙상한 나뭇가지는 눈 과 비바람을 맞으며, 기다림의 침묵에서 희망과 꿈을 가지고, 연두 빛 작은 잎사귀들이 꽃이 되기 위해 움트고 있다. 연하고 섬세한 작은 잎새는 봄의 신비로운 변용으로, 고운 색으로 피어날 꽃들을 위한 몸부림일까? 봄은 이렇게 몸부림 속에 눈부신 꽃으로 태어나, 들뜬 분위기에 4월을 맞는다. 이 아름다운 봄! 누가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했던가.

현아는 부활절 주일날 아침 교회를 가려고 준비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넋을 놓고 말았다. 생각지 않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화기를 통해 날아온 것이다. 현아는 전화를 받는 순간 하늘이 노랗고,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한참 후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 하지만, 세상에 무서운 건 인간이라 생각되었다.
사람은 그 속내를 들여다볼 수 없어 겉과 속이 다른 인간들을 믿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겉으로는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며느리 정희가, 갑자기 무섭고 두려운 존재로 느껴졌다. 미국의 타주에서 살고 있는 아들내외가 한밤중 말다툼 끝에, 정희가 경찰을 불러 아들 석이가 잡혀갔다는 어이없는 놀랠 말을 듣고 앞이 캄캄했다.
이곳에서는 한국과 달라서 약한 여자 하소연에 이유야 어찌됐던, 그 순간만은 여자 말에 귀 기울여 일을 처리하게 되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민을 온 우리들은 현지의 법을 잘 몰라 변명 한마디도 못하고 속을 끓이고 있는데 경찰은 법에 따라 일사천리로 실행한다. 또 미국 프로풋볼리그에서 활동했던 스타 OJ 심슨의 사건 이후, 가정법이 더욱더 강화되어 있기에, 서로 조심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기 쉽기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도 사실이었다.

가끔씩 신문에 실린 기사에, 우리 교민들 사이에서 종종 그런 소식을 접하면서 이해 못했던 일도 많았던 현아는 항상 간접적으로 들어왔던 사건들이, 자신에게 닥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탓이었을까? 충격이 너무 컸던 현아의 귓전에는 그리도 당당한 정희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어머니! 제가 그이를 겁 좀 주려고 보냈으니까, 내일이면 나올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처음엔 자신의 귀를 의심하여 한동안 어리둥절하다 다시 수화기를 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전화를 받지 않아 감감 무소식이 더욱더 힘들게 하였다. 다음날이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도 나오지 못하고, 오히려 형무소로 이동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제야 현아는 그곳에 도착하여 자세한 경위를 알아본 결과 한마디로 억장이 무너지는 전율에 너무도 무서웠다.
언제부터인가 아들내외가 자주 일어나는 말다툼이, 우편물 때문에 항상 속이 상한다고 말했었다. 그럴 때마다 현아는 석이만 나무라기 시작했다. 매일 우편물을 받아서 아무데나 놓고 잊어버려, 제 때 빌을 내지 못해 신용이 엉망이라고, 불편을 늘어놓는 석이를 이해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싸움이 아내 정희의 술 때문이라고 말을 들었을 때, 좀 더 신경을 썼어야했었는데, 석이가 하는 말을 무조건 무시했던 현아는 이렇게 후회될 줄이야!
그날도 역시 하루 일과를 끝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면서 석이가 우체통을 열어보니, 마지막이라는 독촉장이 있었다. 독촉장을 꺼내보면서 화가 잔뜩 난 석이는 집안으로 들어섰는데, 얼큰하게 취해 있는 정희의 모습에 울화가 치밀었다.

[1]
또 어지럽혀있는 집안과 돌이 갓 지난 아이가 맨바닥에 쓸어져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싸움은 시작되었다. 의외로 깔끔하고 꼼꼼한 성격을 지닌 석이와 정결하지 못한 정희, 늘어놓을 줄만 알고 치우지 않는 아내의 불만을 털어놓을 때마다 현아는 석이에게 타일렀다.
“잔소리나 비난을 하지 말고 차라리 네가 치워라!”

