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해외문학상 대상 시부문수상작-리진(러시아)/ 소설부문수상작 -박미하일(러시아)

 

[시부문 수상작] 날짜 : 08-01-07 20:33     조회 : 652   

작설차를 따끈히 달여놓고

-리  진


오늘밤도
작설차를
따끈히 달여놓고
나를 불러라

오늘밤도
단 둘이 마주앉아
그윽한 향기 숨박질하는
김을 불면서
찻잔으로 손을 녹이자

지난 며칠
지난 세월
지난 천 년을 오늘밤도
띄엄띄엄
인색한 말로나마
다시 또다시 더듬어 보자

신화들이 허물어진
숙대밭에도
숫된 꿈은 살아 있어
그 날개는
너와 내가 이미 없을
먼 시공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젯날의 포로 노릇은
우리 몫이 아니다
내일로만 살지도
그 언제도 하지 않았다

우리 가슴에서는
오늘에 웃고 오늘에 우는 버릇을 타고난 심장이
지친 피에 늘 네 굽을 단다

보지 않고 지나칠
남의 일이라고는
어제 없었고
오늘도 없다
여옹의 베게 같은 것을
탐내어 보지도
너와 나는 않았다

우리의 밤은 늘
가로 세로 만 리를 퍼져나간
온 세상이
복판에 자리잡고는
괜히 가쁜 숨에
지치게 한다

그러나 한 마디 말이
백 마디를 대신하고
눈짓 하나가
때로 천 마디 말을 하여도
새지 않는 날이란 없다

오늘밤도
작설차를
따끈히 달여놓고
나를 불러라


리 진 : 1930년 출생. 1950년대 초 문단 데뷔. 시집, 소설집, 평론집 등 다수. 모스크바에서 작고



[소설부문 수상작]

