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해외문학상> 대상 수상작 시 -왕수영(일본)/ 소설 -백 훈(미국)

 

 

제9회 <해외문학상> 대상 시부문 수상작 날짜 : 08-03-11 04:18     조회 : 1107    

<나의 정원에는>

                            왕 수 영


고독이 익어 향기 나는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고독의 정원에는
당신을 닮은 구름도
내려앉아 한나절
쉬고 갑니다

모국어의 꽃씨도 뿌려
바람과 어울리게 하니
내 고향 사투리 꽃이
피어 사투리 웃음이
쏟아집니다

해거름에는
바람소리도 멀어지고
꽃들이 잠자는
정원에서 고독의 물을
줍니다

새봄에는 더 향기로운

세월이 익어 고독의
꽃이 만발하겠지요


 왕수영: 1937년 12월 21일 부산에서 출생
․1960년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61년 「현대문학」으로 데뷔(박두진 시인 추천)
․시집으로 「화문의 영토」(1970년), 「당신은」(1975년), 「당신의 뜻으로」(1982년),             
. 「동경의 13월」(1992년), 「조국의 우표에는 언제나 눈물이」(1995년),
. 「조센진의 흉터」(1996년),  「마음은 달보다 먼저 조국으로 간다」(2005년) 등이 있음
.장편소설은 「뜨거운 그늘」(1961년), 「밤이 무너져와도」(1963년), 「조국은 멀다」(1966년),
. 「모란이 필 때」(1968년), 「마지막 겨울비」(1982년), 「바람 속의 내리화」(1987년) 등이 있음
.수필집으로 「쪽발이 잡은 조센진」(1989년), 「모가나는 한국인 쓰다듬는 일본인」(2000년
  일본어 일본출판), 「한류의 비밀」(일본어 일본 출판)
․1996년 「제11회 상화 시인상」 수상,
.1998년 제32회 「월탄문학상」 수상
.한일문화교류사업 「유니나」 대표(현).
.현재 「해외문학」 편집위원

제9회 <해외문학상> 대상 소설부문 수상작

 <LA 한인택시운전사들의 이야기(3)>


                    백  훈


- 새벽 3시의 콜 -

전화벨 소리가 연이어 울려댄다. 깊은 잠에 빠져있던 철호는 다소 짜증을 실어 전화를 받는다. 눈을 비비며 바라보는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다.
“여보세요, 택시 아니예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여자의 목소리이다. 맑긴 하지만 왠지 음산한 느낌이다. 철호는 습관처럼 대답한다.
“네, 명동 택시입니다.”
“여기는 하버드와 5가의 아파트예요. 지금 차가 올 수 있나요?”
철호는 잠시 망설인다. 너무 졸리니 그냥 포기할까. 박형에게 전화로 넘겨버릴까… 아니야, 무슨 소리, 요즘 같은 불경기에 한 손님이라도 더 잡아야지….
“여보세요, 듣고 있어요? 올 수 있냐구요?”
여자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쯤 올라간다. 이 여자 급하긴……. 철호는 천천히 말을 받는다.
“네 7,8분쯤 걸립니다. 위치를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한인타운의 택시 운전사들은 전화를 받으면 의례히 7,8분쯤 걸린다고 안내를 한다. 그런데 이 7,8분이라는 시간은 정말 묘한 시간이다. 정확히 지켜주면 물론 좋지만 10분이 조금 넘게 걸려도 그리 미안하지가 않은 그런 시간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10분쯤 걸린다고 안내를 하면 대부분의 손님들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다며 투덜거리기 마련이다.