매사에 듣기 싫어 이렇게 야단을 치곤했었다. 현아는 오래전부터 남자들을 적대시하는 버릇이 있었다. 물론 석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현아의 결혼생활 사십년을 남편에게 당한 모든 상황이 남자들을 불신하게 만들었고, 이유야 어찌됐던 폭 넓은 마음으로 연약한 여자를 감싸주지 못한 남자에게 원망과 비난을 해왔었다.

그동안 내내 고지서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던 정희에게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물론 당사자가 아닌 남편부터 시작해,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숨겨져 있었다. 수입은 정해져있고, 지불하는 것은 많다 보니, 또 석이가 알아서 안 되는 빌을 숨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아이 하나 데리고 집안 살림만하는 정희는, 그날도 석이 퇴근 전에 우체통을 열어본다는 것이, 술김에 깜박 잊고 있었다. 독촉장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석이는 그동안 참았던 울분을 터트리며, 고함을 지르면서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었다.
“또 술이야?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날마다 술을 마시는 건지 오늘은 결판을 내자.”
“왜! 들어오자마자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이 독촉장은 무엇이며, 날마다 집구석에서 술만 마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속 시원하게 말 좀 해

봐?”
“흥!”
“차라리 이렇게 하려거든 모든 경제권을 내가 맡아 하겠으니, 이쯤해서 내게 넘겨주던가! 아니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든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
“무슨 말이야? 경제권마저 빼앗아 가면, 나는 이집 식순이야? 그렇게 되면 내가 살아갈 필요가 없지, 마음대로 해!”
경제권을 내놓으라고 하면, 협박을 하는 정희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몇 평 되지 않은 집안에는 아이 장난감부터 시작하여, 수북하게 쌓여있는 설거지까지 보고, 더욱 화가 나있던 석이는 마침 엄마가 할 말이 있어서 건 전화에 대고, 씩씩거리며 이야기를 늘어놓는 석이에게 현아는 또 이렇게 말했다.

“엄마다. 또 왜! 무슨 일이 있니?”
“오늘 독촉장이 또 날아왔어요. 정말 미치겠어요. 도대체가 무엇 때문에 빌을 잊고 있었는지,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살아가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벌어다주는 돈이 부족하니까 빌을 내지 못한 것 아니겠니?”
“엄마! 벌어서 다 같다주는데, 잘 맞추어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넉넉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부족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좋은 말로 물어보지 그러니? 툴툴대지 말고! 아니면 생활비만 주고, 모든 빌은 네가 하면 되지 않겠니?”

“그렇지 않아도 몇 번을 말했었지요. 그럴 때마다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하기야! 집에서 살림하는 여자한테서 경제권마저 빼앗기면, 아마도 살아갈 의욕이 없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얼마를 벌어다주어야 하는지, 그리고 집안 꼴은 왜 이렇게 더러운지 속상해 죽겠어요.”

[2]
“어떻게 매사에 잔소리를 하니? 집안이 더러우면 네가 치우면 되지 않겠니?”
“하루 종일 일하고 집이라고 들어오면 편히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남자도 아닌 여자가 무슨 술을 저렇게 마셔대는지 알 수가 없다고요.”
“저도 속이 상하는 일이 있었나보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니?”
“그럼, 날마다 속이 상해 술을 마신다는 것인데, 물어보면 말을 안 해요. 답답해 죽겠어요.”
“좋은 말로 물어보지 않고 화를 내면서 물어보니까 대답을 못하는 것 아니겠니?”
“좋은 말로 물어봐도 저 사람은 대답을 안 해요. 답답해 죽겠어요.”
“투덜대지 말고 지혜롭게 물어야지, 쏘아 붙이니까 말을 못하는 것 아니니?”
“좋은 말로 시작하다보면 들은 척도 안하니까, 큰소리가 나가는 거예요.”

매사에 부부의 다툼이 이런 식이 반복되어 듣는 현아는 짜증이 날 때가 많았다. 어미와 통화를 끝낸 석이는 집안을 치우면서 고함을 지르며 할 말 못할 말을 해대어, 정희의 자존심을 깡그리 무시하는 태도가 지나치다보니, 이런 일이 벌어졌다. 집안을 다 치우고 난 석이는 저녁밥 대신 라면 하나 끓여 먹고, 밤 11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어가 편안하게 잠든 석이를, 정희는 바라보면서 더욱 화가 치밀었다. 내성적이면서 아무리 가까운 남편일지라도 속내를 내보이지 않았던 정희는, 계속 소주를 마시면서 생각할수록 석이가 퍼부었던 말들이 귀에 거슬려 한바탕 욕을 퍼붓고, 인사불성이 되어 친정아버지에게 전화로 하소연했다.


