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이민 간 된장녀

 

이 종 학

 

 

 

 

캐나다 중도시인 에드몬톤의 한인실업인회는 해마다 성대한 송년 파티를 열고 회원들을 위로하고 서로의 친목을 다진다. 삼백여 명에 달하는 한인실업인들은 호텔, 식당, 주유소 등 삼십 종에 달하는 각종 사업을 경영하고 있는데 낯선 타국 땅이지만 제대로 자리를 잡은 편이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국민성으로 해서 비록 투명한 이방인들이지만 신뢰를 바탕으로 사업체를 잘 운영하고 있다.

12월 중순, 서북부 깊숙한 한랭 고원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 날씨는 매서웠다. 눈이 꽤 쌓였고 북설 한풍도 강하게 불었다. 그러나 회원들과 그 가족들은 거의 시내 대형호텔에 마련한 송년 파티장에 모여들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정겨운 파티이기에 그간에 소원하게 지냈던 사람들도 만나 이민살이의 회포도 풀고 사업적인 정보도 공유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를 회원들이 놓칠 리가 없다.

개회시간인 하오 7시가 가까워지자 복도에서 칵테일을 즐기며 담소를 나누고 있던 회원 대부분이 파티 장내로 입장해서 각기 적당한 원탁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면에는 대형 태극기와 메이플 잎 캐나다 국기가 걸려 있다. 지금까지 장내에 흐르던 한국가요의 가락도 멈추었다. 장내는 엄숙한 기운이 감돌았다.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장내 대부분의 시선이 신호에 따르기라도 하듯이 일제히 출입문 쪽으로 달려갔다. 동시에 감탄의 물결이 장내를 휘감는가 싶더니 이내 잔잔한 소요로 변하면서 한쪽에서부터 서서히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저기 저, 저 여자가 누구야?”

히야, 눈이 다 부시는군.”

어머머, 몸짱이 따로 없네!”

우리 회원 가족이 맞아?”

이런 소곤거림이 감탄사를 꼬리에 달고 장내의 원탁 테이블들 사이를 빠르게 누비고 다녔다. 그러면서 출입문 쪽 여인의 실루엣에 쏟았던 뭇 시선은 그녀가 움직이는 대로 부지런히 따라 이동했다.

그 여자, 장내에 감탄사를 자욱하게 뿌리는 소위 얼짱에다가 S라인 몸짱이 바로 서 연옥이다. 그녀는 백칠십이 넘는 훤칠한 키에 균형 잡힌 날씬한 몸매에다 이목구비가 유연하면서도 섬세하게 강조된 흰 얼굴과 함께 한층 선정적인 미모를 자랑했다. 긴 목과 큰 눈이 서구적인 조화를 이루어서 더욱 인상적인 시선을 끄는지도 모른다.

연옥은 남편 허기남과 함께 파티장 중앙 쪽의 원탁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따라서 모여든 시선과 함께 소곤거림의 파장도 자연스럽게 중앙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어머머, 저 여자가 입은 코트가 헤르메스 브랜드이잖아?”

설마 명품까지야?......”

고급스러운 색상과 분위기 있는 다자인으로 봐서 헤르메스가 틀림없다니까 그러네.”

그래 봤자 짝퉁이겠지 뭐......”

아냐, 저 핸드백도 명품 같아. 루이뷔퉁이 맞아. 아마 삼천 불 이상은 주고 샀을 거야

뭐야, 삼천불이라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돈 냄새가 나네.”

역시 소곤거림은 여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머플러로 포인트를 주는 걸로 봐서 저 여자 패션 감각이 보통이 아닌걸.”

과연 얼굴값을 하는구나.”

어딜 가나 여자들의 눈썰미는 날카롭고 정확하다. 특히 얼굴과 의상을 뜯어보는 안목은 조물주가 여자들에게만 내려준 특권이고 지혜이다. 이날 밤 연옥은 헤르메스, 루이뷔통 브랜드 옷을 비롯한 루이뷔통 가방과 광택 나는 카르티에 시계, 페라가모 구두, 다미아니 브랜드 액세서리까지 이른바 명품으로 완전히 성장한 자태로 참석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여자들의 눈이 연옥의 명품을 정확하게 짚어냈음은 당연했다.

연옥은 송년 파티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장내 시선을 의식해야 했고, 호기심과 다분히 질시가 내장된 화제의 주인공 자리를 피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파티가 끝난 이튿날 연옥 내외의 신원이 파티에 참석했던 모든 가정에 전광석화처럼 전달되었다. 밤에 부부 싸움했던 소문이 이튿날 그들 부부가 아직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벌써 사방팔방으로 질주하고 다닌다고 할 정도인 한인동포사회이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연옥과 기남 부부는 30대 초반이고 캐나다 이민 2년 차, 투자이민으로 처음에는 리자이나에 이민 짐을 풀었고 영어학교에 열심히 다니다가 반년 전에 에드몬톤 변두리에 있는 주유소를 사서 운영하는 중이다. 허허벌판 알래스카 하이웨이 변에 있는 주유소에 매달려 정신없이 밤낮을 죽이다 보니 아직 한인들과는 많이 접촉을 못 하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이곳 한인실업인회 연말 파티에 처음 참석했다가 득달같이 화제를 뿌리게 된 셈이다. 의상은 거의 70퍼센트 이상의 첫인상 전달 효과를 낸다지 않는가. 옷이 날개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을 테고 말이다.

 

지방공무원의 세 딸 중 막내로 태어난 연옥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예뻤다. 업고 길에 나가면 지나가는 사람들 누구나 발을 멈추고 정말 예쁘구나, 꼭 인형같이 생겼다고 감탄할 정도였다. 그녀는 자라면서 얼굴뿐만 아니라 몸태까지 날씬했다. 부모들은 딸의 옷차림에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예쁜 딸이 자랑스러워 가꾸기도 했지만, 딸에게 관심을 쏟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옷을 함부로 입힐 수가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자 연옥의 아름다움은 더욱 빛났다. 그녀를 모델로 사진을 찍어서 선전용으로 내건 사진관이 여럿 생겼고, 무엇보다도 여학생 교복제조업체에서 역시 그녀를 광고모델로 선택한 게 계기가 되어 부산 큰 바닥에서도 그녀는 일찌감치 유명세가 붙기에 이르렀다. 많은 사람이, 그녀는 장차 부산을 대표할 미스코리아 감이라고 기대를 걸기도 했다.

