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해외문학상> 대상 수상작 시 -이창윤(미국)/ 소설 -김길호(일본)

 

제7회 해외문학상 시부문 수상작 날짜 : 08-03-11 03:41     조회 : 876 

<시월의 시>

                                        이 창 윤

시월이었을 것이다.
캐나의 혼인잔치에서
사람이 만든 술에 거나해진 하객들이
신이 빚은 좋은 술로 다시 취하는
그 즐거운 기적이 일어난 것은
아마도 시월 달이었을 것이다

바다처럼 일렁이는 저 누런 들판과
언덕에 비스듬히 자리 잡은 포도원
넝쿨에 달려있는 까만 포도송이들도
저 시월의 햇살 아래서
술이 되고 싶을 것이다, 더 잘 삭아서
신이 빚는 좋은 술이 되고 싶을 것이다

해바라기 밭 위에서 출렁이던
<반 고호>의 눈이 잡은 그 햇살을
캔버스에 옮겨보려다가, 온 세상을 물들이는
저 시월이 빚은 술에 나도 취하여
잠시 잠이 든 모양이다
새 몇 마리가 하늘 한 자락을 물어다
나를 덮어주고 있다


* 이창윤 : 경북 대구 출생. 66년 「현대문학」 추천완료. 시집 「잎새들의 해안」, 「강물은 멀리서 흘러도」. 「다시 쓰는 봄 편지」 등. 2004년 「해외문학상」대상 수상. 현재「해외문인협회」회장.


제7회 해외문학상 소설부문 수상작

<이쿠노 아리랑>

                                  김 길 호


      이발관의 빨강․파랑 간판처럼 봉투테두리를 그렇게 화려하게 인쇄한 A4 사이즈의 항공 봉투 우편물을 받고 송명근 교수는 놀라움과 호기심 속에 가위로 봉투 윗 부분을 잽싸게 잘랐다.
서울에서 다큐멘터리와 뉴스 방송을 전문으로 다루는 케이블 티뷔 사장인 유성호가 보내온 것이었다. 그는 대학 동창이었다. 송 교수는 봉투 속의 우편물을 꺼냈다. ‘재일 동포의 삶’이라는 표제 속에 서울에서 개최하는 사진전의 선전 팜플렛과 사진 몇 장이 들어있었다. 송 교수는 몇 장 안 되는 팜플렛을 대강 훑어보면서 넘겼다.
재일 동포 서민층의 일상 생활들의 한 순간들을 포착한 사진들이었다. 한국적인 시장 풍경, 선술집, 식당, 슬리퍼와 구두 가공하는 공장과 거주를 겸용한 가정집 등등이 전부인데 중류사회의 삶의 현장의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사진 속에 일본어 간판이나 생활 필수품으로 사용하고 있는 일본어 상품들이 덤으로 찍히지 않았다면 한국이라 해도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한국 출신인 40대 사진 작가의 사진전이라고 써있었는데 그는 일본어 간판이나 상품들을 덤으로 넣은 것이 아니고 사진의 구성 요소로써 치밀한 계산 속에 의식적으로 일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송 교수는 따로 동봉된 사진을 보았다.
70대가 아니면 80대의 할머니가 종이상자를 모으면서 유모차에 싣고 가는 연속 사진 다섯 장이었다.
송 교수는 팸플렛 맨 앞장에 끼어 있는 유 사장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전화로 사전에 알리려다가 그만두고 우선 자료를 먼저 보낸다는 내용인데, 사진전은 별로 대수롭지 않았으나 동봉하는 할머니의 사진 밑에 부제로써 ‘생존을 위한 할머니의 나들이’라는 표현도 그렇지만 이 사진이 매우 인상적이었으며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촬영지가 오사카 이쿠노(生野)라고 명기되었는데 자네도 지금 이쿠노에 거주하고 있으니까 이 사진의 주인공을 한 번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진 설명처럼 할머니의 삶이 생존을 위해 일본에서 사회 저변을 헤매고 있다면 다큐멘터리 방송 한 편을 만들고 싶다면서, 우선 이 자료들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송 교수는 다시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수건을 쓴 사진이기 때문에 증명 사진처럼 뚜렷이 얼굴의 윤곽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딘가 낯익은 얼굴 같기도 했으나 그것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나이테 같은 주름살과 수건을 쓴 전형적인 우리 한국 할머니들의 모습에 익숙해진 선입감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송 교수는 난감했다. 참으로 어려운 부탁이었다. 아무리 자기가 이쿠노에 산다고 해도 이쿠노 구민 약 14만 명 중 재일 동포가 약 3만 5천 명인데 그 속에서 어떻게 이 사진 주인공을 찾는단 말인가. 이쿠노쿠(生野區)에 뿌리 내려서 사는 것도 아니고 이곳에 와서 겨우 3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송 교수는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였다. 나이 60을 바라보고 있지만 퇴임 전에 우리말 방언을 연구하기 위해 6개월 예정으로 이쿠노에 와있었다. 방언을 연구하려면 그 지방 산골에 가서 조사해야지 왜 외국까지 가느냐고 모르는 사람들은 대뜸 반문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방언만이 아니고 언어란 것이 시대와 더불어 변화하고 꿈틀대며 공존하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생물이므로 국내에서는 미디어의 동시성으로 인해 많은 방언이 사라지고 있기 때에 그 대상을 동포가 많이 살고 있는 일본을 택했었다. 새로운 우리말이 완전히 단절된 일본의 동포사회에서 1세들이 구사하는 우리말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방언의 화석 지대였다. 송 교수는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녹음기를 들고 이쿠노쿠만이 아니고 오사카 전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오사카에서도 한계를 느꼈다. 본국인 한국인들의 왕래가 이웃집 드나들 듯 빈번하다니 어느 사이인가 방언은 주눅든 채 꼬리를 감추고 있었으며 나이 많은 1세 동포들이 부끄럽다고 송 교수 앞에서도 사투리 사용을 꺼려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국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방언의 보물섬처럼 풍요했지만 송 교수는 내친 김에 더 욕심을 부려 한국인들과 왕래가 뜸한 동포들을 찾아 홋카이도(北海島)나 시코쿠(四國)로 떠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유 사장으로부터 난데없는 편지를 받게 되었다. 송 교수는 우편물을 가방에 넣고 밖으로 나와서 자전거를 타고 ‘메아리’ 다방으로 달려갔다. 5분도 채 안 걸렸다.
“안녕 하십니까.”
송 교수가 다방 안으로 들어서면서 카운터에 있는 남자주인 박용주 씨와 부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세요”
그가 웃으면서 반갑게 맞았다.
“안녕 하세요.”
부인이 물수건과 물 컵을 갖고 왔다.
“커피 주십시오.”
송 교수는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면서 차를 주문했다. 오후 3시를 넘은 늦은 오후여서 손님은 두 사람밖에 없었다.
“오늘은 나가시는 길입니까? 아니면 돌아오시는 길입니까?”
박씨가 물었다.
“그것도 저것도 아니고 오늘은 마스터한테 볼일이 있어서 집에서 나오는 길입니다.”
“저에게요?”
박씨가 의외라는 듯이 되물었다.
“네. 마스터께 다시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송 교수는 부인이 갖고 온 커피를 저으면서 말했다.
송 교수가 서울대학교에 유학온 이쿠노 출신의 제자 소개로 조그마한 아파트를 빌고 처음으로 들른 다방이 여기였다. 아파트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것도 그렇지만 다방 이름이 「メアり」라고 일본어의 카타카나로 쓰고 그 밑에 한국어로 조그맣게 ‘메아리’라고 써 있어서 반가웠다. 그때도 한가한 오후여서 손님이 없어서 안성맞춤이었다. 50대 부부가 경영하는 다방인데 자기들은 동포 2세라고 했다. 송 교수는 자기 소개를 하면서 방언 연구차 왔으므로 1세 노인네들을 소개해 달라고 했더니 박씨는 자기 부모들도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면서 바로 그날 안내해줘서 여러 가지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쿠노에서 돌아다니려면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더 좋다면서 자기네 집에 자전거가 넉 대 있는데 한 대 빌려줄 테니까 이곳에 있는 동안 사용하라고 빌려주기까지 했으며, 경상남도 출신인 그들은 제주도 전라도 등 각 도의 노인네들의 집까지 찾아가서 안내해 줬다.
“언젠가 신문에서 봤지만 일본어 방언을 연구하는 일본인 국내 학자들은 브라질이나 페루에 가서 조사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 있습니다.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도 이민 간 일본인들이 많지만 그곳에는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처럼 들락거리기 때문에 일본과 다름없어서 브라질이나 페루로 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쿠노도 지금 그렇게 급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별로 그 말의 의미를 잘 몰랐지만 1,2개월이 지나는 사이에 송 교수는 그 말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 씨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한국에서 오는 한국인들과 별로 접촉 안 하는 노인네들을 구석구석까지 돌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송 교수는 박씨와의 만남을 구세주 만남처럼 기뻐했다. 서로 시간 있을 때는 이자카야(居酒屋:선술집)나 박씨 집에서 아니면 송 교수의 아파트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면서 여러 가지 얘기들을 나누는 동안에 비록 박씨가 나이는 적지만 이쿠노에서는 후견인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이가 되었다. 송 교수는 그래서 오늘도 유 사장의 편지를 보고 망설이다가 대뜸 이곳을 찾았다.
“혹시 이 할머니 보신 적 있습니까?”
송 교수 맞은 편에 와서 앉은 박 씨에게 사진을 내밀면서 물었다.