[3]
그리고 곰곰이 생각 끝에 다시 수화기를 들어 경찰을 불렀던 시간은 새벽 2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조금 후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잠자리에서 손에 수갑이 채워져 그대로 반항하지 못하고, 경찰차에 실려 끌려가고 말았다. 석이를 보내놓고 또 한사람 경찰과 리포트 작성하는 과정에서, 술김에 정희는 석이를 살인자로 몰아놓았다는 말을 변호사에게 듣게 되었다. 현아는 너무도 기가 막혀 며느리에게 물었지만, 밤새마신 술 때문에 정작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조차 없다고 했다. 자기는 살인자로 말한 적이 없다고 펄펄뛰는 정희를 보면서 변호사는 말했다.

“경찰이 증거물로 부엌칼을 가지고 있던데, 그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현아는 그제야 부엌으로 들어가 칼을 찾아보니, 부엌에 있어야할 칼이 없어 앞이 캄캄했다. 한숨을 쉬며, 나오는 현아에게 경찰서에서 담당자를 만나, 자세한 경위를 듣고 돌아왔던 변호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걸려온 전화를 받고 도착한 경찰이 집안으로 들어섰으나, 집안은 의외로 깨끗하고, 밥상 위에 먹다 남은 술병만 남아 있었으며, 취기가 가득한 아주머니 몸에 아무런 상처도 없어 어떻게 된 것이냐 물었다고 하던데,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
“왜, 대답을 안 하니? 변호사님께서 묻고 있는데!”
“저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아요.”
“제가 경찰에게 들은 대로 말하겠습니다. 경찰이 묻는 말에 부엌으로 들어가서 칼을 내놓으며, 그 칼로 모자를 찔러 죽이겠다고 했다면서, 무서워서 한시도 같이 있지 못하겠다고 했다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아니요?”
“너는 그런 말 한 적이 없는데, 그렇다면 경찰관이 아무 이유 없이 애비를 잡아갔다는 것이니?”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요.”
“아니! 무슨 술을 얼마나 마셔댔기에 네가 했던 말과 행동을 기억조차 못한다는 말을 나보고 믿어라 그것이니?”

“흐흐 흑.”
“아주머니 제 말 잘 들으세요? 만약 모든 것이 거짓으로 밝혀지면, 아주머니는 무고죄로 수갑을 찰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요?”
변호사께서 하는 말에 놀라웠던 정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현아는 변호사님께 이미 일어났던 일을 따지기 전에 그곳에서 석이가 빨리 석방되어 나올 수 있도록 부탁하고, 적지 않은 경비를 마련하려 집으로 돌아왔다.
우선 집부터 부동산에 내놓고, 약간의 돈을 마련하여 다시 그곳으로 향해 비행기에 탑승하여 생각했다. 자신의 삶, 사십 여년을 남편 술 때문에 수많은 고통을 참다못해 별거까지 들어갔었는데, 또 다시 자식과 며느리의 술 때문에, 이런 고통을 겪어야하는 신세가 한없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아들이 엄마에게 원정했던 말을 좀 더 현명하게 받아들였더라면, 아마도 이런 불상사를 미리 막을 수는 있었지 하는 생각에 자책해보았다. 아내의 술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말할 때마다, 현아는 자식부부의 문제에 각자 스스로 해결해 나가기를 원했기에, 관여하지 않았던 자신의 짧은 생각이 문제가 돼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었다.