연옥에게 나이에 걸맞지 않은 심리적인 변화가 서서히 일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무렵부터였다. 남들이 다 공인하고 선망하는 자신의 미모로 해서 그녀는 자기가 어중이떠중이 다른 학생들과는 다르다는 서열의식이 생긴 것이다. 더구나 가정형편이 넉넉지 못하다는 열등감 같은 것이 이러한 의식을 더욱 부츠기는 요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열등의식을 극복하려는 심리적 역동에서 미모를 강조하려는 외모 차별 의식 또한 싹트게 되었다. 그래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런대로 돌출행동은 자제한 편이었다. 하긴 교복생활을 벗어나 사치스런 사복을 즐기기에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

연옥은 지방대학에 들어갔다. 경제적 여건도 그랬고 성적도 서울에 있는 대학을 지원하기에는 미흡했다. 학업보다는 몸치장에 관심이 있는 그녀 또한 서울이든 지방이든 개의치 않았다. 과연 그녀는 대학생이 되면서 씀씀이가 커지고 사치 행각이 본격적으로 고개를 들게 되었다. 그런데다가 사람들의 입에서 부산미스코리아 후보라는 말이 자주 나오게 된 것이 또한 그녀가 자연스럽게 외모지상주의에 깊이 빠져드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이 무렵 연옥은 의상실을 겸한 고급미장원으로부터 미스코리아 선발에 도전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부산에서는 미스코리아 만들기에 특별한 노하우가 있다고 소문난 미장원이다. 그들은 조금도 손대지 않은 연옥의 순수한 아름다움은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고 했다. 필요한 모든 경제적 부담을 책임지겠다는 호조건이었다. 사실 미스코리아 선발에 응하는 데는 알게 모르게 엄청난 경제적 뒷받침이 절대적임은 공인된 사실이다. 아무리 미모가 뛰어났어도 아무나 손쉽게 뛰어들지 못하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행운이 찾아온 셈이다. 그동안 얼마간의 유명세와 나름대로 사치 행각이 헛되지 않았음에 연옥은 득의의 미소를 뿌렸다. 자신의 뛰어난 미모와 몸매를 과시하고 공인받을 절호의 기회다. 곧바로 성공 가도를 달리는 첩경이 될 터이다.

부산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나가기 두 달 전부터 연옥은 거의 매일이다시피 미장원에 나가야 했다. 우선 피부와 인상 다듬기를 비롯한 음식 조절, 체형에 따른 패션 선택 등 갖가지 치밀한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이런 일이 연옥은 조금도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용모를 가꾸는 일이고 화려하고 매혹적인 의상을 입어보는 일이니 더없이 행복하기만 했다. 몸과 마음이 날이 갈수록 풍요로워지는 기분에 점점 빠져들어 갔다.

 

드디어 연옥은 모든 준비와 절차를 마치고 부산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출사표를 던졌다. 내로라하는 미녀들의 축전은 황홀했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타고난 아름다움에, 다만 탄성과 환호만 쏟아져 나올 뿐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선발규정에 따라 옥 중의 옥을 가려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풍전야와 같은 긴장 가운데 최종예선에 뽑힌 여덟 명 미녀의 명단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연옥이가 당당히 호명되었다. 대회장 안의 요란한 박수갈채와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연옥은 무대 한가운데로 나와 섰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들 최종예선에 뽑힌 미녀들은 홍학 중의 홍학, 가히 절색임이 분명했다. 이들 여덟 명 가운데서 부산미스코리아 진선미가 가려진다. 그리고 전국미스코리아선발대회에 나갈 영예의 자격을 준다.

쉽게 오지 않는 게 행운이라는 것이다. 연옥은 아깝게도 탈락하고 말았다. 부산미스코리아선발대회 최종예선에 들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녀는 몸이 휘청거렸다. 뒤미처 억울함이 강하게 밀려왔다. 판정이 석연치 않았다.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부정이 최종선발에 개입되었다는 의혹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처음부터 미스코리아선발에 뒷거래가 있다는 말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는 그녀였다. 당연히 최고의 미인으로 선발되어야 할 기회를 도둑맞았다는 옹이가 가슴 깊이 들어가 박히고 말았다.

실망은 분노로 변했고 분노는 다시 보상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연옥은 자신의 미모는 자신의 능력으로 지키고 인정받는 것만이 최상의 보상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최선의 방편으로 당연히 과시적 행위 즉 적극적인 외치(外侈)를 선택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찌감치 외모지상주의 루키즘에 한 발 들여 넣은 상태인 그녀이기에 사치에 가속이 붙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가짜일망정 명품을 찾아다녔다. 그녀의 미적 과시는 더욱 빛났다. 비록 짝퉁일지라도 명품으로 강조된 그녀의 옷발과 몸매는 문자 그대로 매혹적인 요정이었다. 누가 보아도 그녀를 외면한 미스코리아선발대회는 제대로 부산 미녀를 가려내지 못했다는 호된 비난을 받아도 유구무언의 곤혹스러운 처지에 몰릴 만했다.

연옥은 여기에 만족치 않았다. 바다는 메워도 여자의 욕심은 메울 수 없다는 옛말을 실감케 했다. 그녀는 짝퉁 명품이 풍기는 저급한 냄새를 오래 견디지 못했다. 오리지널 명품으로 휘감은 자신의 한층 고양된 아름다움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황홀경에 빠질 지경이었다. 맹목적 고급 브랜드 흠모 열병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극히 제한된 가정의 경제력은 그녀를 잔뜩 움츠리게 했다. 짝퉁 명품을 사는 것만으로도 집안이 흔들릴 판이니 부모는 오르지 못할 나무를 올려다보는 딸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절망은 없었다. 천만다행, 구하면 얻는다는 명언이 그녀를 비켜 가지 않았다. 백마를 탄 기사가 스스로 나타나 그녀에게 기막힌 해법을 안겨 주었다.

이쯤에서 지금의 남편 허기남이 운명처럼 등장한다. 그는 연옥의 대학 2년 선배였다. 그녀의 미모에 매료된 그는 은근히 흠모해 오다가 학교 축제가 끝나고 뒤풀이를 했을 때 우연히 연옥과 가까운 자리에 앉을 기회가 생겼다. 학교 앞 주점에서였다. 이후 그는 친구를 통해서 그녀에게 연정을 토로했고 뜻밖에 빠르게 반응을 얻어냈다. 기남의 가정이 부유하다는 사실에 그녀가 이내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기남의 아버지 허수덕은 부산에서는 알려진 알부자이다. 영도다리 아래서 드럼통을 놓고 수작업으로 염색을 시작해서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사업가다. 지금은 백여 명의 종업원을 거느리는 최첨단의 염색공장을 경영하고 있다. 그러나 허수덕은 나이가 연만했다. 외아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경영권을 넘겨줄 작정을 일찌감치 하고 있었다. 그런 의도 아래에서 대학재학 중임에도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아들이 염색공장 경영에 깊이 관여하도록 했다.

