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해외문학상 대상 시부문 수상작-고원(미국)/ 소설부문 대상 수상작-이회성(일본)

 

 

시부문 대상 수상작] 날짜 : 07-12-30 13:20     조회 : 604

황혼이 곱더라 외 2편

-고원


저녁 놀 밝을 무렵
으레 혼자 돌아가면
하늘 타는 빛깔이
갈수록 새롭구려.

당신이
알아차릴까
곱게 물든

향기


[소설부문 대상 수상작]

8월의 비
-이회성           
         
                                           
  그 현장에 가려며는 고개를 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개에 접어들자, 우리는 사륜 자동차에서 내렸다. 거기는 광장이 되어 있었다. 옛날에는 얼룩 조릿대가 밀생한 지대로, 진지(陳地)였지만, 지금은 섬의 동서를 연결하는 요충지가 되어 트럭이랑 자가용 차가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를 지날 때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히 중천에 우뚝 솟아 있는 기념비로 이끌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승 기념비였다. 광장 한 가운데서 잔디 제단을 거느리며 활 모양의 형상으로 우뚝 서 있었다. 대좌에는 야전포가 놓여 있고, 그 길쭉한 포신은 남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 저거…, 일본 방향 아냐.”
  라고 카메라맨이 중얼거리면서 카메라를 돌리고 있었다.
  “여기는 옛날에는 얼룩조릿대 고개라고 했던 곳입니다.…….”
  나는 취재팀에게 설명했다. 격전지였던 곳이다. 50년 전의 8월, 이 고개를 둘러싸고 소련군과 일본군이 피로 피를 씻는 진지전을 전개했었는데, 기묘하게도 이 공방전은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한 닷새 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나는 이 전투의 전모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합당한 인간이 아님을 알고 있다. 당사자도 아니고 현장도 못 보았다. 그 당시 열 살이었던 나는, 그 끔찍한 함포사격이 이른 아침 갑자기 시작된 뒤, 가족이랑 함께 방공호 속에서 피신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도망치려 해도 해안가의 상가 지역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산 쪽으로 피난 갈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산 쪽 동네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아라가이 골짜기를 거쳐 이 고개를 넘어서 오지로 도망가려다가 일본군과 소련군 사이에 끼게 된 것은 비극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그 끔찍한 참사는 일어났던 것이다.
  “저 산 너머 저쪽에 바다가 보이죠.”
  나는 일행에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날이 맑았기 때문에 먼 쪽의. 기복이 별로 없는 산등성이 사이로 수평선이 희미하게나마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 나는 그 수평선에 잠겨 보이는, 내가 태어난 고향으로 일행을 안내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여행은 전후 50년을 한 단락으로 삼아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지만, 나로서는 나의 무엇인가와 만나기 위해서, 이 일을 맡은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었다.
  “자, 이제 슬슬 내려갈까요.”
  나는 동행인들을 재촉했다. 비(碑)라고 하는 것은 특히 전승 뭐 어쩌고 하는 종류의 기념비라는 것은― 어째서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것일까 생각하면서. 우리는 사륜 구동차로 돌아왔다. 모두가 차에 올라타려고 한 그 때였다. 때 아닌 폭음이 산골짜기를 뒤흔들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우리는 놀랬다.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오토바이 편대가 늠름하게 나타난 것은 그 직후였다. 붕붕 큰 소리를 내며 네 대의 오토바이는 우리를 무시하고  광장을 가로지르자, 전승 기념비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새빨간 깃발을 펄럭이면서. 깃발에는 러시아 문자가 춤추고 있었다. 뭐라고 씌어 있는 것일까. 그 사이 오토바이 편대는 전승 기념비를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돌자 다시 오던 길로 사라지고 있었다.