“수건 때문에 잘 모르겠지만 많이 본 얼굴 같기도 합니다만…”
박씨가 다섯 장의 사진을 번갈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사진들을 보면서 그렇게 갸웃거리십니까?”
부인이 서툰 우리말을 하면서 남편 곁에 앉아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아니! 이 할머니는 누구 아닙니까?”
부인이 깜짝 놀라면서 외쳤다.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외침에 송 교수와 박씨는 더욱 놀랬다.
“누군데?”
남편이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왜, 송 선생님과 함께 찾아가지 않았습니까? 다카야마 쇼오텡(高山商店)의 고 하르모니입니다.”
부인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아, 맞다 맞아. 그래서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구나. 송 선생님. 이 할머니는 바로 맹지루 할머니입니다.”
박씨의 맞장구를 안 들어도 송 교수도 기억났다.
그는 테이블 위의 사진을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수건에 가려져서 그렇지만 얼굴 전체 윤곽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왜 다카야마 쇼오텡의 고 할머니가 종이상자를 모으는 사진의 주인공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맹지루 할머니.”
송 교수와 박씨는 고 할머니를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불렀다.
지난 2월 초순. 송 교수가 이쿠노에 와서 1주일도 안돼서 만난 제주도 할머니였다. 박씨의 안내로 죠센 이치바(朝鮮市場) 상점가에 있는 고 할머니 가게에서 만났다.
“이 상점가의 정식 명칭은 미유키모리 쇼오텡가이(御行森商店街)라고 합니다. 속칭으론 죠센 이치바라고 모두 부르고 있는데 최근 몇 년 전부터 한일 매스컴들이 코리안 타운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면서 일반화되었습니다. 그러나 해방 전부터 죠센 이치바라고 알려진 곳이어서 이곳을 잘 아는 사람들은 지금도 모두 죠센 이치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재일 동포의 발상지가 이쿠노이며 이쿠노의 원점이 바로 이곳입니다. 그래서 애착을 갖고 있는 속칭으로서 재일 동포의 상징적인 시장이며 장소입니다.”
박씨가 고 할머니 가게로 안내하면서 설명했다. 송 교수는 틀어놓은 녹음기를 확인하면서 상점가를 눈여겨보았다. 죠센 이치바라는 명칭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한국적인 시장이었다. 여러 종류의 김치를 파는 식료품점․한복집․식당, 삶은 돼지고기와 족발을 늘어놓은 어느 정육점 앞에는 제주도의 커다란 돌하루방도 있었으며, 태극 마크가 새겨진 가로등과 상점가 입구에 세워진 한국식 기와집 입간판에는 단청까지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으며 코리어 로드라고 영어로 표기되어 있었다.
“저 가게입니다.”
박씨가 걸어가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을 쳐다보았다.
한자로 고산 상점(高山商店)이라고 간판이 걸려있는 2층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나이 많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내외가 콩나물을 다듬다가 일어서서 맞이했다.
“오전에 전화로 말씀드렸던 송 선생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박씨가 오전에 전화했더니 오전에는 준비로 바쁘니까 별로 손님이 없는 오후 2시경에 오라고 했었다. 전화로 설명했던 송 교수의 방문 목적을 그가 되풀이할 때 송 교수는 가게 안을 잠시 훔쳐보았다.
상점은 밖에서 본 느낌과는 달리 안에 들어서니 꽤 넓었다. 10여 평은 족히 될 것 같았다.
배추김치로부터 깍두기․부추김치․콩나물․깻잎․마늘장아찌․상추․인삼차․김․오징어젓․신라면 등 한국의 전통적인 식료품은 물론 한라산 소주․진로 소주․참이슬 소주와 일본의 참기름과 혼다시들도 팔고 있었다.
박씨의 소개가 끝나자 송 교수가 정식으로 다시 인사를 했다.
“송명근이라고 합니다.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 생님 말씀처럼 한국어 사투리를 조사하러 서울에서 왔습니다.”
송 교수는 두 분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할아버지께 명함을 드렸다.
“저는 모리하시 마나부(森稿 學)라고 합니다. 일본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어도 모르지만 사투리는 더욱 모릅니다.”
할아버지가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말하면서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한자로 ‘한국 식료품 고산 상점’, 그 밑에는 주소와 전화 번호가 써있었다.
“할아버지가 한국어를 참 잘 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송 교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이었다. 비록 더듬거리기는 했으나 일본어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다.
“저는 고을생이라고 합니다. 사투리 조사하러 일본까지 오시다니.  처음 듣는 말입니다.“
할머니가 살며시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한국에는 사투리가 점점 없어지고 있기 때문에 일본까지 왔습니다. 그러니까 많이 가르쳐주십시오”
“원 선생님 말씀도, 사투리는 고사하고 우리말도 잊어버리고 일본말도 제대로 못하는 제가 어떻게 선생님을 가르칩니까?’
“할머니 그건 간단합니다. 저와 얘기 나누시면서 제주 사투리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송 교수가 웃음 띄우면서 다시 녹음기를 확인했다.
“제주 사투리로 말이우꽈…, 우선 우리 집에 오신 손님이시니까 차라도 준비해야 되겠습니다.”
송 교수와 박씨가 사양해도 할머니는 안으로 들어가고 할아버지가 의자 두 개를 갖고 와서 앉으라고 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어디서 한국말을 배우셨습니까?”
송 교수가 의자에 앉으면서 물었다.
“저요? 허허허.”
“모리하시 할아버지 대단하십니다. 10여 년 전부터 민단에서 가르치는 한국어 강좌에 빠지지 않고 나가십니다.”
말끝 흐리는 할아버지 대신해서 박씨가 끼어 들었다.
할아버지는 집에서 독학으로 한국어를 공부하다가 10여 년 전부터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I주일에 한 번 밤에 민단에서 가르치는 한국어 강좌에 나간다고 했고, 자기도 고등학교까지 민족 학교를 나왔지만 그곳에서 할아버지를 알게 됐다고 박씨가 덧붙였다.
“한국에서 오신 분한테 안 됐습니다만 인삼차 갖고 왔습니다.”
할머니가 4인분의 차를 갖고 와서 콩나물 다듬던 탁자 위에 놓았다.
“할머니, 인삼차 얼마나 좋습니까. 바쁘신데 와서 차까지 대접받고, 정말 죄송합니다.”
송 교수와 박씨가 머리 숙였다.
“김치와 장아찌들도 할머니가 손수 담그십니까?”
송 교수가 차를 들면서 물었다.
“나 혼자만 하지 않고 할아버지도 같이 합니다.”
“그렇습니까. 두 분께서 참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저 큰 유리병에 들어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송 교수가 진열대 모퉁이에 있는 유리병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저거 말이우꽈? 자리젓입니다. 서울 선생님이시니까 모르실 거우다.”
할머니가 어린애처럼 웃으면서 말했다.
“자리젓? 제주에서만 나는 자리 아닙니까?”
송 교수가 깜짝 놀랐다.
“선생님도 자리젓 아십니까?”
할머니가 의외라는 듯이 되물었다.
“저도 잘 압니다. 냄새는 좀 고약하지만 풋고추 찍어서 먹으면 얼마나 맛있습니까. 그것만이 아니고 자리물회는 최고 아닙니까. 제주에 갔을 때 많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도 자리가 있습니까?”
방언 조사나 가족 여행차 가끔 제주에 갔을 때 그곳의 아는 교수와 제자들이 권해서 먹었던 자리젓과 물회 그리고 그냥 썰어서 생마늘과 함께 찍어먹었던 맛은 잊을 수 없었다. 서울로 돌아올 때는 선물로 챙겨줄 정도로 자리통이 되었었다. 송 교수는 입맛을 다셨다.
“와카야마(和歌山)에서 납니다. 저도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할아버지가 거들었다.
“일본에서는 자리를 스즈메다이 혹은 오센이라고도 합니다. 5월 초순부터 9월 초순까지 납니다. 제주에서는 4월 중순부터 난다면서 비행기로 직접 갖고 와서 제주 향토 요리집만이 아니고 웬만한 한국 요리집에서는 거의 모두 자리 요리를 내놓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제주 향토요리가 아니고 이쿠노의 향토 요리가 돼버렸습니다. 저도 무척 좋아합니다. 4월 달에 제가 선생님을 안내하겠습니다.”
싱싱한 자리처럼 박씨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오사카에서 먹는 자리는 또 별미겠습니다. 그때는 꼭 부탁하겠습니다.”
송 교수가 박 씨를 향해 머리를 숙이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식료품들을 전문으로 판매하시면 지난 음력설 같은 때는 상당히 팔리겠습니다.”
송 교수가 가게 안을 다시 천천히 둘러보았다.
“음력설이 무신 뜻이우꽈?”
할머니가 송 교수를 쳐다보았다.
“규쇼가쓰(舊正月)입니다.”
송 교수가 어떻게 대답할까 하고 잠시 머뭇거릴 때 박씨가 일본어로 설명했다.
송 교수는 일본에 오기 위해 1년 간 일본어를 입시생처럼 맹렬히 공부했지만 규쇼가쓰라는 말은 몰랐었다.
“아, 음력 맹지루……”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맹지루……”
할아버지도 덩달아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네? 맹지루?”
송 교수가 깜짝 놀라면서 되물었다.
“네. 여기서는 음력 맹질을 잘 안 하니까 손님은 마찬가지입니다.”
할머니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송 교수는 1주일밖에 지나지 않은 음력설을 화제로 삼고 말을 꺼냈는데 난생 처음 듣는 ‘맹지루’라는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할머니. 처음 말하실 때에는 ‘맹지루’라고 하시던데 지금은 ‘맹질’이라고 하십니다.”