 

연옥과 기남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본시 청춘남녀란 다 그런 것이지만 그녀 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열을 올리고 있으니 남자야 얼씨구나 뜨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주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그녀의 욕구에 화답하는 쇼핑도 마음껏 즐겼다.

오빠, 오늘도 이렇게 돈을 많이 써서 어쩌지?”

그런 걱정은 말라고 했지?”

알았다고요. -.”

여자의 코맹맹이 소리에 사지를 뒤트는 게 남자가 아니던가. 이들이 앉아 있는 다방 티 테이블 밑에는 명품 백화점의 고급쇼핑백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외제 고급브랜드 일색으로 패션 감각이 뿌옇게 풍기는 연옥을 가까이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기남은 세상을 얻은 흐뭇함에 흠씬 취하고 만다.

기남은 자신도 모르게 벅차오르는 감격을 토해냈다.

정말 연옥이 네가 예뻐 환장하겠다!”

왜 또 공연히 놀리고 그래? 미워 죽겠어……

매혹적으로 은근슬쩍 눈을 옆으로 흘기면서 연옥의 손은 어느새 테이블 밑 기남의 무릎에 가 있었다. 순식간에 몸이 뜨거워진 기남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한껏 객기가 요동치고 만다.

앞으로도 새로 들어오는 명품이 있는지 백화점을 잘 살펴보라고. 돈은 언제고 준비해 놓고 있을 테니까. 알았어?”

오빠, 나 감동 먹었어……

그렇다고 눈물을 흘려? 바보 같으니라고.”

몰라. 모올라-”

눈가로 손수건을 가져가면서 연옥은 연방 몸을 고혹적으로 흔들었다.

 

기남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 이들은 결혼했다.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기남의 어머니는 한동안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외아들 며느리로서는 지나치게 예쁜 게 부담스러웠다. 미인박명이란 옛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끝끝내 마다할 이유로는 적절치 못했다. 아들이 혼까지 몽땅 빼앗긴데다가 부산 천지에서 일등 가는 미인 며느리를 얻는다는 자부심도 만만치 않았다.

부산미인과 부잣집 아들의 호화판 결혼식은 젊은이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으로 화제가 되었다.

예정된 대로 기남은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았고 아파트로 새살림을 났다. 터럭 끝만큼 거칠 것 없는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연옥은 오매불망하던 명실상부한 명풍 족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그리고 경제력을 남성에게 의존하면서 외제 명품에 무조건 몰입하고 한국여성의 정체성을 망각한다는 소위 된장녀 항렬에 해당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기남은 비록 아름다운 아내에게 탐닉하였어도 기업 경영만은 착실히 해나갔다. 노쇠한 아버지의 기업 운영방식을 과감히 털어내고 새로운 시도를 머뭇거리지 않았다. 남들의 기우와는 달리 젊은 기업인으로서 주목을 받았다. 한편, 분수에 맞지 않게 사치하고 명실공히 허영에 매몰된 여성을 대표하는 된장녀가 된 연옥의 미학 추구도 이목의 표적이 되어 갔다.

이들 부부는 부산의 일급호텔에서 아버지 칠순잔치를 했다. 결혼하고 일 년쯤 되었을 때이다. 지역명사들이 빠짐없이 참석했다. 산해진미와 좋은 술이 나오고 이름 있는 악단의 연주도 돋보였다. 더없이 화려한 축하연이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보다 칠순잔치를 더욱 빛낸 장본인은 바로 며느리 연옥이었다. 값진 명품으로 성장한 그녀가 연회장을 누비며 직접 접대에 나서자 하객들은 몽환적인 표정으로 아름다운 그녀의 자태에 감탄사와 선망의 시선이 쏟아지는 바람에 축제분위기는 한층 고양되었다.

참 곱구나. 양귀빈들 저만 하겠는가?”

어허 저런 절색을 며느리로 삼다니 허 회장은 복도 많으시오.”

허 회장, 어디서 저런 아름다운 며느리를 얻었소? 정말 부럽소이다. 부러워!”

여기저기에서 절색 미인 며느리에 대한 요란스러운 덕담이 끊이지 않았다. 허수덕 회장 내외의 입에서는 흡족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며느리도 자식이거늘 자식을 칭찬하는 데야 그보다 더 바랄 게 있겠는가.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정말 어렵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시부모는 물론 시댁식구들의 체면을 하늘에 치솟게 했고, 친지 인척들의 기분까지 한껏 드높인 연옥은 만족이 넘치는 미소를 물고 다녔다. 외제 명품을 사들이느라 과다한 지출을 했다는, 개운치 않은 자책감은 일시에 사라지고 그 대신 풍선 같은 자만심이 한가득 들어찼다. 밥이 없는 밥상은 밥상이 아니듯이 아무리 고가의 명품이라 해도 특출한 옷걸이에 걸려야만 그 진가를 인정받는 법이 아니던가. 그녀는 새삼스럽게 거울 앞에서 위세(威勢) 등등한 팔등신 모델의 자태를 마음껏 뽐냈다.

 

미스코리아선발대회의 불공정한 선발을 규탄하고, 선발된 미인들보다 월등함을 입증한 데다 이제는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 슬로건까지 곁들인 연옥의 된장녀 형 과시 사치 행각은 어느새 중증 중독의 비참한 지경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나는 사치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욕망의 노예임을 스스로 선언하고 나섰다. 한 벌에 수천만 원짜리 각종 세계적 명품 의상을 비롯한 천만 원대의 샤넬, 페라가모 핸드백, 천만 원이 넘는 피아제. 브레케 시계는 기본이고 와코루도, 란제리꾸띄르 브래지어와 팬티를 언급하기조차 겁나는 금액을 지불하고 몇 개씩 사들였다.

명품으로 치장하는 경지를 넘어서 이제는 쇼핑하는 짜릿한 희열과 옷장에 걸어놓고 바라보는 즐거움을 만끽하려고 명품백화점을 일과처럼 출입하는 지경까지 가고 말았다. 사치병자로 형상화된 여자가 되고 말았다. 인간이 본능적 욕구의 테두리를 벗어났을 때 파멸이 찾아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사치나 낭비를 잉여소비라 지칭하고 경제발전의 필수요건의 하나라고 운위함에 있어서 절대 한계 범위에서만 허용된다.

소비 감각을 갖추게 되었지만, 연옥에게서 과도한 명품병(名品病) 소비자의 슬픈 실존이 백일하에 정체를 드러내는 데는 몇 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애기 엄마가 되었는데도 사치 병의 위세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녀가 명품 백화점에서, 그리고 최고급 화장품, 헤어 케어, 피부 관리 등 미용을 위해서, 고급음식점과 커피숍에서 춤추듯 긁어대는 신용카드들이 하나 둘 숨넘어가는 고통을 호소했다. 처음에는 여러 개의 신용카드를 가지고 이놈 긁어서 저놈 펑크 때우고, 저놈이 터지면 다른 놈으로 응급 처치했다. 그러나 곧 한계를 드러내자 겁도 없이 사채를 얻어 메웠다. 이제는 여러 개의 신용카드 이자와 상환금이 압박을 가하고 사채 이자까지 잠도 안자고 늘어났다. 어쩔 수 없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염색공장의 운영자금에까지 손을 내밀고 말았다.