  “멈추게 해 주시겠어요?”
  나는 얼른, 통역을 맡은 양씨에게 부탁했다. 양씨가 러시아 말로 뭔가 소리쳤다. 그러자 오토바이 편대는 스피드를 줄이고, 우리들 정면에 멈추어 섰다.
  “그 붉은 깃발에는 도대체 뭐라고 씌어 있는 겁니까?”
  “사할린 시정 120주년을 축하하다!”라는군요.“
  “120주년…….”
  “오늘 밤에는 성대한 불꽃놀이 대회가 있으니까 꼭 구경 와 주시라는 데요.”
  나는 맥이 풀렸다. 앵그리 영 맨(Angry young man) 같은 옷차림의 그들은 불꽃놀이 대회의 선전 대원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나면 가 볼 게요 라고 젊은 취재기자들이 싹싹하게 약속하고 있었다.
  이윽고 우리 차도 예전의 아라가이 골자기의 꾸불꾸불한 산길을 내려갔다. 차 안에서 이후의 스케줄에 대해 협의했다. 그 스케줄을 따라 우리는 현장 두 군데를 방문하기로 했다. 하나는 일본인이 세운 새 위령비를 방문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M마을에서 일어났던 조선사람들의 비극의 현장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그 어느 쪽도 50년 전 8월 15일 이후에 일어난 패닉(panic) 상태의 결과였지만.
  "그런데…….“
  나는 몇 살인가 연상인 양씨에게 의논을 구했다. 그는 나하고는 옛날부터 잘 아는 사이로, 이 나라의 구체제가 무너지기 전에는 조선계 소련인으로서 당원(黨員) 저널리스트로 일했으니까, 이 섬에 남아 있는 조선인의 실태에 대해서는 잘 알 터였다.
  “김용자(金蓉子) 씨를 만나고 싶은데요, 어떻게 연락이 안 될까요?”
  “아, 그건 아주 간단하죠.”
  그는 쉽다는 듯이 대답했다.
  “선생님의 처형 내외분께 여쭈어 보면, 확실히 절대적으로 해결될 겁니다. 아주 잘 아는 사이거든요.”
  그의 얘기에 의하면 김용자 씨는 이미 일흔이 넘었고, 독신일 것이고, 자유시장(바자르)에서 꽃을 팔고 있단다. 그리고 우리 처형 내외는 바자르에서 오랫동안 감자랑 홍당무 같은 것을 팔고 있었기 때문에, 오랜 지기하는 이야기는 극히 자연스러운, 납득할 만한 얘기였다. 나는 이 얘기의 귀결에서, 혼자 살아가는  노파의 삶이 결코 쉽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연금을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나라를 엄습한 인플레이션이 얼마나 러시아인이랑 잔류 조선인의 삶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가 약간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긴 해도 우리 처형 내외가 김용자 씨와 아는 사이였다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처형한테 부탁하면 틀림없이 그녀를 만나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소기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야말로 M마을에서 50년 전의 8월 21일에― 패닉(panic) 가운데서 일어났던 참극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것이다.
  이 중요한 정보를 얻은 우리는 우선 일본인 위령비를 둘러본 뒤에 처형네 집에 들르기로 했다.
  높은 경사지에 그 진혼비는 있었다.
  그것은 정말로 훌륭한, 커다란 돌로 만들어진 장중한 느낌을 주는 진혼비였다. 바로 며칠 전에 일본에서 운반되었다는 이 진혼비는,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고지에 안치되어 있었다.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억울하게 생을 마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망자에 대한 진혼의 염이 느껴졌다.
  나는 진혼비 앞에 나아가 목도를 올렸다. 인구 이만이 채 안되는 마을에서 오백 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전투에 휘말려서 목숨을 잃었다.(천 명이라는 숫자를 대는 엄격한 목소리도 있긴 하지만) 그 정확한 숫자가 어떻든 간에, 그 가운데에 내 학우랑 아는 이들이 섞여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학우의 아버지가 자살했기 때문에 전후 일본 돌아오고 나서 고달픈 인생을 보내고 있는 친구도 떠올랐다.