기다림

-박미하일
 

 열차는 지나갔다. 한동안 대기 속에 묻어나던 속삭임 같은 바퀴 소리도 잦아들었다. 수화물을 실은 긴 수레도 절커덕이며 창고 안으로 사라지고 풀렛폼(platform)은 다시 텅 비어졌다.
  자그마한 잠지가게에 할 일없이 앉아있던 뚱뚱보 아줌마가 풀렛폼을 재이듯 걷고 있는 벙거지를 쓴 한 사내를 멀거니 쳐다본다. 닳아빠진 양복은 잦은 다리미질에 솔기가 번들거리기는 해도 단정하고 깨끗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낮고 반듯한 천장과 함께 네모난 창으로 비춰드는 아침 햇살이 정
  …홀아비… 나이는 한 55세가량… 사무실에 붙박여 있는 말단 사무원… 와이셔츠는 어지간히 세탁을 했구나. 실오리가 다 드러나게… 넥타이는 할아버지 궤짝에서 꺼냈나. 고무줄에 유리 알 전구… 그래 맞았어. 틀림없이 홀아비야. 아마 신문 광고를 통해 어떤 여자를 소개 받은 모양이지…
  …  사랑을 나누면서 서로 의지하고 새 살림을 차릴 내 인생의 친구께 순정을 바치련다? 흥… 퍽으나 외로웠던 모양이군. 비쩍 말랐는데… 그런데 여자는 오지 않고… 올 턱도 없지… 이 사람아, 집으로 돌아가게. 빗방울이 떨어지는데 젖지 말고?…
  아줌마는 제 딴에 그럴듯한 추리가 대견한지 피식 웃고는 긴 숨을 내쉬고 콧등에 안경을 올려놓고는 잡지 장을 뒤적인다.
  사내는 기다림과 서글픔이 가득한 얼굴로 철길이 사라지는 이쪽저쪽을 두리번거리면서 어느새 비가 내려 옷이 젖어들고 손에 든 신문지에 싼 꽃이 젖는 것도 모르는 듯하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아니면 오렌지 유니폼을 입은 철도종업원이 철로를 두드리며 지나가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며 멈춰 섰다. 그는 짤막한 쇳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타, 그는 차량에 가득 실려 있는 낙타를 발견한 것이다. 차량의 밀어 제친 입구 밖으로 비죽이 나온 낙타주둥이에 시선이 끌렸다. 낙타들은 사내에게는 눈길도 돌리지 않고 역 청사 위를 지나 저 멀리 떠가는 구름을 보고 있다. 한 차량에 열 마리 이상 실린 것 같다. 빈 주전자를 든 사내아이가 러닝바람으로 차량에서 뛰어 내린다.
  사내는 그를 불렀다.
 「얘, 꼬마야 저게 뭐지?」
 「낙타입니다.」
  사내아이는 굴러 떨어진 주전자 뚜껑을 주우며 검게 그슬은 얼굴을 들고 이상하지 눈썹을 추켜올린다.
 「보고도 모르세요.」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플랫폼 바닥에 구렁이처럼 이지 저리 구불어 늘어져 있는 물파이프 쪽으로 간다. 꼭지를 틀자 물이 쏟아진다. 주전자를 대고 물을 받으며 다시 의아한 눈길로 사내를 돌아다본다.
  주전자를 들고 돌아오는 사내아이에게 사내는 다시 물었다
 「저게 정말 낙타 맞지?」
 「그럼요, 등에 난 혹 보이잖아요?」
  사내아이는 별난 아저씨 다 보겠다는 듯 이상하게 훑어보며 지나갔다.
 「흠…」
  사내는 그제야 머리를 끄덕였다.
  … 사내아이는 컵에 물을 따라 마시고 짚 위에 벌렁 누웠다가 머리를 돌려 다시 사내를 봤다. 이상한 아저씨는 아직도 낙타만 눈여겨보고 있었다.
  빗줄기가 주르륵거렸다. 플랫폼 바닥이 비에 젖어 꺼멓게 번들거리고 잡지가게는 더 조그맣게 오그라들어 보였다.
  사내는 벙거지를 벗어 빗물을 털어내고 아이가 누워있는 차량 곁으로 다가왔다.
 「너는 아마 낙타를 한두 번 다루는 게 아닌가 보지? 아까 보니까 이 높은 차량을 곧잘 오르내리던데… 어디서 오는 길이냐?」
 「타스보케트입니다. 낙타를 타스보케트에서 실어갑니다.」
  아이는 누운 채 대답했다. 사내의 머리와 아이의 머리가 그래서 나란히 있었다.
 「너는?」
 「저는 타스보케트에서 살아요.」
 「그렇군. 낙타가 꼬마 말을 잘 알아들어요?」
 「그럼요. 나도 낙타를 알아들어요.」
 「그래?!」
  사내는 감탄을 감추지 않고 낙타를 올려다봤다. 차량 절반을 판때기로 막고 한쪽에 낙타를 싣고 다른 쪽에는 사람들이 타게 되어 있었다.
 「꼬마, 몇 살이지요?」
  사내는 낙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열 두 살입니다. 아저씨 다 젖겠어요.」
 「그래…」
  사내는 수긍하면서 여태껏 손에 들고 있던 꽃을 이리저리 돌려보다 젖은 신문지를 벗겨냈다. 패랭이꽃 세 송이는 싱싱했다.
 「열차가 지나갔는데요.… 아저씨는 누굴 기다리세요?」
 「딸을 기다린단다.」
  한참 후에야 대답이 들렸다.
 「딸이 학교 다녀요?」
 「응? … 아니. 우리 딸은 어른이야, 이제는.」