여보, 어쩌려고 이렇게 돈을 마구 쓴 거야?”

마구 쓰긴 누가 마구 썼다고 그래. 그럼 명품 몇 가지 사들이는데 이 정도 비용도 안 들어?”

여러 개의 신용카드가 바닥이 났고 고리채까지 끌어 써가면서 꼭 사치를 해야 직성이 풀리겠어?”

자기, 결혼할 때 뭐랬어? 명품 살 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대주겠다고 했잖아? 벌써 잊었어? 아님, 그건 미끼였어?”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어야 할 게 아니야.”

난 자기만을 위해 몸매에 신경 썼을 뿐이야. 그게 지나쳤다면 미안해요 여보.”

기남은 이 지경에 이르고서야 아내에게 책임을 물었다. 좀 지나치게 사치하는 게 아닌가 싶어 얼마간 걱정이 되긴 했어도 이토록 심각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저 명품으로 화려하게 단장한 아내가 허리를 양창거리며 코맹맹이 소리를 문질러대면 예쁘고 사랑스럽기만 했다. 남들이 미녀 아내와 사는 행복을 부러워하면 하늘에라도 날듯이 허허거리기만 했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다더니 도낏자루뿐만 아니라 도끼까지 아주 폭삭 문드러질 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늘이 두 쪽 나도 명품중독에서 벗어날 연옥이 아니었다. 그녀의 과다지출은 멈출 줄 몰랐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채무는 정신없이 집안을 발칵 뒤집더니 기어이 파산의 비운을 몰아오고 말았다.

 

미인 며느리를 자랑스럽게 여겨왔던 허수덕 내외는 노도처럼 달려든 탕자의 파고에 길길이 뛰었다. 열 손가락이 보기 흉하게 문드러지도록 바위를 쪼듯 모은 재산이 아니던가! 재산가라는 말을 듣는 지금에도 먹는 것 입는 것에 검약의 끈을 늦추지 않고 살거늘 어찌 새 사람이 들어와 한낱 사치에 빠져서 대단한 재산을 몽땅 탕진할 수 있단 말인가!

어허 이럴 수는 없느니라. 젊은 아녀자가 가산을 말아먹다니 고금에 이런 해괴한 노릇은 들어본 적도 없다!”

아이고 어쩐단 말이냐! 그 많은 재산 아까워서 어쩐단 말이냐. 아이고, 아이고! 내 뭐랬더냐. 얼굴 반반하면 집안 망친다고 했지!”

허수덕 부부는 아들과 며느리를 앉혀 놓고 득달했다. 딸들, 연옥의 두 시누이도 방방 뛰며 난리, 난리를 쳐댔다.

올케, 네가 뭔데 우리 부모 재산을 깡그리 길바닥에다 뿌리는 거야!”

야 이 올케야, 제정신이야? 우리 부모 재산을 명품 옷가지하고 바꿔?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냐. 더구나 한집안의 주부가. 며느리가 어찌 이런 황당한 짓거리를 했느냐고!”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기남은 사치 병에 걸린 미인 아내의 열 개가 넘는 신용카드 빚과 사채를 갚기 위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염색공장과 살고 있던 고급아파트를 남의 손에 넘기고 말았다. 그것으로도 태부족이었다. 결국, 아들 내외가 감옥에 들어가 앉는 험한 꼴을 볼 수 없는 허수덕은 또한 자신이 사는 70평짜리 아파트를 내놓고 딸네 집으로 들어갔으며, 그밖에 상당한 부동산을 처분했다. 부산에서 알아주는 알부자 허수덕, 부산 일등미인 며느리를 얻고 노상 싱글벙글 웃고 다니더니 졸지에 망했다더라. 그것도 허영과 사치에 들떠 허랑방탕한 미인 며느리가 그 알찬 재산을 조자룡이 큰칼 쓰듯 했다더라, 소문은 일시에 너른 부산 바닥을 휘돌았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 판에 남이 망했다는데 안타까워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사람들의 조소 띤 입방아는 종횡무진으로 펄펄 날랐다. 시샘, 질투를 앞세운 여인들의 노골적인 비아냥과 경멸은 멈출 줄을 몰랐다.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던 연옥이었지만 이쯤 되었으니 사람 기피증과 공포증에 걸리는 건 당연했다. 허탈 상태에 빠져 두문불출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사치의 노예가 되었던 연옥의 화려했던 실루엣은 많은 명품중독자에게 얼마간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경종의 역할을 했다면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선망의 미녀에서 집안 망친 불효 막급한 추녀로 천 길 낭떠러지에 곤두박질친 연옥에게 천행으로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캐나다 이민이었다. 허수덕은 패가의 몹쓸 짓을 한 불효 막급한 며느리일지라도 자식이고 손녀의 어미이다. 아들이 버리지 못하는 여자이거늘 내치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창창한 앞날이 보장된 젊은 자식들일진대 한 번 실패는 병가지상사라는 옛말을 거울삼아 재기의 기회를 잡도록 해야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심이 서자 그는 아들가족의 캐나다 이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서둘렀다. 그리고 정말 어렵사리 투자이민 비자를 얻어냈고 얼마간 이민자금을 마련해서 비행기를 태웠다.

 

연옥은 캐나다에 도착한 날부터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전연 생소한 환경과 여러 인종의 낯선 얼굴들이 어찌나 반갑고 정겨운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사람 목소리만 들려도 진저리를 쳤던 그녀였지만 내심 사람이 그리웠던 것이다. 더구나 사방팔방 활개를 치며 나다녔던 그녀이기에 집안에 틀어박혀 산다는 것은 죽기보다 더 무서운 형벌이었다.

연옥과 기남 부부는 캐나다에 도착하자 우선 영어학교에 다녔다. 캐나다정부의 방침도 그렇지만 이들 자신도 낯선 타국에서 살자면 무엇보다도 언어 소통이 시급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특히 연옥은 영어학교에 다니면서 영어를 배우는 일 못지않게 이전과는 다르게 사람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는 소득을 얻게 되었다. 수많은 인종, 색깔과 모양새와 표정이 다른 얼굴들이 자연스럽게 뒤섞여 있는 모습이 처음에는 약간 거부감 같은 것을 느끼게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들 나름의 개성과 특징이 은근한 친밀감으로 다가왔다. 인위적으로 다듬은 미모보다는 태생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들이 많은 데도 놀랐다. 자신의 생김새에 맞는 옷차림이 질적 평가와는 상관없이 이상하게 돋보였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느껴보지 못했던 안목이다. 무조건 명품 효과만이 여인의 아름다움과 신분을 드높이고 유지하는 길이라 여기며 살았던 그녀로서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어느 날 연옥은 남편하고 조용히 커피를 즐기면서 입을 열었다.