  목도를 올린 뒤 나는 진혼비의 비문을 읽어 보았다. 그리고 그때,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태연한 척 비석 뒤쪽으로 작은 글씨로 빽빽이 새겨져 있었다.
  “어떠세요?”
  취재팀의 여성 리더가 물어 왔다.
  “진혼비에 대한 인상을 들려주세요.”
  “훌륭한 기념비라 다행입니다.”
  나는 조용하게 대답했다.
  “이것으로 유족 분들도 겨우 마음이 놓이셨겠지요.”
  “닷새 후에 그 유족 분들도 이 마을에 연고가 있는 문들이 배로 온다고 합니다. 초혼제라고 할까. 제막식을 하기 위해서래요. 밤에는 봉오도리(영혼을 맞이하고 위로하기 위해 춤추는 행가)를 한다고 합니다. 유카타(여름용 일본 홑옷)를 입고,”
  “좋은 추모이지요,”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돌아가신 분들도 틀림없이 함께 추고 싶을 거예요.”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었지만, 뭔가 마음에 켕기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은 비문 탓이었다. 정성이 담긴 비문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한 군데 있었다. 왜, ‘여러 영(諸靈)’일까. 그 전투 때문에 많은 일본인이 희생되었지만, 조선 사람도 적지 않았다. 아이누인도 희생되었다. 그 모든 사람들을 포괄한 집합명사로 ‘여러 영’이라고 하고, 망자를 애도한 것이라고 판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뭔지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숫재…….”
  나는 내 심정을 토로했다.
  “합동비를 만들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전승 기념비’라든가 ‘진혼비’라든가 하지 말고, 조선인이랑 아이누인을 포함한 합동비를 세웠던 편이 좋지 않았을까요.”
  오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다, 라고 마음속으로 나는 중얼거렸다.
  그날 저녁 때 처형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곧장 물어 보았다.
  “누님, 김용자 씨를 아십니까, M마을의?”
  “암, 잘 알지.”
  한 살 연상의 처형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그 언니와는 아주 친하다구.”
  “바자르에서 꽃을 판다죠?”
  “아니야, 건강이 나빠져서 지금은 체홉 시(옛 野田 시)에 틀어박혀 있어.”
  “체홉 시에 계세요…….”
  차로 가면 1시간 거리다, 라고 머리 속에서 계산하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지만 가끔 일보러 호르쿠스크(옛 眞岡 시) 쪽에 나오는데 말야, 어딘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바자르에 들려서 우리들 하고 얘기하다 돌아가지. 그 언니는 꽃 만드는 데는 일인자야. 우리는 도저히 그렇게 훌륭한 꽃은 키우지 못해. 그 언니가 아직 바자르에 나오던 때에는 국화라든가 코스모스라든가 싸리를 가판에 올려놓으면, 러시아 여자들이 앞 다투어 사 갔지. 조선인 여자들이 키운 것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말이야.”
  “그러면…….”
  나는 놀래서 말을 더듬었다.
  “…… 그, 김용자 씨는 즉 카레이스키(조선인)가 아니란 겁니까?”
  “일본 사람이라구. 야폰스키.”
  처형은 간단히 대답했다.
  “조선 사람하고 결혼했으니까 김씨 성을  지금까지도 쓰고 있지만 말야.”
  “그래요…….”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왜 그랬는지 나는 그녀가 틀림없는 한국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일방적으로 그렇게 믿어 버렸던 것일까. 나는 내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가 딱 하고 소리를 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만나게 해 주실래요, 그 분을.”
  나는 처형에게 부탁했다.
  “그 뭐야, 저네 그, M마을 일로 그 언니한테서 뭔가 들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여느 때와 달리 처형이 쌀쌀한 말투로 다짐했다.