[4]
이것이 자신의 숙명이라면 거역하지 말고, 순리대로 따라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어느덧 눈물이 앞을 가려 소리 없이 울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아있던 외국인 남자가 이상한 듯 물었다.
“너! 어디 아프니?”
현아는 멋쩍어하며 눈물을 흠치고 안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모든 과정이 며느리에 대한 미움보다도 같은 여자입장으로 생각하며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비행기 안에서 네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생각하다 도착하여, 정희를 보는 순간! 얼굴이 며칠 새 상해있어 안타까움에 위로했다. 한 번 실수로 엄청난 결과에 시간이 흐를수록 풀려나지 못하는 남편을 보면서, 양심의 가책과 생활고로 시달리며 후회를 해보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이라 고통만 받을 뿐이다. ‘며느리도 내 자식인 것을’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가 있게 마련이 아니겠는가. 그곳에 갇혀있는 석이보다 우선 눈앞에 보이는 정희의 몰골이 더 안타까웠다. 현아는 생각하다 못해 조금 떨어져 살고 있는 딸에게 당분간 데리고 있어 달라 부탁해 보내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에 변호사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저, 김 변호사입니다.”
“무슨 좋은 소식이 있습니까?”
“그게 말입니다. 좀 더 빨리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여쭙니다.”
“그래요! 어떻게 하면 빨리 나올 수 있습니까?”
“며느리를 무고죄로 고발하는 것인데, 아주머니 생각은 어떠신지요?”
“그럴 수는 없지요. 아무리 며느리가 밉다고 하지만, 어린 손자 녀석을 생각하면 그렇게는 할 수 없지요. 변호사님, 다른 방법을 찾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좀 더 빨리 나올 수 있는 방법은 며느리를 무고죄로 고발하여 우선 집어넣고,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는 말을 들었던 현아는 기가 막혀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럴 수는 없는 것. 며느리도 아직까지는 내 자식인 것을, 내 아들을 위해 며느리를 그곳에 보낼 수는 없어, 거절하는 현아에게 변호사는 말했다.
“그럼, 이 시간부터 며느리를 집에 두지 말고, 다른 곳으로 보내세요. 조만간 경찰이 며느리를 찾으러 그곳으로 갈 것입니다. 아주머니도 잠시 다른 곳에 가 계십시오. 아시겠습니까?”
“예, 잘 알겠습니다.”

현아는 전화를 끊고 커피를 마시며, 다시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부부란 같은 목적을 향하여 살아가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인생의 험한 굴곡을 넘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손을 맞잡고 지혜롭게 헤쳐 나가면 행복이 지속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불행한 삶으로, 자신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서로 단점을 포용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때, 부부의 사랑은 유지되고, 갈등은 해소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기적인 행동으로 불행을 맞이하는 삶이 안타깝기만 했다.
얼마 후, 누군가 아파트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아는 숨소리마저 죽여 가며 살살 걸어서 문밖을 내다보니, 변호사가 했던 말과 같이 문밖에 경찰이 서 있었다. 밖에서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어, 현아는 그저 귀를 막고 조용히 숨어있는데, 갑자기 울려대는 전화벨소리에 놀라워 식은땀이 흘렀다. 계속 전화가 울려도 받는 기색이 없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경찰은 돌아갔다.

[5]
어둠이 밀려와도 전깃불을 켜지 못하고, 혼자서 창문 밖 하늘에 떠있는 초생달을 보면서 서글픔에 젖어 있을 때, 현아 핸드폰 벨이 울려 받아보니, 딸이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 우리 전도사님 보기에 민망해서 안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어?”
“왜 그래?”
“아니, 올케언니가 무슨 술을 저렇게 마시는지 모르겠어. 너무 많이 마셔대어 보기 싫어!”
“저도 속이 상하니까 마시겠지. 네가 이해를 좀 해 주거라 알겠지?”
“술을 너무 마시니까 문제지! 아이까지 있는 여자가… 엄마가 데리고 가면 안 돼?”
“지금, 이곳 상황이 네 올케를 데리고 올 수가 없으니, 조금만 더 참고 데리고 있어줘. 너에게 미안하다.”

술 때문에 곤경에 처한 현실을 외면한 채 또 술이라, 석이가 했던 말들이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조금은 석이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인 손실이 많아져 돈을 마련하려고 또 집으로 돌아왔다. 현아는 그동안 간신히 지탱해온 자존심마저 팽개친 채 가까운 친구들에게 돈 부탁을 하고, 경비를 마련하여 또 다시 석이 곁으로 달려가며 생각했다.
인간관계 전문가인 ‘게리 스몰리’박사의 말을 인용하자면,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네 가지 욕구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감정과 육체의 안정감, 둘째는 정기적이고 의미 있는 대화에 대한 욕구, 셋째는 성욕과 무관한 스킨십, 넷째는 로맨스에 대한 갈망이라 했다.
아내들은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이 욕구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제대로 사랑받길 원한다. 남편에게서 변함없는 사랑과 헌신을 느끼고 싶어 하며, 어떤 방해나 비난도 받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주장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성욕에 관계없이 따뜻한 스킨십으로 안아주길 바라며,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주기를 소원한다.