여보, 여기가 선진국인 거 맞지?”

갑자기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래?”

기남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민 온 이래 아내에게서 사뭇 다른 모습을 보고 속내로 다행이라 여기는 한편 불안함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 사람이 갑작스럽게 변하면 안 좋다지 않는가.

학교에 가거나 거리를 걷다 보면 날씬하고 예쁜 여자들이 너무나 많아. 그리고 아무 옷이나 입었는데도 옷태가 죽여준다고요.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거야.”

이런 말은 벌써 수십 번도 더한 연옥이다. 그때마다 새로운 듯이 말하곤 했다.

또 그 소리야? 백인 여자들이야 워낙 양장에 맞춰진 옷걸이니까 그렇지. 우리 나라 여자들도 한복을 몸에 맞게 입어 봐, 모두가 천하일색이잖아. 그런 생각해본 적 없어?”

“......”

환경에 절대적 지배를 받는 게 인간이라지만 이민한 뒤로 연옥의 미녀에 대한 개념이 흔들리고 있는 건 틀림없었다. 명품 만능의 유행이 캐나다에서는 별 볼 일 없는 한낮 사치를 부추기는 유혹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안목이 생긴 것이다. 사치 병에 걸려 허우적거리다가 자수성가한 시부모의 재산을 몽땅 결딴낸 허랑방탕했던 지난날이 죄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새로 태어난 여자처럼 완전히 달라졌다. 무엇보다도 옷차림이 수수해졌다. 기초화장만 한 얼굴에다가 청바지 같은 아주 평범한 캐주얼 차림으로 나다녔다. 약간의 명품 의류나 용품들을 가지고 오긴 했지만 깊숙이 묻어두었다. 꼭 살림에 재미 들린 순수한 가정주부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그녀는 그래서 더 아름답게 보였다. 화사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비에 젖은 연꽃 같은 청아함이 은연중 그녀의 본바탕 미색과 함께 은은하게 풍기는 것이었다.

이들은 조금씩 타국살이에 익숙해져 갔다. 언어 소통도 어느 정도 해갈이 되었고 문화적인 이질감도 날이 갈수록 적응되어 갔다. 이민한 게 참 잘한 일이었다고 여기면서, 이제 어떻게든 성공해서 부모님에게 끼친 불효를 속죄하고 없앤 재산을 도로 회복해야 한다고 이들 부부는 서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허기남은 작은 사업이라도 찾아서 시작하기로 했다. 생소한 나라이지만 한국에서 큰 기업을 운영해 본 경험을 살리면 장차 적잖은 경제적인 성과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마침 다른 주()이긴 하지만 적당한 사업체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캐나다 서북부 고원지대에 위치한 알바타 주도(州都)인 에드몬톤에서 차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변방 하이웨이의 주유소이다. 소규모의 편의점도 갖추어져 있어서 기름 때문에 찾아오는 과객들은 물론 대부분이 농가로 이루어진 마을 사람들을 단골로 삼아 장사할 수가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여보, 우리 한 번 모험해볼까?”

기남은 연옥의 손을 잡고 의사를 조심스럽게 타진했다. 비교적 편하게만 살아온 아내이기에 감당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주유소를 운영하게 되면 전적으로 부부 둘이서 밤낮으로 뛰어야 한다. 사람을 써가면서 만만디로 장사하다가는 돈벌이는 고사하고 본전까지 거덜 나고 만다. 이 나라의 주유소는 한국과는 다르다. 주유소 주인은 부자라는 인식과는 달리 주인이 직접 달라붙어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다.

나 이젠 어떤 일도 할 수 있어요. 자기가 더 문제지.”

연옥이 선선히 자신 있게 대답했다. 엄살 부리던 그녀가 아니었다. 기남은 어깨에 힘을 주었다. 아내가 적극적으로 거들어 준다면 세상없는 어려움도 극복할 자신과 의욕이 용솟음쳤다.

좋았어! 우리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해보자고. 캐나다도 사람 사는 곳인데 무엇이 두려워. 안 그래?”

-케이. 우리 해 보자고요.”

이들 부부는 진하게 포옹하면서 의기투합을 자축했다.

기남 부부는 이민 지참금을 몽땅 털고 얼마간 은행 융자를 받아서 지금 이곳의 주유소를 사들였다. 융자신청을 했더니 은행에서 별반 까탈 부리지 않고 쉽게 돈을 대출해 주자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한국 같았으면 충분한 저당물건이 있어도 어림없는 일이다. 대단치 않은 액수인데도 소위 빽을 동원하고 뒷돈을 적당히 뿌려야 한다.

갖고 있던 돈과 은행 빚을 주유소에다 고스란히 투자했으니 꼼짝없이 심신을 있는 대로 몰입해야 했다. 삐끗하다가는 이국땅에서 길에 나앉아야 할 판이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방방 거려야 했다. 물 한 모금도 편히 마실 여유가 없었다. 다행히 연옥이도 군말 없이 움직였다. 꼭 선머슴처럼 색 바랜 블루진 바지에다 점퍼 나부랭이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몇 천, 몇 백만 원짜리 명품을 휘감고 부산 바닥을 주름잡던 공인된 미녀라고 한다면 누가 곧이듣겠는가. 그래도 쏠쏠하게 돈이 들어오니 그런대로 피곤을 이겨낼 수 있었다.

조금도 힘든 기색 없이 생글거리기까지 하며 부지런히 일하는 연옥을 보면서 기남은 대견하고 고마운 한편으로는 아내가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오죽 마음의 상처를 받았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위안을 삼으려 하겠는가 싶어 눈물이 나도록 딱했다.

기남은 하루 일을 끝내고 이것저것 정리를 하다보면,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천근이나 되는 몸을 침대에 겨우 내던진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다. 하지만, 그는 가까스로 아내 가까이 다가 눕는다. 몸을 과도하게 혹사하는 아내에 대한 애정 표시는 필수적임을 잘 아는 그였다. 그러나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완전히 반송장이나 진배없다. 연옥이 또한 그랬다. 겨우 남편 쪽으로 몸을 돌리긴 했지만 그다음은 동작 끝이다. 손 하나도 제대로 뻗질 못했다. 그리고는 이미 곯아떨어진 채 건성으로 입만 달싹거린다.