  “그런데요…….”
  나는 처형의 반응이 납득이 가지 않아서, 이상한 마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 돼, 그것은.”
  처형이 냉랭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언니는 누구를 만나도 진짜 얘기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구. 이  나한테도 안 하는 걸. 꽃 재배하는 방법이라면 기꺼이 가르쳐 주지만, 그 사건에 대해서는 입을 꽉 다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아요. 요전번에도 말야…….”
  어느 날 오후, 일본에서 온 두 명의 잡지 기자가 체홉 시로 김용자 씨를 찾아간 것은 M마을에서 일어났던 재향군인들에 의한 조선인 학살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낡은 집의 현관에 서자, 두 사람은 50년 전에 살아남은 그녀의 늙은 모습을 보면서 “혼나셨지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진상”을 얘기하도록 열심히 설득했을 때 그녀는 갑자기 엄한 얼굴이 되었던 것이다.
  “그 일에 관해서라면 김수철 씨한테 물어 보시구랴.”
  그런데 그 인물을 만나려면, 그들 둘은 황천까지 가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남편, 김수철은 M마을에서 살해당한 조선인 스물 세명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마음으로 언니가 그렇게 말했는지, 자기의 소중한 남편이 살해당해 본 사람이면 안다.”
  고 처형은 내뱉었다.
  “웃기는 얘기라구. 그렇게 듣고 싶걸랑, 그 사건 뒤에 일본에 돌아간 M마을 사람들에게 물어 보면 될 텐데 말야. 뭣하러 일부러 이 섬까지 와서 언니 속을 뒤집어 놓는 건지. 정말 속셈을 알 수가 없어.”
  처형이 자기 일처럼 화를 냈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돼서, 나는 김용자 씨를 만나는 일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오히려 상관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50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다. 스무 살 안팎의 젊은 여자가 반평생에 걸쳐서 침묵을 지켜 온 이야기라면, 그것이 어떤 인과관계에서 초래된 것이라 해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대한 것일 거라는 것을 쉽사리 상상할 수 있다. 설혹 거기에 남은 엿볼 수 없는 큼직한 비밀이 숨어 있다 하더라도, 처형의 말처럼 그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는 진실은 알 수 없는 것이고, 게다가 그 진상을 증언해야 할 사람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 측인 것이다.
  ‘가엾은 여자야.“
  매형이 말했다.
  “그 여자는 모든 짐을 짊어졌어.”
  과묵한 매형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처형은 달랐다.
  “그 언니가 해 온 일을 어중간하다고는 할 수 없어. 조선 사람 아무도 못 당해.”
  그 말은 나한테, 바자르에서 함께 몇 십 년 동안 고락을 함께 해 온 자의 목소리로 울려 왔다. 이 섬까지 흘러흘러 온 사람들은 자주 타인을 ‘마을 사촌’이라고 칭한다. 일본식으로 말하자면 ‘먼 친척보다는 가까운 이웃사촌이’이라는 얘기겠지만, 그것이 극동의 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혜이자 애정인 것이다.
  “노다(野田)로 이사 가고 나서도 그 언니는 가끔 바자르에 왔는데, 그것은 언제나 어딘가에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어.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모습을 감추는지 우리는 몰라. 아니, 사실은 알지. 그래도 안 묻는다고. 상대도 말하지 않고, 각자의 인생이니까 말야.”
  처형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 의미를 묻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기회를 놓쳐 버렸다. 마침 그때 불꽃이 터졌기 때문이다. 슈르르 퐁퐁, 하는 신나는 작렬음이 울려 퍼지고, 처형네의 너절한 유리문이 떨렸다.
  “불꽃놀이군.”
  나는 오후에 고개에 있는 광장에서 만난 오토바이 선전 대원을 떠올렸다.