주부들에게는 표시도 없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일터에서 돌아오는 남편에게 그날 일과를 말하고 싶어 하며, 자신의 희망, 바람, 꿈에 대해 들어주고 동의(同意)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대부분 남편들은 그저 하루하루 가족들의 생계에 시달린다는 핑계를 일삼아 편안한 마음으로 쉬고 싶어 한다. 집안일은 손끝도 대지 않으려하고, 대화는 물론 자녀들을 돌보는 일조차 나 몰라라 하는 남편에게서, 일상의 사소한 소망까지 외면당함에 앙갚음이 쌓이게 되어, 불행을 맞이하는 결과에 봉착되고 만다.

이민생활에서 이혼 등 가정파탄을 겪을 때 그 좌절감과 절망감은 사업실패보다 더 불행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가정불화라는 악몽에 긴 터널을 지나서, 자유로운 새 삶을 살 수 있는 새로운 기회라 말할 수 있다. 현아는 석이가 그곳에서 나오기 전에 정희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 묻기 시작했다.
“너!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엄마에게 네 생각을 말해주지 않겠니?”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내가 너에게 용서를 빌라는 말이 아니지 않니?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네 생각을 묻는 거야!”
“그이가 나와서 하자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동안 너 나름대로 어떤 결심이 있었기에,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지 싶어 엄마가 묻고 싶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너의 솔직한 생각을 말해주면, 네 의사를 존중하여 그대로 진행하고 싶어 묻는 거야. 서로 더 이상 상처는 받지 않아야 하지 않겠니?”

[6]
“아직은 생각을 안 해봤습니다.”
“엄마의 생각은 이렇다. 이유야 어찌됐던 이 상황에서 어떻게 다시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의문이다. 그래서 너의 확고한 생각을 들어본 후, 더 이상 상처가 안 되는 방향으로 해결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 변호사에게 의뢰하고 싶어 물어본 것이다.”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그이가 나오면 의논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며느리도 자식이란 신념(信念)아래 몇 번을 반복해 물었지만, ‘아직’이란 말을 믿어야했다. 그래도 자신에게만은 그동안 정을 생각해서라도 마음을 열고, 진정한 대화로 의논을 해주리라 굳게 믿었었다. 결국 석이가 무죄로 판결을 받고, 그곳에서 풀려나와 심신을 달래기 위해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현아는 집이 팔렸다는 소식을 듣고 편안한 마음에 집으로 돌아와서, 순리대로 진행되어 집을 마무리하여 이사까지 마치고, 현아 역시 기도원으로 갔다. 그런데 정희는 내내 얼굴 한번 보이지 않고, 안부 전화 한 번 없었던 친정 부모가 짐차를 준비해 가지고 와서 집안 살림을 모두 싣고, 갓난아이까지 데리고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나버렸다. 석이가 무죄를 받아 나오기는 했어도, 사건의 제공은 남편에게 있었기에, 재판과정에서 정상을 참작할만한 사유가 확실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석이 쪽에서 무고죄로 고발하지 않아 집행유해라는 꼬리가 붙어 있어, 한마디도 못하고 그저 또 한 번 당하고 말았다.