“제주에서는 맹질이라고 합니다만 여기서 난 사람들은 맹지루 맹지루 하니까 이것도 쓰고 저것도 씁니다.”
할머니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도 맹지루라는 말을 씁니다만?”
박씨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송 교수를 쳐다보았다.
송 교수는 맹지루․맹질․명절에 대한 단어를 간단히 설명하고 또 다른 얘기들도 나누는데 손님들이 종종 찾아오기 때문에 더 있을 수 없었다.
아쉬웠지만 다시 들른다면서 고맙다고 인사하며 나오는데 할머니는 집에서 양념해서 먹는 자리젓이라면서 풋고추와 함께 싸주어서 돈주겠다는 송 교수의 등을 막무가내로 밀어냈다.
그 후에도 송 교수는 할머니 가게를 몇 차례 드나들고 또 오사카 각 지역에서 동포들이 개최하는 야유회에 참석하면서 맹지루라는 사투리의 흐름을 조사했다. 맹지루의 어원은 명절이며 이것이 제주 사투리로써 맹질로 변화했고 그 맹질이 이곳에서는 맹지루로 다시 바뀌었었다. 이렇게 변하게 된 원인은 일본어로 어와 여, 그리고 ㄹ 받침이 없기 때문에 명절을 일본어 발음으로 쓰면 ‘묭죠루’라고 써야 하는데 이 발음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마치 귀여운 어린 아기와 뽀뽀할 때처럼 입술을 가운데로 모으면서 내밀어야 했다. 그런데 제주 사투리 맹질인 경우에는 ㄹ 받침과 받침으로써의 발음이 없기 때문에 ‘질’이라고 발음을 못하므로 그 글자만 따로 독립 시켜서 맹지루라고 표기하고 사용하고 있었다. 더욱 흥미 있는 현상으로 이쿠노를 중심으로 제주 출신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는 맹지루라는 사투리가 일반화되고 있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맹지루라는 사투리는 고사하고 명절이라는 단어마저 사어가 되어 일본어로 호오지(法事)라는 단어로 통용되고 있었는데 제사라는 뜻이다.
송 교수는 맹지루라는 새로운 방언의 발견을 어학적인 분석과 방정식처럼 풀어 나가면서 그 동안 조사했던 맹지루 사투리의 분포도를 메아리 다방에서 박씨 부부에게 자랑처럼 늘어놓았다.
“그럼 맹지루 사투리 1등 공신은 다카야마 상점의 고 할머니시네요.”
흥분 속에 커피 두 잔을 연거푸 마시면서 설명하는 송 교수에게 박 씨가 함박 웃음을 띄우면서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소개해 주신 마스터도 1등 공신입니다만 할머니는 고 할머니가 아니고 바로 맹지루 할머니입니다.”
송 교수는 박씨 부부에게 서울에서 온 편지를 읽어주고 사진전 팸플릿도 보여 주었다.
“할머니는 무엇 때문에 종이상자틀 모으고 계십니까?”
팸플릿과 사진을 번갈아 보는 박씨 부부에게 송 교수가 물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사진은 언제 사진입니까?”
“저희들도 모르는데 송 선생님이 아시겠습니까?”
박씨의 물음에 부인이 말했다.
“이 정도의 사진전을 열려면 꽤 많은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입은 옷들을 보니까 다 같은 계절입니다. 반소매와 외투차림들이 없는 것을 보니 여름과 겨울은 아닐 것입니다.”
송 교수가 팸플릿을 보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봄과 가을인데 할머니 사진의 배경이……”
박 씨가 중얼거리면서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아, 알았습니다. 가을입니다. 이 단보루에 써있는 글자들을 보십시오 여기에는 나시라고 써있고 이 단보루에는 부도라고 써있습니다.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나시는 배이고 부도는 포도인데 이 과일들은 가을에 나오니까 틀림없습니다.”
박씨가 자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종이상자를 한국에서는 골판지라고도 합니다만 여기서는 단보루라고 합니까?”
“네. 그리고 이 사진은 센다이(千代) 수퍼 뒤에 있는 공원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박씨가 센다이 간판을 가리키면서 설명했다.
센다이 수퍼는 송 교수도 알고 있었다. 죠센 이치바 입구에 있는 히라노카와(平野川) 바로 옆에 있는 수퍼인데 할머니 가게와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작년 가을에 찍은 사진들을 모아서 이번에 사진전을 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사진 설명에는 ‘생존을 위한 나들이’라고 써있습니다. 할머니가 이렇게까지 단보루를 모으러 다니지 않아도 될 텐데 말입니다.”
송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삿속 아닙니까?”
박씨가 묘한 웃음을 흘렸다.
“장삿속?”
“그래야 사진전이 활기를 띄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우리 1세 할머니들은 고생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단보루를 모으는 할머니들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만 그 분들이 못 살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버리는 단보루들이 아까워서 모으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 맹지루 할머니는 무엇 때문에 모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할머니가 무엇 때문에 종이상자를 모으는지 뚜렷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 사진의 주인공이 맹지루 할머니라는 사실을 안 것만도 큰 수확이었다.
송 교수는 그렇지 않아도 할머니에 대해서 많은 것을 듣고 싶었지만 그러한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자기 나이는 78세이고 남편은 81세이지만 이렇게 건강히 움직일 수 있는 한 가게는 계속하겠다고 여유 있는 웃음까지 보였던 할머니였다.
“마스터 덕분에 사진의 주인공을 알게 돼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나 깜짝 놀랐습니다. 맹지루 할머니의 사진이었다니. 무언가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직접 가서 알아보고 결과보고 하겠습니다. 그때는 ‘기요시’에 가서 제가 일본 자리물회를 사겠습니다.”
그러니까 10일 전이었다. 박 씨로부터 ‘기요시’에서 자리물회 시작했으니 먹으러 가자고 연락이 왔다. 원조 제주 향토 요리집 안내한다면서 박씨가 몇 차례 데리고 간 곳이 ‘기요시’였다.
맬국에서부터 몸국․호박 갈치국․조밥․보리밥․조배기(수제비)․맬젓․자리젓․제주옥톰 등 없는 것이 없었다.
“물만 일본물이우다.”
처음 갔을 때, 제주시 산지 출신이라면서 50대 마마가 농을 걸면서 방언 조사차 왔다니까 덥석 제주옥돔 한 마리를 서비스했다. 그곳에서도 많은 제주사투리를 듣고 자리물회 시작하면 꼭 연락하라고 했었다. 그래서 오늘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오늘 제주에서 갖고 온 자리인데 물도 제주물이우다.” 물회를 갖고 와서 마마가 말했다. “제주물?” “제주물이라니까 못 믿겠습니까? 특별히 3다수로 물회를 만들었으니까 제주물회 아니우꽈?” 마마의 걸작스러움에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 “얼마 없어서 일본 자리 나니까 그때 다시 옵서예.”
마마 얘기가 아니더라도 다시 ‘기요시’에 가서 송 교수는 자리물회를 먹고 싶었다. 송 교수는 테이블 위에 있는 사진과 팸플릿을 가방에 넣으면서 일어섰다.
“네. 잘 알았습니다. 깜짝 놀랄 얘기 많이 듣고 와서 저에게도 알려 주십시오.”
박씨가 문밖까지 배웅해줬다.
“저의 사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선생님이 갖고 계십니까?”
보던 사진을 내려놓고 할머니가 의외라는 듯이 송 교수에게 물었다. 할아버지도 번갈아 사진을 보면서 송 교수를 쳐다보았다. 3일 전. 메아리 다방을 나와서 송 교수는 할머니 사진을 찍은 센다이 슈퍼 뒷공원을 확인하고 할머니 가게에 들렀다. 조용히 여쭙고 싶은 말이 있으니까 쉬는 날이 아니면 가게를 닫고 나서 뵙고 싶다고 했더니 내일이 쉬는 날이지만 오늘밤에 오라고 했다.
송 교수는 과일 몇 종류를 사들고 찾아갔다. 할머니는 2층으로 안내하더니 삶은 돼지고기와 가오리회․김치 그리고 자리젓과 풋고추까지 정성 들여 차려놓은 상 앞에 앉으라고 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송 교수는 매우 송구스럽다면서 할머니가 갖고 온 맥주를 할아버지와 한잔 들고나서 조심스럽게 사진을 내놓았었다.
예상했던 할머니의 첫 물음이었다.
“갑자기 어려운 부탁해서 미안하네, 자네도 잘 아는 것처럼 재일 동포 방송물도 재탕․3탕으로 마구 찍어대고 내보내니 시청자들도 이제는 식상하고 있네, 그 할머니 꼭 찾아서 스토리가 될 것 같으면 연락 주기 바라네.”
어젯밤 걸려온 유 사장의 전화였다. 송 교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아직 엄두도 못 내고 있다고 발뺌을 했다. 석연치 않은 점이 타다 남은 연기처럼 송 교수 마음구석에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서울에서 보내 왔습니다.”
“서울에서?”
“네. 서울에서 사진전 하는데 할머니 사진이 들어있었습니다.”
송 교수는 유 사장한테서 보내온 편지와 팸플릿을 보여 드리면서 박 씨와 만난 얘기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할머니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셨습니까?”
다짐하듯 송 교수가 물었다.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진 찍는다는 말도 못 들었는데 말입니다. 3년 전에는 한국 텔레비전에 단보루 줍는 내 모습이 나와서 난리를 피우더니 이번에는 사진전입니까? 한국에서 온 사람들 너무 합니다.”