 「그럼 몇 시 차로 온다고 알려드리지 않았어요?」
 「알려주지 않았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내 딸이야.」
  사내는 손등으로 빗줄기를 막고 수첩에 든 사진을 보여주었다. 햇빛을 듬뿍 받고 웃고 있는 계집아이였다. 챙이 나온 모자를 쓴 다섯 살 가량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
 「아…」
  사내아이는 알겠다는 듯 끄덕였다. 그가 가보지 못한 어떤 도시에 살고 있는 계집애의 집 마당. 사과나무 그늘 아래 같은 또래 계집애들이 조잘거리고 있는 듯. 사내아이는 왠지 이런 광경이 눈앞에 떠올라 어른이 되었다는 계집아이의 모습은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같이 안 살아요?」
  사내아이는 넌지시 물었다.
 「그렇게 됐다.」
  사내는 어색한 웃음을 띠며 수첩을 닫아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때로는 그 애가 찾아올 것만 같아서 이렇게 역에 나와 기다린단다. 난 그 애를 꼭 알아볼 수 있어. 음, 그렇구 말구…」
  그의 음성은 딸리고 있었다. 젖은 모자 위에서 여전히 빗방울이 춤추고 있었다. 모자에 맞은 빗방울은 사내아이 얼굴에까지 튀겼다.
 「여기 올라오세요. 다 젖으셨네요.」
  사내아이가 걱정했다.
 「난 높아서 올라가지 못하겠다.」
  사내가 대답했다.
 「여기 사다리 있어요.」
  사내아이는 튕기듯 일어났다.
 「그만 둬. 비는 맞아도 괜찮다.」
  사내는 서글픈 미소를 띠며 먼저 자기를 가리키고 다음에 사내아이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어 헝클어 놓으며 말을 계속했다.
 「나처럼 50살이고 꼬마처럼 열두 살이면 비가 두렵지 않지. 그렇지?」
 「그래도 올라오세요. 보온병에 뜨거운 차도 있는데요.」
 「차? 좋지. 그럼 차라리 우리 집으로 가자. 가서 커피 마시자. 우유 탄 커피 말이다. 여기서 멀지 않아. 전차 타고 네 정거장 지나면 되거든.」
  사내는 눈을 찔끔하면서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못 갑니다. 이제 곧 브리가지르 아저씨가 오면 우린 떠납니다.」
  사내아이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 그럼 어쩔 수 없지.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우리 집 커피 맛 죽여준다… 그렇지. 꼬마야 갔다 오는 길에 우리 집에 들르렴」
  사내는 금시 생기를 띠며 수첩 장을 뜯어 주소를 적어준다.
 「꼭 와야 한다.」
 「가겠습니다. 저 아저씨하고 같이 가겠습니다.」
  사내아이는 차량 속 어둑한 곳에 잠들어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좋아. 꼭 약속하는 거다.
  사내는 정겹게 아이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움푹 패인 얼굴 주름사이로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낙타를 올려다봤다. 낙타는 여전히 저 멀리 하늘을 멀거니 쳐다봤다. 사내는 역장(정거장)으로 걸어 나왔다
  사내 모습이 사라지자 사내아이는 또박또박 알아보게 쓴 주소를 읽어보고 바지 주머니에 아예 실로 꿰매 붙였다.
  사내아이는 짚 위에 앉아 빗속을 눈여겨보며 사라진 사내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그이는 아마 모자에 묻은 빗방울을 털고 또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는데…….
  사내가 놓고 간 패랭이꽃은 집 검불 위에 빨간 핏빛을 발하며 싱그러움을 주었다. 비는 그대로 쏟아지고 있었다.(*)                            이정희 작가 옮김


박미하일 : 1949년 8월 14일 우즈베크스탄의 타슈켄트에서 출생. 타지기스탄 미술대 유화학과
졸업. 1976년 단편소설 <사울레느>발표. 단편집 <별이 떨어지다>, 중편 <밤샐 무렵>,<검은
색의 독수리>, 장편 <천사들의 기슭>, <하얀 닭춤>, <해바라기 꽃잎 바람에 날리다>(서울출판사) 등 다수. 1997년 러시아 최고 Burker문학상 후보작 선정. 1998년 러시아 이주. 러시아작가
협회 회원. 러시아미술가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