출석했던 교회 전도사님을 따라 기도원에 머물고 있었던 석이는, 지난 삶을 되짚어 반성하고 있을 때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곧장 돌아온 모자는 한마디로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현실에 할 말을 잊은 채, 그저 전율(戰慄)에 몸을 떨어야만 했었다. 십여 년을 한 이불 속에서 살아왔던 부부의 끝이 이럴 수가 있을까? 미운정도 정이건만 무슨 원한이 깊었기에 이래야만 해야 했나? 아무리 이해하려 했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석이가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희에게 진정으로 ‘마음을 여는 대화’를 현아는 원했었다. 정희의 속사정을 묻고 또 물었건만, ‘아직’이란 말로 안심시켜놓고 이렇게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폐허로 변해버린 집안바닥에 주저앉아 망연자실(茫然自失)된 석이의 떨리는 목소리는 살기가 등등했다. 현아는 떨리는 몸으로 대강 치우며 석이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몸서리가 쳐지기 시작하며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곧바로 목사님께 부탁드려 아들을 진정시켜 달라 부탁하였다. 또한 아들의 비즈니스 서류를 비롯하여 모든 서류를 가지고 떠났는지, 아니면 없애 버렸는지 알 수 없어 막막하기만 했다.
목사님의 위로에 조금이나마 편안해지는 석이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제야 현아는 한숨 돌리며 또 다시 배반당한 분함에 참아내기가 힘이 들었지만, 어찌 아들에 비하겠는가! 처음부터 계획대로 진행하면서 혹여 무고죄로 고발당하지 않으려고, 그녀에게 이중적 행동을 하여, 끝까지 오만했던 정희가 원망스럽고 미웠다. 하지만 현아는 주어진 믿음과 인내심으로 참고 또 참으며 시간마다 좌절과 실의에 빠진 석이를 위해 기도하며 위로했다.
“아들아! 분노하는 자는 불행의 밑거름이라 어미는 말하고 싶구나!”


[7]
구치소에 들어가 있었던 석이는 어미와 첫 대면에, 자기가 무슨 죄가 있어 그곳에서 곤욕을 치러야하느냐고, 억울한 누명에 방방 뛰면서 분노에, 나오기만 하면 큰일을 저지를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있었다. 석이의 눈동자는 폭력성으로 가득 차 있었고,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생각했다. 우선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면, 아들의 미래는 보장할 수 없는 파괴적인 불안에 몸서리가 처졌었다. 걱정이 앞선 현아는 석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사식대신 성경책을 넣어주면서 잠언 1장부터 31장까지 반복해서 읽어보라 말했다. 우선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분노부터 삭으러들지 않으면,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났었다.

“엄마! 내가 무슨 죄가 있어 여기에 갇혀 있어야 합니까?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래야 되느냐고요?”
“네 마음 엄마가 잘 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을 너무 분하게 여기지 말고, 순리대로 풀어 가자구나. 엄마가 변호사를 선임해서 노력 중이니, 조금만 참아내어라 알겠니?”
“내가 나가기만 하면 그 년을 가만히 두지 않겠습니다. 억울하고 미치겠어요!”
“가만 두지 않으면 어찌할 것이니? 지금 그 생각부터 버리고, 네 그 분노부터 다스리지 않으면 이보다 더 복잡해지는 것을 왜 모르고 있는 거니?”

“분하고 억울해서 못 견디겠는 것을 저보고 어찌하라는 말씀이세요.”
아무리 무슨 말을 한들 위로가 되지 않았다. 매사에 어미가 하는 말을 귓전으로 흘려버려 펄펄 잡아 뛰며, 이성을 잃은 아들에게 현아는 또 말했다.
“훈계를 받기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가트리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너는 왜 모르는 것이니? 지금 너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면 내일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 자명한데, 어미가 하는 말을 잘 새겨들어야한다. 알겠니?”

“저는 모르겠습니다. 잘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며 열심히 살아온 것뿐인데, 무엇이 잘못되어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행하는 일들이 올바르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오만스런 마음과 거만한 행동이 불행의 씨앗이라 깊이 반성해야한다.”
이렇게 부탁하고 돌아와서 자식을 위해 현아는 밤낮으로 통곡하며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을 때 변호사한테서 연락이 왔었다.
“접니다. 변호사님! 무슨 좋은 소식이 있습니까?”
“지금, 보석금 5만 불을 입금하면 내일 당장 풀려날 것인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 그것은 아니지요? 지금 가진 돈도 없지만, 그렇게 되면 죄를 인정하는 것이니 안 됩니다.”
“그럼! 어찌 하시겠습니까?”
“지금 당장 고생스러워도 정정당당하게 재판을 받아서 무죄를 인정받고 나와야지요.”
“노력은 해보겠지만 언제나 나오게 될지 장담을 드리지 못해서 말입니다.”
“변호사님께서 계속 수고를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럼, 시간이 좀 더 걸릴지라도 저만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 노력해보겠습니다.”
억울하지만 이대로 거금을 물고 전과자로 낙인 찍혀서 살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 이 분노대로는 안 된다는 판단아래 시간이 필요했었다.