할머니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한국에서 취재 오신 분들 중에는 이렇게 본인의 허락도 없이 막 찍어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부탁 받기도 전에 안 된다고 화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잠자코 옆에서 듣고 있던 할아버지가 사진들을 보다가 천천히 우리말로 했다. 송 교수는 마치 자기가 그런 사람이나 된 것처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두 분께서 하시는 말씀 듣고 보니 저 역시 화가 납니다. 도저히 용서 못할 일입니다. 저도 한국에서 취재하러 온 한 사람으로서 사과합니다.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송 선생님이 사과할 문제가 아니우다. 이런 일도 있다는 말이우다. 그리고 사진 찍어도 좋은데 그걸 사실대로 설명하면 괜찮은데 자기네 마음대로 해석해서 선전하니 화가 납니다. 이거 음식을 앞에 두고 아무 관계없는 선생님한테 속상한 말해서 죄송합니다. 어서 드십시오”
할머니가 송 교수 잔에 맥주를 따랐다.
“아닙니다. 할머니 마음 저도 잘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져도 화가 납니다. 그런데 한국 텔레비전에는 어떻게 나왔었습니까?”
송 교수가 잔을 받으면서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할머니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3년 전. 서울 어느 TV 방송국에서 광복절 특집 방송으로 일본에서 취재한 것을 한국에서 방영했었다고 했다. 그 방송을 보고 제주에 있는 조카로부터 당장 전화가 걸려왔다. 고모님은 이쿠노에서 장사하시면서 잘 사는데 왜 힘겹게 유모차에 종이상자와 신문들을 모으면서 다니느냐고 묻더라는 것이었다. 가족들과 그 방송을 보았는데 고모님이 틀림없기 때문에 깜짝 놀라서 전화한다고 했다. 아나운서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나이 많은 할머니께서 고생하시면서 외국에서 산다는 내용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어렵게 사는 줄은 꿈에도 몰랐었는데 자기네한테 연락하면 고모님이 제주에 와서 살아도 좋고 아니면 생활비라도 보내겠다면서 나중에는 울면서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조카는 자기가 대학 다닐 때 어렵게 사시면서도 등록금 하라고 고모님이 종종 보내주신 은혜를 이번에는 제가 갚는다면서 전화를 가족 모두 바꾸어서 혼났다고 했다. 깜짝 놀란 것은 조카보다 오히려 할머니였다고 했다. 언제 어디서 찍은 모습인지는 몰라도 단보루와 신문 모으러 다니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운동 삼아서 그런다고 해도 조카들은 곧이 듣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운동은 꼭 그렇게 해야 하느냐면서 남의 눈도 있으니까 제발 그만두라고 난리였지만 지금도 계속 하니까 이번에도 한국에서는 그렇게 알려진 것 같다고 했다.
“저도 조카처럼 처음에는 왜 할머니가 단보루를 모으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지금 할머니 말씀을 듣고 보니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은 단보룰들은 어디에 사용하고 계십니까?”
송 교수는 ‘생존을 위한 나들이’라는 사진 설명에 심한 혐오감속에 연기처럼 피어오르던 석연치 않았던 감정의 여운들이 아침안개처럼 걷히고 있었지만 종이상자 행방이 궁금했다.
“단보루 말입니까?”
옆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듣고 있던 할아버지가 눈을 뜨면서 되물었다.
“네.”
송 교수가 활짝 웃으면서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고도모카이(子供會)에서 갖고 갑니다. 한국말로 어린이회입니다.”
할아버지가 맥주 잔을 들면서 살며시 웃었다.
“어린이회에서 갖고 가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국에도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에는 각 지역마다 어린이회가 거의 조직돼 있다고 했다. 한국 조선 일본이라는 국적이 필요 없고 민단·조총련도 관계없다고 했다.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이들이 회원이 되어 한 달에 한 번씩 일요일날 어린이들과 그 부모들이 단보루나 신문 그리고 헌 옷들을 모아서 폐품 업소에 판다고 했다. 값이 워낙 싸서 큰돈은 안되지만 그 돈으로 어린이들의 생일 선물도 주고 여름 방학 등을 이용해서 캠프도 가고 당일치기로 산이나 견학도 간다고 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각 지역별 어린이 대항 운동회도 개최하고 연말에는 며칠 간 초저녁부터 밤 11시까지 자기 동네들을 순회하면서 불조심하라는 구호 속에 방화 활동도 한다고 했다. 비록 서로 다니는 학교는 공립이나 사립, 민족 학교로 각각 다르지만 이웃이라는 가까움 속에 어린이들만이 아니고 그 부모들끼리도 서로 친목을 도모할 수 있어서 참 좋은 모임이라고 했다.
“약 20년 전에 언제나 김치 사러 오는 동포가 가게에 있는 단보루  필요 없으면 달라기에 몇 차례 주면서 어디에 사용하느냐고 물었더니 어린이회에서 모으고 있다고 하기에, 나도 한가한 때 주변 가게의 단보루들을 모았다가 주었습니다. 우리 가게와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동포지만 그때마다 차를 갖고 와서 싣고 갑니다. 자기네 아이들은 다 커서 성인이 되었지만 지금도 계속 그 모임에 참가하고 있답니다. 참으로 흐뭇한 얘기여서 어린이회 행사가 있을 때는 수고한다고 김치들도 그냥 주고 있지만 저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걸 한국에서는 전혀 모르면서 생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설명 끝에 이어진 할머니의 솔직한 말에 송 교수는 말을 잃고 아연했다.
일본에서 죽을 고생하면서 살아간다는 동포할머니의 상징처럼 방영된 한국의 TV나 사진전은 과연 무엇을 전하기 위한 메시지였을까.
할머니의 질 높은 풍요로운 삶의 가치를 가차없이 매도 시켜버린 그들의 행위와 기만성에 송 교수는 분노와 서글픔이 복받쳤다. 한국에서 방영되는 재일 동포 방송물의 저질성은 송 교수 자신도 보고 나서 괜히 시간만 소비했다고 짜증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건 TV만이 아니고 활자화된 출판물도 마찬가지였다. 흥미 본위의 내용물은 주간지 수준까지 떨어뜨리고 있었다. 국경의 개념까지 무너지는 이웃 동네의 삶처럼 재일 동포의 일상은 가까워졌지만 외국 취재라는 표면적인 선전 속에 건수 올리기에만 급급하고 있었는데 할머니의 말을 듣고 보니 더욱 그랬다. 할머니의 참된 삶의 조명은 고사하고 제멋대로 짜 맞추기 식의 과장과 왜곡 속에 시청자와 독자들을 속이고 그녀의 생을 엉뚱한 방향으로 클로즈업시키고 있었다.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보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정말 너무 했습니다. 그들이 할머니 말씀을 듣고 사실대로 전했다면 얼마나 흐뭇한 이야기가 되었겠습니까, 한국에서는 그렇게 좋은 어린이회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다만 차별 받는 얘기들만 하지, 저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할머니가 참 부럽습니다.”
“나도 자랑은 아니우다마는 이 나이까지 도울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라수다.”
“할머니는 아들 두 분이 계시다고 메아리 다방 주인이 말하던데 손자들이 어린이회 때는 더 많이 도우셨겠네요?”
“아니우다. 그때는 고도모카이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고 또 우리 아들들은 먼데 살고 있기 때문에 한 번도 도운 일이 어수다.”
할머니가 손을 내저었다.
“먼 데 살고 있다니 어디 사십니까?”
송 교수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작은아들은 홋카이도에 살고 있고 큰아들은 더 먼 데 살고 있습니다.”
“홋카이도보다 더 먼 데라니? 그곳이 어디입니까?”
할머니가 아무 말도 않고 물끄러미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키타 죠센(北朝鮮)에서 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키타 죠센이라면 북한 아닙니까?”
송 교수가 놀라면서 되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의외였다.
“할아버지는 일본 분이신데 어떻게 해서 큰아드님이 북한에서 살고 계십니까?”
송 교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떨떠름한 침묵이 세 사람 사이를 무겁게 흐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실례되는 질문을 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말씀을 듣다보니 두 분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이렇게 됐습니다. 제가 처음 말씀드린 저의 친구 유 사장 때문에 하는 질문이 아니라는 것만은 이해해 주십시오 어젯밤 그 친구한테서 전화 왔을 때도 오늘 두 분을 만난다는 말은 일체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 자신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솔직한 마음에서 드린 질문이므로 오해하신다면 제가 다시 사과하겠습니다.”
송 교수는 머리를 숙였다.
“오해는 저희들이 무슨 오해를 합니까.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마음은 다 이해하겠습니다. 또 우리가 선생님께 속이고 감추고 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만 우리들의 역사를 닦으려면 한이 없습니다. 그걸 새삼스럽게 선생님께 말씀 드려도 이제 다 산 인생인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할머니가 한숨처럼 쏟아내면서 오랜 침묵을 깨뜨렸다.
“홋카이도에 있는 아들은 우리 둘 사이에 아들이고 키타 죠센에 간 아들은 마누라의 전 남편 아들입니다. 당신, 이 기회에 당신이 살아온 인생, 선생님께 들려줘도 좋지 않을까. 이제까지 남한테 말해 본 적 없지만…….”
할아버지가 일본어로 조용히 말했다.
“나 살아온 거 마씀?…… 선생님 4․3사건 아십니까?”
할머니가 잠자코 듣다가 한참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4․3 사건을 모르는 한국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제주도만의 비극이 아니고 한국 역사의 비극입니다.”