-, 나아 너무 피곤해서……

기남이 역시 아내의 말을 들었는지 어쩐지 어느새 코 고는 소리를 냈다. 이튿날 눈을 비비며 겨우 일어나면 옷 찾아 입기가 바쁘다.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틈조차도 없다. 이러면 안 되는데, 후회도 잠깐밖에 허락하지 않는 생활의 연속이다. 그래서 몸으로 부딪히고 때우고 버티는 게 이민살이라는 말들을 하는가 보다.

심신의 혹사를 운명으로 알고 기남과 연옥이 사업에 매달린 지 거의 한 해 가까이나 되었다. 사실 이들은 달력을 차분하게 들여다볼 겨를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자고 일어난 연옥의 말수가 표가 나게 줄어들었다. 손님들에게도 그토록 웃고 상냥하게 대하던 그녀가 갑자기 입을 다문 것이다. 날이 지나면서 표정도 무덤덤하게 변하고 이유 없이 창밖을 우두커니 내다보는 시간도 길어졌다. 밥맛도 잃었고 짧은 시간밖에 잘 수 없는 밤에도 멍청히 침대에 앉아 있는 때도 잦아졌다.

아이고, 올 것이 왔구나! 기남은 가슴이 쿵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짐을 느꼈다. 우울증이 아내를 덮치고 말았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했다. 이민살이에서 특히 젊은 여인들이 자칫 걸리기 쉬운 신경질환이란 말을 이민선배들로부터 여러 번 들어 알고 있었다.

여보, 당신 어디 몸이 불편한 데라도 있어?”

기남은 아내의 손을 잡고 간곡하게 물었다. 그러나 연옥은 고개만 흔든다.

당신 아무래도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봐. 우리 가게 닫고 병원에 한번 가보자.”

역시 그녀는 이마에 주름을 잡으면서 고개를 더 세차게 흔들어버린다. 기남은 아내에게 환경을 바꿔주고 싶었다. 기분전환을 시키는 길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도통 응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려 들지 않고 단지 아무 데서나 넋 놓고 앉아 있으려고만 하는 것이었다. 기남은 애간장이 탔다. 이러다가 아내를 정신병원에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발을 동동거렸다. 사람 심정을 찢어놓기라도 하듯 눈은 밤낮없이 퍼부어댔다. 자칫하다가는 자기 자신까지도 자포자기에 빠져 무슨 일이든 저질을 것만 같았다.

바로 이때 이곳 한인실업인회 송년 파티가 있으니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 동안 어느 정도 안정을 찾으면 이 고장 한인들과 잦은 접촉을 하고 서로 오갈 생각으로 실업인회에 가입했다. 기남은 실업인회의 통지를 받았을 때 갑자기 무릎을 쳤다. 아내의 우울하고 침체한 심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것이다.

여보, 여보 우리 파티에 참석하자. 여기 한인실업인협회에서 송년 파티를 한다고 회원 가족들 모두 꼭 나오라는 거야. 우리 오랜만에 파티에 가서 한판 놀아봅시다. 사람들도 만나고 기분을 마음껏 풀어보자고.”

기남은 장황하게 떠들었지만, 연옥은 마이동풍이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기남이 아니었다.

당신, 명품 옷들 있잖아. 이민 와서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데 그대로 묻어두고 말거야? 삼 년이나 그러기엔 너무 아깝다고.”

! 입으면 뭘 해.”

연옥이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인다. 기남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서둘러서 옷장 깊이 넣어둔 아내의 명품 옷들을 꺼내서 방바닥 가득 펼쳐놓았다. 그밖에 핸드백, 구두 할 것 없이 명품이라는 것들은 모조리 꺼냈다. 말하자면, 집안 재산을 탕진 물고를 냈던 흉물들이다. 기남으로서는 별반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껄끄러운 물건들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여기고 자시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명품 옷 이것저것을 들어서 연옥의 몸에 갖다 대 보이며 충동질을 거듭했다.

이 옷은 어때? 야아, 괜찮아 보이는데. 몇 년이 되었는데도 과연 명품은 명품이구먼. 그리고 옷걸이는 또 어떤가. 변한 게 하나도 없네, 아주 멋있다고!”

기남이가 갖은 충동질을 동원해 가면서 아내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무대에서 연기하듯 진지하게 설득했으나 그녀의 반응에는 더는 진전이 없었다. 기남은 지치고 말았다. 명품이 끝내 유혹의 제값을 발휘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에 온몸의 힘이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연옥에게서 이상한 낌새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밤중이었다. 기남은 잠결에 꿈인 듯 이상한 기척에 무거운 눈꺼풀을 열었다. 어허! 아내가 거울 앞에서 명품 옷들을 입어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미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히야, 정말 예쁘구나! 서연옥은 과연 명품 체질이라고. -, 부산 바닥에서 내로라하던 명품 얼짱 몸짱이 어디 가겠어.”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해?”

연옥의 입가에 득의에 찬 미소가 흘렀다. 얼마 만에 보는 미소인가. 이 황홀한 미소, 아름다운 모습에 홀려서 집안이 박살나는 것도 모르지 않았던가. 이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이 미소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연옥은 이곳 한인실업인회 송년 파티에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녀의 특출한 미모와 고가의 명품이 연출한 아름다움으로 한인사회에서 삽시간에 화제를 뿌린 신데렐라의 자리에 복귀했다. 부산에서 인기를 집중시켰던 그녀의 아름다움이 바로 이곳에서 다시 만발했다. 물론 송년 파티를 석권하면서 자신의 존재증명을 확실하게 나타낸 그녀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위태롭게 급습했던 우울증을 완전히 떨쳐버리기에 이르렀다. 그녀의 눈빛이 생동감 있게 되살아났다. 목소리도, 안색도 옛날 그대로 완전히 복원되었다. 과연 명품과 그녀는 찰떡궁합인 모양이었다.

이역만리 이 땅에서 연옥이 다시 뛰어난 미색과 명품녀의 명성을 회복했고 무서운 우울증을 극복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러나 예상치도 않았던 반대급부 현상이 기남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녀와 집안을 완전히 초토화해버렸던 된장녀의 악취가 다시 솔솔 풍겨 나기 시작한 것이다.

기남은 지난 악몽이 되살아나는 게 아닌가 싶어 온몸에 또 다른 한속이 돋았다. 캐나다에 이민 짐을 풀면서 그녀의 명품 병, 사치 병의 증세는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런 몹쓸 병들 대신 아내가 우울증 증세를 보여서 측은하고 안타까워 그는 밤잠을 설치며 고심한 끝에 아내에게 그 지긋지긋하게 여겨온 명품들로 몸치장을 다시 하게 했던 것이다. 그녀가 생명처럼 집착했던 명품이기에 어쩌면 심기일전할 묘약이 될지 모른다고 여겼다. 오산이었다. 아니, 예상은 의도대로 적중한 셈인데 의외의 후유증이 곤혹스럽게 했다. 앞으로 가자니 호랑이요, 뒤로 도망치자니 사자를 만나는 진퇴양난의 기막힌 갈림길에 서고 말았다. 하지만 연옥으로서는 7년 대한에 비를 만난 꼴이었다.