[8]
또한 당당하게 재판을 받고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노력해야 했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을 거라 생각했던 현아는 최고 학벌까지 마친 아들의 모습을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분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꾸준한 인내심으로 참아내었다. 오전에 면회를 마치고 돌아와 저녁 시간마다 전화 통화에 성경책을 읽고 또 읽으며, 쉬지 말고 기도하라 강요했다. 또 아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지금 너에게 주어진 고난에 조금이나마 엄마의 말이 위로가 될까 만은,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너를 크게 사용하시기 위해 변화시키려하실 때, 먼저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심을 알아야한다.”
“엄마! 제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가정을 지키려고 노력했는데,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들아! 계속 성경책을 읽고 있는 거니? 하나님 말씀 속에 네가 원하는 답이 있다고 어미는 생각한다.”
“아직은 모르겠어요. 그저 분하고 억울해서 죽을 지경예요!”
“누구나 자기가 지은 죄는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란다. 잠언을 쉬지 말고 몇 번이고 계속 읽어가다 보면, 틀림없이 네가 살아왔던 길에 조금이나마 해답이 있을 거라 믿는다.”
“엄마 말씀대로 노력하겠습니다.”
통화 중에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힘들어할 때마다, 현아는 가슴이 두근두근하여 괴로웠다. 하나님의 신뢰함을 평안 속에 거할 수 있다면, 피할 곳,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 것 같은 상황으로 떠밀려가도, 주님을 신뢰하는 자만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실패와 좌절의 상황에 처할수록 자신의 목표만 붙잡고 잃어버린 것에 연연하지 말고, 그 실패를 사용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면, 삶에 두려움과 절망의 구속에서 벗어나 평안과 자유와 평강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아들아! 힘들지만 인내심으로 참아내야 한다. 진리를 깨닫게 되면 구속된 네 마음을 자유롭게 하리라 어미는 믿는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하는지 몰라 답답해 죽겠어요.”
“조금만 힘을 내어라. 괴롭고 답답할수록 주님께 기도하며 매달려야 네가 살 수 있을 것이다.”
“엄마! 언제까지 이렇게 갇혀 있어야 합니까?”
“변호사가 뛰고 있으니까, 조만간 좋은 소식이 전해지리라 믿는다. 그리고 혁이 어미도 술김에 일을 저질러놓고 괴로워하며 반성을 많이 하고 있으니, 네가 용서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어야 하지 않겠니?”

“그럼, 엄마는 이제 여기 안 오시겠습니까?”
“엄마는 경비를 마련하려 잠시 집에 좀 다녀오려고 한다. 그러니 혁이 어미와 대화를 잘 해 보거라. 네가 매일 그 안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하면 되지 않겠니?”
“엄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그리고 죄송합니다.”
적개심과 분노를 품고 상대에게 앙갚음을 생각하는 동안, 정작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에 ‘살기 위해 용서하라’고 강요했다. 억울한 사연에 집착할수록 자신 삶의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이라 했다.

[9]
상처가 되어버린 사건을 내 삶에 주어진 작은 부분으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말해주었다. 다시 경비를 마련하려 비행기에 탑승하여 지난날을 생각했다. 날마다 술에 찌들어 폭행과 폭언으로 일삼아 살아온 아버지 밑에서 편안한 날이 없이 성장했던 아들이 고난에 시달려온 어미에게 항상 위로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나는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겁니다.” 늘 장담하며 위로하였고, 어미 앞에서 술이 취해 흐트러진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아들이 결혼 후, 며느리의 말을 빌리자면, 아버지의 삶을 전수받아 그대로 따라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어왔었다. 그런고로 며느리에 대한 원망과 미움보다 안타까운 생각에, 아들부터 반성해야한다고 강요하였다. 날마다 눈물로 기도하는 현아의 심정을 알았는지,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는 석이의 모습에, 잊지 않으시고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다. 그리고 하루에 한 번씩 면회시간을 현아가 아닌 정희와 손자를 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