송 교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할머니가 일어서서 부엌으로 가더니 맥주 두 병을 갖고 왔다. 할아버지가 병마개를 따고 맥주를 따르면서 말했다.
“맥주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많이 드십시오. 전 그만 하겠습니다만 한국 소주도 있습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고맙습니다.”
송 교수가 사양하면서 잔을 받았다.
“그 사태 때 저는 일본에 밀항으로 왔습니다. 스물 세살 때였습니다.”
할머니는 연어처럼 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갔다.
“저는 4․3 사건 때 그 해 정월에 태어난 아들과 남편, 셋이서 제주  시 건입동에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북 소학교 선생이었으며 시아버지는 삼양도 가물개에 살면서 개업의로서 소문난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해 1월 달과 2월 달에 삼양은 산에서 내려온 폭도들로부터 두 번이나 습격을 당해서 몇십 명이 죽었습니다. 그 사람들만을 죽인 것이 아니고 육지에서 응원 온 청년대도 그 사람들 편에 가담했다고 죽였습니다. 저의 시아버지 두 번째 습격 당한 다음날 청년대가 죽였습니다. 폭도들에게 약을 주면서 내통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시아버지의 말에도 약을 주었다는 사실은 그 폭도들을 살려 주었다는 것과 다름없다면서 죽였습니다. 이 벼락같은 참상에 저희들은 앞이 캄캄했고 분노에 치를 떨었습니다. 처음 습격 당했을 때 위험하니까 저희 집에 와 계시라고 해도 부상 입은 동네 환자들 놔두고 어딜 가느냐고 거절했던 시아버지였습니다. 산에 사람들한테 약을 준 것은, 약 없다니까 집에 불을 지르면서 내노라 했고 죽어 가는 사람 있는데 약 안 주는 의사는 인간도 아니라면서 죽인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약을 받은 그들은 시아버지를 죽이려고 했지만 그 약이 독약일지도 모르니까 살려 줬다가 나중에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고 해서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내통했다는 이유의 전부였습니다. 삼양 지서 순경들과 동네사람들은 사람 잘못 죽였다고 웅성거렸습니다만 청년대의 날뛰는 기세는 꺾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당신네 사상도 의심스럽다는 그들의 한 마디에 저의 시아버지는 완전히 빨갱이로 낙인 찍혔고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흐르는 눈물을 수건으로 훔치면서 할아버지가 마시다 남긴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 시절 저의 집 제사는 동네 제사였습니다. 제사 마친 다음날은 삼양지서 순경들로부터 삼양 소학교 선생들과 동사무소 직원, 동네 유지들을 모시고 우리 마을을 위해서 수고하신다면서 또 한 번 제사를 지낼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저의 시아버지가 빨갱이가 돼버렸습니다. 저의 남편은 그 후 얼마 안돼서 학교를 그만두고 며칠 나갔다 온다면서 갑자기 집을 비우고 열흘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남편이 시아버지 죽인 청년 대원 죽이고 피하다가 죽었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슴에서 불이 나고 반 미쳤습니다. 시아버지 복수를 위해 남편이 나선 것은 저도 똑같은 마음이니까 이해할 수 있었지만 며칠 사이에 끔찍하게 벌어진 일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몰랐습니다. 저도 죽이고 죽는다고 발버둥쳤습니다. 그때 시어머니나 시집 식구들은 이러다가 우리 모두 죽는다면서 우선 애기 어머니라도 어디 피해서 안정해야 된다면서 주선한 것이 일본 오는 밀항선이었습니다만 전 죽어도 그렇게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한 살배기 피붙이와 생이별하면서 살면 무엇 하느냐고 한사코 반대했습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집 식구들은 이것이 모두 살아날 수 있는 길이며 애기는 자기들이 키울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면서 멀리 피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걸레처럼 찢어지는 가슴 안고 밀항으로 일본에 왔습니다.”
잘 감겨진 실타래 풀 듯 할머니의 기억력과 감정의 표현은 어떠한 동요도 없이 50여 년 전을 빈틈없이 재현하고 있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1949년도 스물세 살 때 일본에 왔으니까 할머니 나이는 일흔 여덟 살이며 지금으로부터 54년 전 일이었다.
송 교수가 아는 4․3은 뉴스와 다큐멘터리 아니면 활자 속의 정보가 전부였다. 그 동안 몇 차례의 제주 방문 속에서도 화제에 오른 적이 없었던 4․3이 일본에서 할머니의 잊을 수 없는 생생한 체험담 속에서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리고 있었다.
“처음 일본에 왔을 때의 생활은 그때 저를 도와준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귀양살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제주도의 비극을 나 혼자 등에 지고 온 것처럼 친척이나 알고 지냈던 사람들은 등을 두드리면서 위로해 주고 보살펴 주었지만 솔직히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가슴은 더욱 터졌고 지금 생각하면 미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저는 날새기가 바쁘게 어금니를 꽉 물고 모든 것을 잊으려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애기 오줌 싼 것처럼 눈물로 베개가 매일 밤 젖었습니다. 한 살배기 아들 생각, 산으로 피하다 죽었다는 남편 시체는 고사하고 장사도 지내지 못하고 도망 온 죄책감과 저 때문에 시집이나 친정 집은 탈이 없는지 이 생각 저 생각 하다보면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눈물공양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삭일 수 없는 분노는 왜 시아버지와 남편이 그렇게 죽어야 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내일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너나 나나 모두 걱정하던 그 시절 서울도 아닌 말이나 키우라는 제주도 구석에서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공산주의가 무엇입니까. 가난하지만 평화스러웠던 마을을 난데없이 습격하여 죽이고 난 다음날은 그들과 내통했다고 다시 죽이는 미친 시대에, 민주주의다 공산주의다 하고 큰소리 한 번 지르지 않았던 저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그 억울함은 일본에 와서 더욱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전쟁에 진 일본인들은 다시 일어나서 잘 살기 위해서, 돈 벌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힘을 합해 일을 하는 것을 보니 너무 부러워서 질투까지 날 정도인데 해방되었다는 한국의 제주도에서는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밤낮으로 사람 죽이기에 혈안이 되었으니 이게 더 억울했습니다. 이건 사상싸움도 아닌 감정과 증오와 분노와 억울함의 복수로 반죽된 그야말로 범벅싸움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이쿠노에서 6개월 살았다고 했다. 그 사이 제주도와 모든 통신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 속에서 고향 소식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밀항 오는 제주사람들의 입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소문이 소문을 낳아서 어느 것이 진짜 소문인지 그 소문들을 쫓아다니다 보니 몸과 마음이 마른 오징어처럼 말이 아니었다고 했다. 살기 위해서 일본까지 왔는데 고향 소식 듣는다고 가족이나 자기에게 당장 도움될 것 하나 없는데 이러다가 자기까지 죽겠다면서 이쿠노를 떠나고 찾아간 곳이 제주 해녀들이 많이 살고 있는 미에켕(三重懸) 도바였다.
할머니는 제주에서 물질 한 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지만 어머니가 제주시 무근성에 살면서 해녀로 생계를 끌어왔다고 했다. 아버지는 낚싯배 두 척 가진 어부였지만 할머니가 중학교 1학년 때 밤낚시 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고 했다. 할머니는 학교를 그만둬야 했고 어머니는 물질을 해야 했다. 할머니는 남동생을 돌보면서 어머니의 물질과 몇 마지기 있는 밭의 일을 거들었다. 그것이 전부였지만 제주 해녀들이 있고 벌이도 괜찮다기에 그곳에 가는 제주사람들을 따라갔다고 했다.
“큰마음 먹고 그곳에 가니까 숨통이 트였습니다. 바닷가에서 자라난 제주 비바리 아닙니까. 헤엄은 자신 있었으며 귀동냥·눈 동냥으로 알고 있던 물질은 그곳에서 또 배우니까 금방 남들을 따라갈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마음 시원한 것은 그 망망한 바다 속에서 목청껏 외칠 수 있고 마음대로 몸부림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자기 위안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할머니가 처음으로 배시시 웃으면서 하얀 이를 드러냈다.
“나도 이 사람 살아온 이야기 가끔 들었지만 오늘처럼 자세하게 듣는 건 처음입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송 교수는 마음 놓였다. 어쩌다 할머니가 가슴 복받쳐서 더 이상 말할 수 없다거나 할아버지가 알았다면서 그만두라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데 그런 낌새는 전혀 없고 할머니는 신들린 무당처럼 계속 이어나갔다.
4․3은 많이 안정되어 아들 명훈이는 시어머니가 삼양에서 데리고 살고 있으며 같은 동네에 시집 간 네 살 손위의 시누이가 젖을 먹이며 키우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것과 남편 시체도 찾아내서 새로 또 장례식을 치렀다고 했다.
그 동안 소문만 무성해서 꽉 막혔던 제주 소식들이 여기저기서 들어왔다. 그때마다 가슴 미어지는 슬픔 속에서도 용기가 솟아났다. 일본에 온 이상 꾹 참고 돈을 벌어 제주에 들어가리라고, 위험하다고 주위가 말리는 날씨 속에서도 바다 속을 기웃거렸다. 그럴 때 6․25가 터졌다고 했다. 다시 죽는구나 하고 일이 손에 안 잡혔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주도가 제일 안전하다고 했다. 시내 무근성의 친정집 안채와 바깥채는 육지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으며 이미 군에서 제대한 동생과 어머니는 그들의 뒷바라지에 바쁘다고 했지만 두 살 밑의 시동생이 걱정스러웠다. 시아버지가 참변을 당했을 때도 위험하다고 내려오지 말라고 했던 시동생은 광주 전남 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전쟁터로 갔다고 했지만 그 전쟁도 끝났다.