  “모두 안 가세요?”
  내가 물어 보았다. ‘모두’라고 하는 것은, 이 내가 태어난 고향 마을에서,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살고 있는 조선인들의 얘기였지만.
  “저건 러시아 사람들이 즐기는 거야.”
  처형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도 처형은 나한테는 구경 가면 어떠냐고 권해 주었다.
  ‘아뇨.“
  나는 거절했다. 피곤하다고 얘기했지만, 어딘지 석연치 않은 것이 마음 한 구석에 고여 있었기 때문이다. 예의 붉은 깃발의 글씨가 되살아났다.
  “사할린 시정(施政) 120주년…….”
  그것은 역사의 얼마나 묘한 패러독스인가. 만일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섬의 역사의 한 시기는 분명히 일본이 통치했었다. 현대사의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전승기념비든 진혼비든 존재하지 않는 셈이 되어 버린다. 이 집, 나와 처형 부부와의 관계도, 김용자 씨의 일생도 그 다음 날 아침, 아는 취재팀과 합류해서 M마을로 향했다.
  8월의 햇살이 내리쪼이고 있었지만, 광선은 약했고 습기도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지내기 좋은 정도였다. 차 속에서 우리는 웃어 댔다. 불꽃 대회에서 있었던 사소한 에피소드라든가, 호텔에서 늦잠을 잔 누군가가 왜 그랬을까. 그런 것을 추측하고 하면서. 그러나 그것은 일에 착수하기 전에 긴장을 푸는 예비 체조나 같은 것이었다.
  “절대 확실‘ 선생님―”
  하고 여성 리더가 조수석의 양 씨에게 트집을 걸고 있었다.
  “김용자 씨 ‘해결’ 되지 않았지 않습니까?”
  “아니, 그게 말이죠……”
  그는 백발이 섞인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힘든 변명을 유머러스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부인네의 세게는 저는 도대체가 알 수가 없어서 말이죠…….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절대 확실’입니다. 왜냐하면 ‘현장’이라는 것은 사람하고 달라서 움직이지 않으니까 말이죠.”
  그 말은 뜻밖에도 모든 사람을 조용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샤륜 구동차는 벌써 어제의 고개를 넘어서, 흙먼지가 이는 길거리로 들어서고 있었다. 표장이 된 곳에 이르자, 좌우의 목축지에서 소와 말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20분 정도 지났을 때, 통역이 재빠르게 운전사에세 말해서 차를 세우게 했다. 그 부근에는 러시아식의 목골 건축으로 지어진 집들이 모여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양 씨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거리를 건너 페인트가 칠해진 비교적 큰 건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얼마 있다 그는 자그마한 몸집의, 수수한 상의에  넥타이를 맨, 몽뚱한 코의 초로의 사나이를 동반하고 돌아왔다.
  “이 분이 체프라노 마을의 촌장이십니다. 현장을 안내해 주신다고 친절하게 말씀해 주셨죠.”
  “감사합니다.”
  모두가 고맙다고 인사하자, 체프라노 마을의 촌장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힘찬 악수를 청하고, 자기는 이 마을의 일이라면 눈을 감고 있어도 뭐든지 안다고 자신 있게 자기 소개를 했다.
  ‘믿음직하네요.“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목적지는 5분 정도 간 곳에 있었다. 어느 지점에서 차가 왼쪽으로 크게 꺾이더니, 언덕길이 푹 파인 한 지점에서 급정거했다. 거기에는 울창한 산림이 있었다. 우리는 차에서 차례차례 내렸다. 맨 앞에 러시아인 촌장이 서고, 통역하는 양 씨와 내가 그 뒤를 따랐다. 눈앞을 키를 넘는 머위와 엉겅퀴의 덤불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속으로 헤치고 들어가자, 햇빛이 차단되면서 주위가 어두컴컴해졌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래도 짐승이 다니는 길처럼, 가늘고 희미한 길이 있는 듯 없는 듯 나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우리의 ‘절대 확실’ 씨였다.
  “어, 사람이 지나간 자국이 있는데요.”
  그는 자못 감탄한 듯이 소리쳤다.
  “옳습니다.”