절대로 악몽이 아니었다. 드디어 연옥은 중대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자기, 나 더는 몸을 혹사할 수 없어. 이대로 죽기 싫다고. 그러니 일할 사람을 고용해요.”

기남은 아내의 돌연한 태도에 놀라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거유? 나 숨 쉬고 살게 해달라는 거야 .”

당신 힘든 거 왜 내가 모르겠어. 지금 우리 형편이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당신도 잘 알지 않소?”

기남은 진땀이 났다. 아내가 중노동에 짓눌려 있었음을 너무나 잘 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을 제대로 고용할 처지가 못 된다. 불가불 파트타임으로 서너 사람 쓰고 있는 것도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이 업소를 사들이기 위해 이민 올 때 갖고 온 돈을 몽땅 털어 넣고도 부족해서 적잖은 은행융자를 받지 않았던가. 자칫 잘못하다가는 국제거지 신세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한국에서 그 많던 부모 재산까지 깡그리 날려버리고 쥐구멍 찾듯 캐나다로 도망치듯 온 처지가 아닌가.

자기, 나 아주 손 놓고 있겠다는 건 아니야. 코스코 같은 데 가서 물건 떼어 오는 일은 내가 거들께. 나도 내 시간을 갖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구. 그쯤은 자기도 이해해 줄 수 있잖아. 안 그래?”

기남은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미 아내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다시 돌아왔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슨 방법을 동원하든 명품을 사들일 터이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사람들 앞에 나설 것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집에다 붙잡아 두자니 정신착란이라도 일으킬 염려가 있고 그대로 고삐 없는 망아지처럼 놔두면 오래지 않아 또다시 살림 거덜 낼 판이니 걱정이 태산 같았다.

연옥은 명품 옷을 입고 주유소에 나왔다. 손님들이 놀라운 눈들을 했다. 단골로 자주 오는 손님들은 화려하게 변신한 그녀를 처음에는 잘 알아보지 못하다가 괴성을 지르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미시즈 허가 맞는가? 원더풀!”

뷰티플! 이렇게 아름다운 줄은 정말 몰랐다

연옥은 살짝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천만 금의 보석도 닦고 가꿔야 제값을 알아본다지 않는가.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그녀의 다음 단계는 바깥나들이였다. 처음에는 다운타운에 다녀왔다고 하더니 한인들을 더러 사귀는 듯했다. 그리고 무엇을 하고 오는지 날이 거듭할수록 나가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때마다 기남은 불안해서 속이 숯검정이 되어 갔다. 아내의 샤넬 브랜드 핸드백 속에는 자기 이름으로 된 크레디트 카드가 들어 있는 것이다.

기남이가 마음조인 대로 연옥은 브랜드 의류점을 찾았다. 점원들은 전문인답게 명품으로 단장한 연옥을 한눈에 알아보고 대하는 태도가 일시에 달라졌다. 캐나다라고 별수 있겠느냐. 그녀는 당당한 모습으로 진열된 물건들을 둘러봤다. 역시 명품을 살피는 그녀의 안목은 아이쇼핑에도 입증이 되는지 점원들은 더욱 고분고분해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선전광고를 통해서 미리 알아두었던 몇 곳의 명품전문점에서 아이쇼핑을 했지만 좀처럼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하지 못하자 속이 몹시 상했다.

어느 날 연옥은 한국으로 국제전화를 걸었다. 단짝으로 지냈던 학교 동창이고 같은 명품 족이기도 한 박미숙이다. 명품 병과 사치 병에 함께 걸리긴 했어도 미순은 된장녀는 아니었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터라 명품을 선호할 만한 탄탄한 자기 수입이 있었다. 도망치듯 이민 온데다가 사는 형편도 변변치 못한 터라 연옥은 그동안 미숙에게 일제 전화 통화도 하지 않았다.

연옥은 비록 전화상이긴 해도 오랜만에 말문이 터지자 이것저것 끝없이 사설을 늘어놓았다. 제대로 말할 상대를 찾지 못하는 생활이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그러다가 본론으로 들어가서 명품을 화제로 올렸다. 그녀들 최상의 취향이 대화의 중심이 되었으니 더욱 신이 나서 난리도 아니었다.

이곳 명품백화점은 아주 시시껄렁해.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된다고.”

연옥은 미숙이가 보고 있기라도 하듯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래? 캐나다는 잘 사는 선진국이잖아. 그러데, 왜 그래?”

진열해 놓은 물건들 대부분이 짝퉁이더라구. 그래서 좋은 것 있으면 고르려고 돌아다니다가 시간만 공연히 죽였지 뭐니.”

참 뜻밖이네. 그래서 실망했겠네.”

그럼. 실망할 정도가 아니지. 그래서 말인데 너 캐나다 여행 올 생각 없어? 나도 만나고 관광도 할 겸해서.”

캐나다에 말이야……?”

이른 시일 안에 날 잡아서 꼭 왔다가 가. 우리 부부는 대환영이니까. 알았지? 그리고 오게 되면 새 패션 명품 옷이 있으면 몇 벌 사서 갖고 와. 벌써 삼 년 전 걸 입고 다니려니까 구질구질해 죽겠어.”

그래. 한 번 생각해 볼게.”

국제통화를 하고 나서 연옥은 미숙에게서 캐나다에 오겠다는 전화 연락이 오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백화점 순례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토록 바람 먹은 사치에 대한 열망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한 달포쯤 지나서 미숙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보름 후에 이곳에 오겠다고 했다. 연옥은 쾌재를 불렀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가 반갑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미숙이 들고 올 명품이 기다려지는 것이다. 그날부터 얼굴과 머리 손질에 온 정성을 쏟았다. 새로운 명품에 걸맞은 몸단장과 이미지 관리는 필수적이다. 한편, 기남은 날이 갈수록 태산이 무너지는 소리를 내며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소갈머리 없이 사치 병이 도진 아내 한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쥐가 날 지경인데 짝꿍까지 한국에서 원정 온다니 사경에 빠져 헤매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미숙이 도착하는 날 연옥은 에드몬톤 국제공항에 나갔다. 입국하는 여행객들, 출영과 송별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공항대기실은 인종시장을 이루어 붐볐다. 그런 가운데서도 연옥은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어들였다. 명품 일색으로 성장한 그녀를 보는 사람마다 아름다움에 감탄을 연발했다. 우리와는 달리 자신의 감정을 과장될 정도로 솔직하게 표현하는 외국인들이 많다. 연옥의 기분은 달아올랐다. 많은 캐네디언에게서 인정받기는 처음이었다. 삼 년 동안이나 무참하게 팽개쳐두었어도 자신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빛나고 있다는 사실에 목에 힘이 들어갔다.