“…… 그러던 어느 날 인편으로 시어머니와 시누이·시동생 편지를 함께 받았는데 청천 벽력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재혼하라는 편지였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 편지는 시동생이 받아쓰면서까지 가족 모두의 마음과 의견을 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6․25로 인하여 사상 조사는 더욱 심해져서 한국에 돌아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생각도 못할 일이며 가령 제주에 돌아오더라도 혼자 살 수 없으니까 그곳에서 꼭 결혼해서. 잘 살아 달라는 것입니다. 아들 명훈이는 자기네가 훌륭하게 키울 테니까 걱정 말라면서 말입니다. 우리들도 가족 한 사람 잃을 생각하니 가슴에서 피가 나지만 다 나를 위한 생각이니 이해하라는 겁니다.”
할머니는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송 교수도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얼른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찍었다. 할아버지도 우리말을 알았는지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쳤다.
“뒤 급해서 하던 일 모두 팽개치고 변소 가는 것처럼 일본에 나왔었는데 오면 안 된다니 기가 막혔습니다. 하루빨리 돌아가서 피붙이 때 헤어진 아들 명훈이도 키우고 살림도 챙겨야 하는데 일본에서 재혼하라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시집가족들의 마음이야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마는 감당 못할 충격이었습니다. 죽어도 제주에서 죽어야 했는데 얼마나 일본에 온 것을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물질하러 가서 해지는 저녁 노을 속에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노라면 그렇게 고향이 그립고 보고 싶은지 몰랐습니다. 제주에서 물질하러 바다에 간 어머니 기다리던 모습이 떠올라 목청껏 어머니를 부르다 보면 이제 여섯살 난 명훈이가 삼양바다에서 그렇게 나를 부르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그 자리에서 그냥 바다에 빠지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니면 모든 것 각오하고 자수해 한국에 돌아갈까 그러다가도 저 때문에 가족들이 피해를 입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이며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재혼하게 되었습니다.”
재혼한 남편은 경상도 출신인 동포였다. 재혼이라기보다는 동거 생활이었다. 솔직히 별로 마음 내키지 않은 재혼이었다고 했다. 시집에서 그렇게 자기를 아끼는 의미에서 재혼을 권해도 버티려고 했지만 주위사람들은 그게 아니었다. 당신 혼자 살다가 걸려서 한국 가면 모두 피해 입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눈 한 쪽 없든 다리 하나 없는 상대방이든 간에 우선 빨리 재혼해서 당당하게 일본에 살 수 있는 등록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어쩌면 시집 식구들도 그게 걱정돼서 재혼하라는 건 아닌지 섭섭했다. 가끔 그런 생각 들 때마다 세차게 머리를 흔들면서 시집 식구들에게 잘못했다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친정 어머니와 동생도 일본에서 재혼하라고 계속 연락이 왔다. 그래서 초조한 마음에서 재혼했다.
마침 성이 김 씨여서 서둘렀다고 했다. 남편은 건설 현장에서 뼈를 굳힌 사람인데 술을 좋아했다. 일 마치고 돌아올 때도 술이었고 일없는 날은 아침부터 술이었다. 1년이 지나서 아들을 낳았는데 일본에 와서 제일 기쁜 날이었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아들 이름은 명석이라고 자기가 지었지만 남편에게는 일부러 이쿠노까지 가서 지었다니까 무척 좋아하더라고 했다. 남편 속인 것이 몹시 마음에 걸렸지만 제주에 있는 큰아들이 김명훈, 작은아들이 김명석이니까 어디 가도 친형제나 다름없겠다고 했다. 그러나 아들 하나 낳아도 남편 술은 여전했는데 어느 날 얼굴에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일 마치고 동료들과 한 잔 마시면서 참을 수 없어서 한바탕 싸웠다고 했다.
“나쁜 놈들 말이야. 죠센 센소(조선전쟁. 6․25전쟁) 때문에 우리들 일도 바빠졌으니 죠센징 카네모토(金本)에게 간빠이(乾杯).”
하길래 몇 차례 두들겨 팼다고 했다.
남편은 일본 성으로 카네모토였는데 6․25 동란으로 일본 경기가 좋아졌다는 말은 할머니도 종종 들은 적이 있는데 설마 남편이 그 때문에 이렇게 싸울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 후부터 남편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술을 줄이면서 언제 자기도 독립하겠다면서 일하다가 토목 건설 현장에서 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몇 사람의 동료들과 생매장 당해서 죽었다고 했다.
“남편이 사고로 죽었지만 그건 그 사람의 운명이 아니고 저의 팔자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술주정뱅이라고 남들은 비웃기나 하던 남편이었습니다만 저에게 술주정해서 매 한번 때려본 적 없었습니다. 그러한 남편을 이용해서 등록이나 만들려고 했던 저에 대한 벌이었습니다. 죠센징이라고 차별 심했던 그때에 그 사람은 술로써 스스로를 달래다가, 6․25 때문에 우리 일도 많아졌다는 동료의 빈정거림에 참을 수 없어서 당하기만 하던 그가 처음으로 싸웠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제가 그러한 마음을 이해하고 오순도순 살지 못한 것이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몰랐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죽고 얼마 안돼서 도바를 떠날 결심을 했습니다.”
물질하러 갈 때마다 한 살밖에 안된 아기를 남에게 맡기는 것이 고통스러웠고 제주 해녀들도 물질할 때만 도바에서 살다가 다시 자기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의지할 곳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남편에 대한 죄책감과 언제까지 물질하는 것보다 아기와 언제나 같이 있으면서 그 아기를 잘 키우는 것만이 남편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서 5년만에 다시 이쿠노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 후 3년 간 남의 집 김치가게에서 일했습니다만 그 가게 주인이 김치가게 그만두고 한국식당을 하게 돼서 저는 따로 나와서 하꼬방 같은 집을 빌려 저 혼자 김치가게를 열었습니다. 그게 바로 이 집입니다. 그때는 비도 새고 집도 아주 작았지만 옆집을 사고 고치면서 이렇게 됐으며 그때 또 지금 옆에 앉은 이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설마 부부가 될 줄은 서로가 꿈에도 몰랐었습니다.”
할머니가 부끄럽게 웃으면서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이야기가 이제는 나한테까지 왔어. 그것 참 세월 빠르구먼. 마저 얘기하구려.”
지그시 눈감고 가끔 고개 끄덕거리면서 듣고 있던 할아버지가 살며시 눈뜨고 배시시 웃었다.
가게를 내서 얼마 안 있어 할아버지가 김치 사러 왔었다고 했다. 한두 포기 사는 것이 아니고 조그만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는 안 판다니까 돈이 아까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혼자 사니까 다 먹을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것저것 조금씩 넣어서 팔아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한 달에 두 번은 꼭 왔다. 할머니는 혹시 이 사람이 밀항자 잡기 위한 순경이 아닌가 하고 불안스러웠는데 다른 가게에서는 귀찮다고 이렇게 안 팔아 주기 때문에 여기에만 온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비오는 날 할머니는 아이가 아파서 가게문을 닫고 자전거 뒤에 아이를 태우고 막 나가려는데 할아버지가 왔었다고 했다. 그러면 자전거로 가지 말고 자기 차에 타라고 해서 병원에 같이 간 것이 부부가 된 직접적인 인연이었다.
할아버지는 두 번 결혼했지만 이혼해서 아베노크에 혼자 산다고 했다. 가끔 김치 사러 오는 것은 전쟁 때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한국인을 찾기 위해서 이쿠노를 둘러보다가 좋아하는 김치들을 사서 간다고 했다. 15년 전 일제가 망하기 전의 일이어서 무모한 짓인 줄 알면서도 이쿠노에 찾아가는 것은, 그가 오사카에 살다가 소집 영장 받고 일본 군대에 갔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이쿠노에 언제나 가고 있으며 그의 고향은 경상도이며 이름은 일본 명으로 스즈키 마사오(錦木政雄)라고 했다.
왜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그 사람만 찾느냐고 물었지만 그건 둘만의 비밀이라고 했다. 결혼 후에도 그건 변함이 없었고 스즈키라는 한국 사람 찾기는 계속되어 참다못해 할머니가 살림 갈리자고 했을 때 남편이 할 수 없이 그 이유를 말했다고 했다.
“그날 밤 우리 부부는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으며 그 때문에 생각지도 않았던 아들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흣카이도에 있는  아들 요시오(義男)가 그 아이인데 봉근 아들입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마주 쳐다보며 눈물을 닦았다.
“봉근 아들이라면 주운 아들이라는 말이십니까?”
송 교수가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
“네. 제주에서는 주운 아들을 봉근 아들이라고 합니다. 죽을병에 걸렸다가 살아났다던가 아니면 무슨 사고 속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아이들을 말할 때 쓰는 말입니다. 바로 그런 아들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할머니 그 말의 뜻은 모두 사용하니까 잘 알겠습니다만 그 말과 스즈키라는 한국사람 찾는 이유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것을 잘 모르겠습니다.”
송 교수는 더욱 모르겠다는 듯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봉근 아이라는 말은 히롯타 고도모(주운 아이)라고 일본에서도 사용하는 말이니까 이번에는 당신이 말하세요.”
할머니가 남편을 보면서 말했다.
“음……. 저도 말해야 됩니까?”
할아버지가 머뭇거렸다.
“내. 듣고 싶습니다.”
송 교수가 바싹 다가앉았다.
“음……. 말하겠습니다.”