  러시아인 촌장이 잽싸게 흥분한 듯한 큰 목소리로 응했다.
  “여자 분이 지나갔죠.”
  러시아인 촌장은 한 노파가 10년간― 혹은 훨씬 그 이전부터였을지도 모르지만― 이 산림 속으로 혼자 들어가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고 말했다. 이 몇 년 동안 그녀는 눈에 띄게 늙었고, 머리카락은 하얀 눈처럼 변해 버렸다. 그 머리가 아직 희끗희끗한 상태였을 때, 그녀가 사람의 눈을 피하듯 등에 뭔가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나무 사이로 사라지는 것도 보았었다 한다. 그때 그는 자기 고향을 지켜야겠다는 신성한 의무감에서, 커다란 의혹에 사로잡혔었던 것이다. 어쩌면 국유 재산을 숨기거나 땅에 묻으려고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그 의혹이 풀리자, 그녀를 보는 촌장의 눈이 존경과 동정으로 바뀐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콜호스의 농장으로부터 멀리 그녀를 볼 수 있는 날을 낙으로 삼게까지 되었다. 만일 젊은 시절에 만났었더라면 구혼했었을 지도 모른다, 하고 망상한 적도 있었다.
  그 비현실적인 꿈도, 요 몇 년 동안은 그녀의 건강을 염려하는 노인스러운 심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가 예전에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왔었는데― 겨울에는 안 왔지만― 올해는 아직 한 번밖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기는, 허리가 구부정해진 그녀의 모습을 본 것은 바로 일 주일 전이었지만.
  우리는 모기떼에게 시달리면서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이 전진했다. 갑자기 주위가 밝아졌다. 그리고 그 직후 우리는. 눈앞에 자그마한 공간이 나타난 것을 구원처럼 느꼈다. 그 공간은 겨우 사방 3미터 정도의 넓이밖에 되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머위라든가 얼룩조릿대를 베어 내고 다져서 만든 것이 분명했다.
  “뭘까, 이게?”
  내 시선은 발밑에 있는 이상한 물건으로 쏠렸다. 그 거무스름한, 삼각형 지붕이 달린 물건은, 작은 개집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개집으로서는 가장자리 틀도 없었고, 이끼가 낀 지붕은 그 중심부를 한 개의 말뚝이 지탱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나무 우산 같다는 엉뚱한 이미지조차 갖게 했지만, 다음 순간,
  “비(碑)다―.”
  하고 나는 숨을 돌이켰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시달리고, 까맣게 썩어 가기 시작하고 있는, 누군가가 만든 묘비명이 없는 그 물건은. 처음에는 개집이라는 온당치 못한 상상을 불러 일으켰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만한 물건을 온 정성을 다해서 만들어 낸 인간의 집념으로 가슴에 와 닿았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선 채, 잠시 동안 감동의 회오리에 휩싸여 있었다. 그때 우리는 이 세계에서 가장 작은 비 앞에, 노랗게 시든 세다이 갈대의 꽃다발이 흐트러져 있는 것을 동시에 보고 있었던 것이다.(*김춘미 옮김)                               

                                                    서울 [라뿔륨]지 제공


이회성(李恢成): 1935년 2월 26일 일본령 樺太의 眞岡에서 출생. 일본 와세다대학 러시아문학과 졸업. 1969년 6월 <다시 두 번째 길로>로 [군상]지 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등단. 1972년 소설 <다듬이질 하는 여자>로 아쿠타가와 문학상 수상. <우리 청춘의 길목에서>, <죽은 자가 남긴 것>, <증인이 없는 광경>, <伽倻子를 위하여>, <靑丘의 하숙집>, <반쪽바리>, <人面의 大岩>, 장편 <약속의 토지>, <流民傳>, <다 꾸지 못한 꿈>, <사할린으로의 여행>, <유역으로>, <아리랑의 노래>, <북이든 남이든, 나의 조국>, <백년 동안의 나그네>, <死子와 生子> 등 장 · 단편 다수 발표.

◇김춘미: 1943년 생. 이화여대 영문학과 및 외국어대 대학원 일본어과와 고려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현재 고려대 일본문학과 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