밴쿠버에서 오는 비행기가 예정대로 정오 정각에 도착했다고 전광판이 알렸다. 한국에서는 KAL을 타고 밴쿠버에 와서 이곳까지는 캐나다항공으로 갈아타야 한다. 오래지 않아 미숙의 날씬한 모습이 나타났다. 연옥은 달려가 서로 얼싸안고 빙빙 돌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동양계 미녀들을 호기심이 발동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연옥이 넌 여기서도 그 인물이 여전하고나.”

정말이야? 그렇게 보여?”

그렇다니까. 내가 왜 빈말하겠어?”

연옥의 입이 있는 대로 벌어진다.

미숙이 넌 어떻고. 애가 둘이나 된 아줌마가 언제나 처녀 같다니까.”

그래? 그럼 캐나다에서 애인 하나 만들까?”

이런 얌체 같으니라고.”

두 여인은 뭇시선을 휘저으면서 호기롭게 호호, 하하 수다를 떨다가 차에 올랐다. 운전하면서 연옥이 말했다.

호텔에다 모실까 했는데 아무래도 우리 집이 편하겠지? 집은 좋지 않지만 말이야.”

내가 브이아이피라도 된다는 거야? 너희 집이 내겐 바로 고급호텔이라고.”

요건 말도 명품같이 한다니까. 아무튼,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다. 그럼 우선 다운타운에 가서 점심부터 먹고 천천히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다운타운은 또 왜 가누. 곧바로 집으로 가자꾸나. 우선 몸부터 씻어야겠어. 기내식을 먹어서 아직 배는 든든하니까.”

그게 좋겠어? 그럼 귀빈의 의사를 존중해야지.”

연옥은 차 머리를 돌리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발에 힘을 더했다. 비행장에서부터 콩밭에 가 있는 그녀의 내심은 처음부터 미숙이 들고 온 여행 가방에 내내 머물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여행가방 안에 들어 있을 명품들이 궁금했다. 한시라도 빨리 입어 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터였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미숙에게 갖고 온 명품에 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한껏 인내심을 발휘하고 꾹 참았다. 영화 스토리를 미리 듣게 되면 개봉박두의 기대감이 사라지고 만다는 스릴을 아는 그녀이다. 한편, 미숙 역시 그래서 명품에 대해서 일체 언급을 유예하는 것일까?

궁금하고 기다려지는 시간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 시간 남짓해서 연옥이 모는 차는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미리 깔끔하게 치워놓은 방으로 갖고 온 여행가방들과 함께 미숙은 안내되었다.

미숙은 연옥이 부부와 마주앉자 오래 격조했던 터라 우선 간단한 안부인사가 분주하게 오갔다. 그러고 나서 미숙은 핸드백을 앞으로 당겨 열더니 흰 봉투 하나를 꺼내서 연옥이 앞으로 내밀었다.

연옥아. 이거 받아. 네 시아버님께서 주신 거야.”

아버님이......?”

연옥이가 깜짝 놀라서 봉투를 집는 사이에 미숙은 두리번거리더니 약간 엉뚱하게 물었다.

, 선숙이는 안 보이네?”

우리 딸? 학교에 갔지.”

, 참 학교에 가 있을 시간이지.”

방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봉투를 여는 연옥의 얼굴이 너무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연옥은 봉투 속에 넣었던 엄지와 집게손가락을 꺼내더니 넋 나간 사람처럼 입을 달싹거린다.

어머나-”

그녀의 손가락에는 달러 지폐가 잡혀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미화 오천 불이야. 연옥이 너 갖다 주라고 주신 거야.”

“......?”

내가 여기 오기로 마음먹은 이튿날 길에서 우연히 기남씨 아버님을 만났지 뭐니. 그래서 너를 만나러 캐나다에 가기로 했다고 말씀드렸지. 그랬더니 마침 잘 됐다고 하시면서 가기 전에 꼭 만났으면 하시는 거야. 긴히 전할 말이 있으시다면서.”

우리 아버지 어떠시던가요?”

기남이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많이 늙으셨더라고요. 노인정에 나가 소일하신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토록 빨리 노쇠하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미숙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기남에게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면서 다시 말을 계속했다.

사흘 뒤에 마침 그 근처에 갈 일도 있고 해서 기남씨 아버님을 찾아뵈었어. 혼자 계시더구나. 아주 반가워하시면서 방에서 편지봉투를 꺼내 오시는 거야. 네 딸 선숙이가 할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였어.”

, 선숙이가?”

우리 선숙이가 말인가요?

연옥이 부부는 동시에 크게 놀라 물었다.

선숙이의 편지는 대충 이런 내용이었어. 아빠는 물론 엄마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잘 먹지도 못 하고, 잠도 조금밖에 못 자요. 엄마는 맨날 낡은 청바지 하나만 입고 살아요. 딱해 죽겠어요. 할아버지, 이제 엄마 용서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할아버지…….”

미숙은 목이 메어 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연옥과 기남의 눈들은 벌겋게 충혈 되어 초점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한참 만에 미숙은 가까스로 자신을 추스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서는 손녀의 편지를 받은 즉시로 돈을 마련하시려고 여기저기 다니셨다나 봐. 이 돈을 내게 주시면서, 연옥이 네가 아무 옷이나 입고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시더구나. 그러면서 명품 옷 한 벌이라도 사 입는 걸 나더러 꼭 보고 오라고 하셨어. 그래서 내가, 아버님, 그럼 며느리 용서하시는 거예요? 하고 당돌하게 여쭤봤지 뭐니. 그랬더니, 그럼 우리 열 살짜리 손녀만도 못한 할애비가 될 수는 없지, 안 그런가? 하시며 허허 웃으시는 거야. 내가 어찌나 민망한지 죽는 줄 알았어.”

기남은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가버렸고 연옥은 눈물 범벅이가 된 얼굴을 하고 꺼이꺼이 울어댔다. 하지만, 미숙은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할 말은 다 해야겠다는 듯이 상체를 연옥 쪽으로 기울였다.

, 네 명품 옷 사오지 못했어.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 다 짝퉁인 거 너 벌써 알아봤지? 네 시아버지한테서 나 엄청 충격 먹었거든. 감히 백화점 근처에도 가지 못하겠더라, 이해해 주겠지?”

바로 이때 밖에서 선숙이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엄마 학교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