할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희들의 부대는 만주에 있었습니다. 그때 스즈키씨와 저는 같이 훈련을 받고 만주로 전입했습니다. 스즈키씨는 노래를 잘 불렀습니다. 오락 시간이거나 휴게 시간 때는 물론 그는 기합 받을 때도 기합대신 노래를 부를 정도였습니다. 조선인인데도 불구하고 일본 노래를 부를 때 일본인보다 더 감정을 넣어 부르면서 울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인이었지만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와는 무척 친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둘이서 보초를 서면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감정이 풍부해서 우는 것이 아니고 자기 처지를 생각하니 너무 서러워서 노래 부를 때마다 울음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곳은 독립군들이 우리 나라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는 지역인데 자기는 일본군이 되어서 일본 노래를 매일 부르고 있으니 모리하시, 넌 이 심정을 모를 거라면서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너무나 엄청난 고백이었기 때문에 내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습니다. 저는 스즈키씨한테 이런 얘기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면 죽는다고 못을 박고 주의시켰습니다. 그 후부터 그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저도 계속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 후 몇 개월이 지났을 때 스즈키씨가 저에게 깜짝 놀랄 부탁을 했습니다. 같이 보초를 나갔을 때 자기가 탈영을 할 테니까 모른 척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멎을 것 같았습니다. 안 된다고 했지만 그는 그래도 한다면서 그럼 고발하라는 것입니다. 매일 동포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면 참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고발할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의미하니까요. 비가 억수로 퍼붓던 날 같이 보초 나간 저를, 그는 미안하다면서 상처 나기 쉬운 눈언저리와 입술을 향해 몇 차례 치더니 미리 준비한 저를 묶고 탈영했습니다. 물론 저는 반항 한번 안 했습니다. 그날 밤 부대는 왈칵 뒤집혔습니다. 탈영한 조선인에 대한 증오도 컸지만 그의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없다는 허탈감에 대한 분노가 더 컸었습니다. 그 증오의 대상은 전부 저에게 쏟아졌습니다. 반죽음이 되도록 저는 그날 밤 맞았고 근무 태만 죄로 영창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증오심은 전혀 없었습니다. 무사히 살아남기만을 바랐습니다. 일본이 패망하고 저는 고향 시마네켕(島根縣)으로 돌아왔습니다. 결혼을 두 번 했지만 얼마 못살고 헤어졌습니다. 반죽음이 되도록 당한 구타로 인하여 남자 구실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 포기하고 오사카에서 혼자 살면서 스즈키씨를 찾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노래 잘 불렀으니까 한국 가수들의 레코드를 찾아 헤매기도 했으며 몇 군데 없는 오사카의 한국 클럽들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제가 일본인들한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인으로서 좋든 싫든 일본군에 입대한 이상 맡은 임무와 근무에 충실해야 했던 제가 조선인 탈영을 방관한 것은 근무 태만이 아니고 방조였습니다. 이러한 이율 배반적인 행위를 한국인 마누라한테 사실 그대로 고백하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사이에 신기하게도 그 동안 온 몸을 칭칭 감았던 멍에들이 봄눈처럼 녹으면서 새로운 힘이 솟아났습니다. 그날 밤 얼싸안은 품속에서 처음으로 남자 구실을 할 수 있었으며 그때 임신한 아이가 요시오입니다. 그래서 마누라가 주워 온 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마누라 말처럼 기적이었습니다.”
일본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면서 모르는 것은 할머니의 통역과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은 할아버지와 송 교수의 주고받는 필담속에 할아버지는 조용히 말을 맺었다.
할머니의 인생도 기구했지만 할아버지 인생 또한 그에 못지 않았다. 송 교수는 짜릿한 감동의 경련 속에 말을 잃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군대에서 모질게 당하고서도 스즈키씨라는 한국인을 찾고 있는 신념에는 그저 놀랄 따름입니다. 그분은 한·일 간의 역사적 배경은 별도로 두고 참으로 행복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할아버지는 그러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사실 그대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며 그것을 감동으로 받아들였던 젊은 시절의 할머니를 생각할 때 두 분의 만남은 어떤 우연이 아니고 필연적인 인연의 만남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송 교수가 맥주 잔을 비웠다.
할머니가 또 맥주 두 병을 갖고 왔다.
“선생님, 정말 사양하지 마시고 드십시오 저도 오늘 이렇게 자세히 제가 살아온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고 저의 남편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 말은 맞는 말이지. 오늘이 꼭 두 번째이니까.”
할아버지가 송 교수 잔에 맥주를 따랐다. 송 교수가 얼른 잔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저대로 따라 마시겠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송 교수가 꾸벅 머리 숙였다.
“그때 아이가 아파서 소아과 의원에 처음으로 같이 갔을 때 간호원이나 의사 선생님은 저희들을 부부로 알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부부가 아니라고 얘기할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네네하다 보니까 부부가 되고 말았습니다만 중매는 그때 간호원과 의사 선생님이 선거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부부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할머니가 환하게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처음에는 소아과 의원에서 일어난 일들이 서로 부끄러워서 애써 피하면서 서로의 과거들을 조금씩 털어놓았다고 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의아스러운 것은 왜 두 번 결혼해서 헤어졌는지 궁금했었는데 아기가 없었다는 사실과 그 원인이 자기한테 있었다는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 의지하고 같이 살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결혼식도 올리지 말고 같이 살자고 했지만 할머니는 그것만은 안 된다고 딱 부러지게 반대했다고 했다. 도바에서 죽어버린 카네모토 전 남편과 같이 살 때도 식은 커녕 아는 사람 모아서 식사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살림을 차렸다고 했다. 그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고 자기 나름대로 위안도 해보지만 그게 아니었다. 새로운 생활에 대한 스스로의 마음 정리와 제주도 시댁에서 재혼하라는 간곡한 요청에 대한 뚜렷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의 일상들이 임시 살림처럼 언제나 느껴졌고 시댁에 대해서도 면목 없고 죄송스럽기 짝이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남이 웃더라도 조촐한 식이라도 올리고 싶다고 했다. 그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1년 후, 반대하는 할아버지를 설득시켜서 식을 올렸다고 했다.
“그날 밤 저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고향 제주가 달나라처럼 멀리 느껴졌고 큰아들 명훈이와 작은아들 명석에게는 어머니 자격이  없는 죄인이 된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이러한 저를 주인은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위로해 주면서 하루라도 빨리 자수해서 등록 만들면 언젠가는 고향에도 갈 수 있다면서 격려해 주었습니다. 일본 와서 만 1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만 자수하는 것은 몹시 두렵고 불안했습니다. 혹시 등록이 안돼서 강제 송환 당하게 되면 모든 것이 또 뒤죽박죽이 되어 제주에서 전부 팽개치고 일본 오듯이, 이번에는 일본에서 다 버리고 제주 가야 할 생각하니 바짝 겁이 났습니다. 이제는 일본에 살아야 할 운명인데 말입니다. 그래도 주인은 자기가 있으니까 걱정 없다면서 매일 자수하러 가자고 권했습니다. 솔직히 그때 주인과 아기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몰랐습니다. 둘 사이에 아기라도 하나 있으면 등록 만들 때 큰 힘이 되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주인은 여기저기서 수소문하고 들고 와서 틀림없이 등록을 말들 수 있다면서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저를 자수 시켰습니다. 모든 걸 운명에 맡겼습니다. 10년 동안 일본에 숨어살면서 4․3사건 때 한국 순경과 폭도들에게 쫓기는 꿈과 일본 순경들한테 쫓기는 꿈을 번갈아 꾸고 나면 전신의 땀으로 옷이 다 젖을 정도였으며 불안감과 안도감으로 그러한 날은 하루 종일 병든 닭처럼 온몸이 나른하여 일이 손에 안 잡힐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수를 하니 임시 등록이 나왔습니다. 하늘을 오를 듯이 기뻤습니다. 비록 정식 등록은 아니지만 어디 가서도 슬슬 뒤로 빠지지 않고 앞에 나설 수 있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주인과 함께 스즈키 마사오라는 한국사람을 찾기 위해 민단 총련은 물론 경상 남북도 도민회까지 찾아가서 알아보고 부탁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남편이 여기저기 기웃거리기에 화가 나서 심술처럼 속에도 없는 살림 가르자는 말을 했을 때 남편이 왜 그를 찾고 있는지 충격적인 사실을 들려주었습니다. 저의 좁은 마음과 경솔함·어리석음에 대해서 한 마디 나무람 없이 대해 주던 그날 밤의 주인을 저는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습니다. 그토록 찾아 헤매는 한국인 때문에 자기 일생을 망쳐버렸지만 원망스럽다는 말 한 마디 않고 지내온 주인을 생각하니 오히려 저가 스즈키라는 그 한국인이 원망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때의 저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들은 홍수 같은 눈물 속에 부끄러운 얘기지만 처음으로 맺어졌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아들이며 이름은 어디 가서도 옳고 바른 일만 하라고 해서 요시오라고 지었는데 우리말로도 ‘의남’이라는 발음이 좋아서 저도 대찬성이었습니다. 그 요시오가 또 우리 부부에게 아주 큰 효자 노릇을 했습니다.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기니까 입국 관리국에서 계속 미루던 정식 등록을 앞당겨서 발행해 주었습니다. 일본와서 13년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개표라는 말을 아십니까?”
“개표입니까? 개표라면…… 광견병 같은 병을 예방하기 위해 보건소 등에 신청하면 개의 목에 걸도록 내주는 인식표 아닙니까?”
송 교수가 자신 없다는 듯이 뜸을 들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할머니가 시원하게 대답했다.
“개표? 갑자기 그게 어떻게 됐다는 말입니까?”
할머니가 무슨 착각을 하고 갑자기 개표라는 말을 꺼냈다고 송 교수는 생각했다.
“여기에서 동포들은 등록을 개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일일이 신청해야 등록을 내준다는 의미에서 빈정거리는 말입니다. 등록 가진 사람을 개표 가졌다고 큰소리 친다고 등록 없는 사람들이 말하면, 가진 사람들은 개표 없는 사람이 설치고 다닌다고 비웃기도 합니다. 저는 정식 등록이 나오면 임시 등록 때보다 더욱 기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손에 넣고 보니 개표라는 말이 먼저 떠오르고 이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뒤바뀌었는지를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허탈감에 빠졌었습니다만 밀항자라는 꼬리표가 떼어지고 재일 동포라는 자격증을 정식으로 받은 셈이었습니다.”
그 후 할머니는 남편에게 일본과 다른 한국 풍습 두 가지만은 꼭 지키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했다. 하나는 자기 성 고를 그냥 사용하는 것이었다. 일본인은 결혼을 하면 남편 성을 따르지만 한국인은 결혼해도 그냥 자기 성을 사용하니까 고라는 성을 사용하고 싶다고 했다. 모리하시라는 남편 성이 싫어서가 아니라 고라는 성마저 없어져버리면 고향과의 인연이 끊어질 것 같다고 했다. 물론 동포인 경우에는 부부가 통명으로 일본 성을 사용해도 본명은 등록에 그대로 남지만 보통 때도 그냥 사용하고 싶다고 했다. 일본인인 경우에는 부부가 성이 다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외국인과 결혼했을 때는 가능하다는 말을 자수했을 때 알았던 할머니였다. 또 일본 여자가 몇 차례 결혼하고 이혼하면 그때마다 성이 바뀌는 사실도 알았는데 그대로 할머니에게 적용하면 고, 카네  모토, 모리하시로 바꿨어야 했었다.
또 하나는 죽어버린 두 남편의 제사를 지내왔다고 했다. 제주 시댁에서는 어떻게 알았는지 시아버지와 남편 제사 치르는 것은 무척 고맙지만 제주에서 하는 제사이고 또 애기 어머니는 새롭게 살림 차렸으니까 하지 않아도 좋다는 연락이 왔지만 할머니는 그래도 계속 치르고 있다고 했다. 어떻게 해서 헤어지고 죽은 사람들인데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했다. 그 대신 시아버지와 남편 죽은 날이 별로 차이가 없으니까 시아버지 제사 때 남편 제사도 같이 모신다고 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같이 살 경우 이러한 풍습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헤어지는 경우도 있다기에 할머니는 걱정돼서 미리 자세히 설명하여 다짐받고 싶었다. 당신이 나의 인생을 구해줬고 또 서로 의지해서 살자고 했는데 그 이상의 요청도 전부 들어야 하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고 남편에게 책망 들었다면서 그 대신 자기도 부탁 하나 있다는 것이었다. 둘째 아들 명석의 성만은 통명 카네모토를 모리하시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얼마 지나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보호자는 모리하시인데 카네모토로 그냥 다니게 되면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될 텐데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남편의 자상한 배려들이 더없이 고마웠다. 그날로 구청에 가서 둘째 아들 통명을 모리하시로 바꾸었다. 한국인의 통명을 변경할 때는 구청에 가서 언제라도 바꿀 수 있었다.
할머니는 자기 인생을 묘목 인생이라고 했다. 삼양마을 복판의 팽나무처럼 뿌리를 깊게 내리고 제주에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삶이 무참하게 잘라지면서 생전 처음 보는 일본 땅에 나뭇가지처럼 이식되어 죽을지 살지도 모를 생활 속에 겨우 가냘픈 뿌리를 내렸다고 했다. 그 뿌리를 마르게 해서도 안되고 다시 자를 수 없다고 했다. 할머니는 비 새는 가게를 고치고 옆집을 빌려 가게를 넓히면서 김치 종류도 하나둘 더 만들고 자리젓들도 곁들여서 구색을 갖추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조그마한 회사에 다니는 남편도 퇴근한 저녁때는 물론 일요일이나 쉬는 날에도 할머니를 거들었다.
어떤 일요일은 남편에게 가게는 물론 아기까지 맡기고 물질을 갔다. 물질 잘하는 할머니를 선배 해녀들이 언제나 데리러 왔었고 김치 파는 수입보다 훨씬 좋았다. 물질은 당일치기로 여기저기 다녔지만 5년 간 살았던 도바에 갈 때는 언제나 둘째 아들을 데리고 갔다. 이쿠노에서 가까운 쓰루하시(鶴橋) 역에서 특급 열차 타도 왕복 다섯 시간 정도 걸렸다.
초등학교 1학년인 둘째 아들은 기차 타는 것을 좋아해서 데리고 가기도 했지만 일가 친척 없이 혼자 살았던 그 애 아버지의 고향을 보여주고 언젠가는 자세히 들려주고 싶었다.
둘째 아들은 지금 남편을 아버지로 알고 있다. 8년 전 도바를 떠나을 때 전 남편의 유골도 이쿠노 절에 안치하고 아들과 분향하러 갈 때도 아버지라고 설명했었지만, 아직 이해를 못하고 있다. 그러한 아들을 위해서도 일부러 갈 수 없는 도바에 물질하러 갈 때는 꼭 데리고 갔었다. 이렇게 억척스러운 생활 속에 3년이 지났다. 가게도 제법 활기를 띠고 생활에도 여유가 생겼다. 그해 정월 신년 연휴를 마치고 그 동안 간판 없이 김치 장사하던 가게에 정식으로 간판을 걸었다.
‘다카야마 쇼텡’이라고 했다. 고씨 성 하나만으로는 발음이 좀 약하다는 주위의 의견도 있어서 고씨 성의 통명으로 많이 사용하는 다카야마(高山)가 좋다고 해서 붙인 가게이름이었다. 처음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나 밖에 나와서 그 간판을 쳐다보았는지 모른다고 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대견스러웠다고 했다. 남편은 여전히 회사에 다니고 할머니는 어엿한 ‘다카야마 쇼텡’의 주인으로서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제주에서 왔다는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연수차 1주일 전에 일본에 왔는데 지금 오사카이며 오늘 저녁이나 밤에 꼭 만나고 싶다고 했다.
갑작스런 전화도 그렇지만 오늘 당장 만나고 싶다니 더욱 놀랐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안 된다고 했더니 내일 오전 비행기로 한국에 귀국해야 한다면서 4․3사건 때 돌아가신 시아버지와 주인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다고 했다. 할머니는 등록 없을 때 일본 순경 마주쳤을 때처럼 가슴 철렁하고 심장이 멎는 것 같더라고 했다. 그날이 바로 시아버지와 남편 제삿날이었다고 했다. 스님에게 그렇게 말했더니 더욱 좋다면서 길을 아는 사람과 집으로 찾아가서 제사도 같이 치르고 싶다고 했다.
제사라고 해야 찾아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할머니 내외와 어린 아들 둘뿐이었다. 그러나 제물은 적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걸 정성껏 공들여 구색 갖추고 정갈한 젯상을 차렸다. 고향에서 동네 제사처럼 시댁에서 차렸던 것과 다름없었다. 그건 할머니에게 다시없는 위안이 되었으며 이날은 시아버지와 남편과의 만남만이 아니라 아늑한 고향과의 만남이라고 했다. 우리 제사 풍습을 전혀 몰랐던 할아버지는 처음에는 몹시 어리둥절했었으나 매년 되풀이되는 사이에 제삿날은 일찍 퇴근하여 할머니보다 더 정성을 들였다.
이렇게 조용하게 치르는 제삿날에 16년 전에 죽은 시아버지와 남편에 대해서 스님은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것일까. 불안과 긴장 속에 일찍 돌아온 남편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젯상을 다 차렸을 때 스님이 찾아왔다.
“설마 일본에서 두 분의 제사에 참석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다 부처님의 인연입니다.”
사진도 없는 젯상 앞에서 경을 마친 스님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할머니는 깜짝 놀랐다. 스님이 유교식의 젯상앞에서 어떤 망설임도 없이 경을 외우는 것도 그렇지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이제까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일본에서는 한국 절이나 일본 절에서 동포들이 장례식을 치를 때 유교식으로 육류들의 제수도 준비해서 제상을 만들어도 상관없이 스님들이 경을 외우고 또 그곳에서 고기들을 안주 삼아 술 마실 때는 깜짝 놀랐으나 지금은 그 풍습도 익숙해져서 괜찮았다. 그러나 유족들의 슬픈 오열 속에서 진행되는 장례식 때도 스님들의 근엄한 표정에서 눈물 한 방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제주에서 오신 스님은 친척집 제사 참석하듯 어떤 위화감도 없이 참석하여 자연스럽게 분향을 하고 장례식도 아닌 제삿날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주머님,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아주머님은 저를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삼양 이웃동네 화북 출신이며 4․3사건 당시 삼양지서에서 순경으로 근무했던 양동일이라고 합니다. 시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 시댁 제사마친  다음날은 저도 언제나 참석했었습니다.”
스님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합장하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그러셨습니까. 그때 저는 부엌에서 심부름만 했고 손님들이 많았기 때문에 직접 만나 뵌 적은 없습니다만 스님의 말씀은 저의 남편이나 시아버님한테서 종종 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저의 남편을 소개 하겠습니다. 일본사람입니다.”
“모리하시라고 합니다.’
“처음 뵙습니다만 제주에서 소식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