- 산타모니카 왕복은 40달러 -

철호는 주소를 받은 뒤 얼른 옷을 챙겨 입는다. 잠시 후, 철호는 아파트 주차장을 나선다. 흠, 맑으면서도 왠지 음산한 느낌의 여자라…. 그런데 새벽 3시에 무슨 볼일이 있어 택시를 부른단 말이냐…….
정확히 13분이 걸렸다. 철호가 차를 세우자마자 아파트 입구에서 기다리던 여자가 얼른 뛰어나온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 화장기가 없지만 희고 맑은 얼굴이다. 다소 길어 보이는 머리를 성의 없이 뒤로 동여맸다. 마른 몸매에 키가 큰 편이다. 여자는 목이 거의 가려지는 검은 색 티셔츠를 받쳐 입고 초록 빛깔의 점퍼를 걸쳤다. 역시 검은 색의 바지를 입고 있다.
“아휴, 택시 아저씨들은 다 엉터리야. 전화를 받으면 7,8 분 걸린다고 말을 해놓곤 지키지도 못해요.”
여자는 운전석 옆자리에 앉는다. 철호는 왠지 당황스럽다. 아이고, 이 여자 봐라. 뒷좌석으로 안 앉고 옆에 앉는 것은 또 뭐람. 이 시간에…… 철호는 여자를 바라보며 묻는다.
“어디로 모실까요?”
“빨리 이 동네를 벗어나 주세요. 그리고 산타모니카 바닷가로 좀 가주세요.”
여자의 재촉에 철호는 일단 아파트 앞을 벗어난다. 하지만 황당한 기분이다. 바닷가라니, 그것도 이 새벽에……. 그리고 보니 여자에게선 술 냄새가 난다.
“아니, 그저 바닷가에 가려고 차를 불렀어요? 이 시간에?”
옆자리의 여자는 빤히 철호를 쳐다본다.
“내가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에요? 그 쪽은 택시비만 받으면 그만이잖아요.”
이렇게 나오면 달리 할 말도 없다. 철호는 불쾌한 기분을 털어버리기 위해 고개를 한번 저은 뒤 10번 프리웨이 방향으로 차를 몰아 나간다.
철호의 침묵이 다소 부담스러운지 여자는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하는 눈치이다. 하지만 철호는 더 이상 여자를 상대하고 싶지가 않다.
“미안해요…. 마음이 답답해서 그만 말을 막하고 말았어요.”
여자가 한숨을 쉬며 말한다. 잠시 동안의 침묵.
“산타모니카 왕복은 40불입니다. 바닷가에서 머물게 되면 별도로 대기료를 계산해주세요.”
철호는 차갑게 말한다. 다시 침묵… 여자의 긴 한숨소리가 철호의 귓가에 머물고 간다.
“몇 날을 뜬 눈으로 지냈어요……. 그리고 오늘 밤엔 소주를 한잔 마셨어……. 그러다보니 용기도 생기고 왠지 바닷가엘 가보고 싶어졌어요. 산타모니카 바다는 한국의 동해와 이어져 있다면서요?”
철호는 자신도 모르게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아, 정말 돌아가고 싶어요…”
여자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듯 천천히 말을 계속한다.
“… 미국에 온지 6개월이 되었어요. 그러니 이제 결정을 해야만 해요. 불법체류자로 살 것인지 아니면 돌아갈 것인지… 그래요,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돌아가야겠어요… 아니야, 아니야, 이대로 갈 수는 없어요.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그리고 또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데… 정말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여자의 말에 두서가 없다. 술기운 탓인 모양이다. 여자는 그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해나간다.
산타모니카 해변에 도착했다. 철호는 백사장 가까운 곳에 차를 세운다. 차에서 내린 여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해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백사장을 향해 걸어간다.
철호는 난감한 심정이 된다. 여자를 따라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보자니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아 걱정이 된다. 철호는 차에서 내린다. 그리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여자를 따라간다.
두 사람은 어느덧 각자의 생각에 젖어 백사장을 거닐고 있다.
밤바다를 바라보며 철호는 생각한다. 이게 얼마만인가…… 늘 쫓기듯 하루하루를 살아오면서 나 역시 바다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그런데 느닷없이 지금 이 시간에 바닷가를 걷고 있구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무언가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한 여자와 밤바다를 거닐고 있구나… 그래… 지금 이렇게 몇 발자국 거리를 두고 걷고 있지만 너와 나의 마음은 저기 보이는 달과 별의 거리만큼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다. 그래, 나는 나대로 나를 생각하고 너는 너대로 너를 생각하며 우리는 바닷가를 거닐고 있구나…….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되돌아 차가 세워진 방향을 향해 걷는다. 어느덧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백사장을 걷고 있다.
“저는 어려서부터 왠지 미국엘 와보고 싶었어요. 아니, 꼭 미국이 아니라도 우리나라가 아닌 어디든 멀리 떨어진 외국에 나가서 살고 싶었어요…….”
여자가 다시 말을 시작한다. 깊은 밤 바닷가를 함께 걷고 있다는 어떤 동질감 때문인가… 철호는 여자에게 가졌던 불쾌했던 감정이 어느새 풀어진 것을 느낀다. 여자에게 연민의 감정마저 생긴다. 철호는 그저 가만히 귀를 기울여주는 것이 여자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백마를 탄 왕자님 -

여자는 꿈 많던 고등학생 시절을 마감하고 대학에 진학했다. 일류 대학은 아니었지만 서울의 한 여자대학 영문과에 진학을 했다. 영어를 잘 배워야 외국에 나갈 기회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의 꿈을 실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외국에 나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대답을 할 거리도 없었다. 공부에 애착이 있어 유학의 형식으로 수준 높은 공부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막연히 넓은 세상에 나가 살고 싶다는 것이 여자의 소망이었다.
“…… 대학 시절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영어회화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미군들과 미팅을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외국에 나가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외국 사람을 사귀는 것은 또 ‘별로…….’ 더라고요. 그래서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한 미군 장교가 저에게 상당한 호감을 갖고 사귀자며 두 번이나 애프터 신청을 해왔는데 거절을 하기도 했지요….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그것이 그저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가기 시작했어요. 여자의 몸으로 아무런 연고도 없이 더구나 뚜렷한 목적도 없이 외국에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친구들을 만나 함께 웃고 수다를 떨 때면 습관처럼 말하곤 했어요. 어디 외국으로 나를 데리고 갈 사람 없을까? 정말 그런 사람에게 시집이나 갔으면 좋겠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이 나타났어요. 정말 갑자기…”
여자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바다를 향해 선다. 철호도 여자를 따라서 바다를 바라본다. 말없이 밀려오는 작은 물결… 물결들….

스물다섯 살의 여자에게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남자는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스물일곱 살의 재미교포 2세라고 했다. 여자는 대학을 졸업 한 뒤 두해 째 조그만 개인회사엘 다니고 있었다. 여자에게 남자를 소개해 준 사람은 여자의 대학 친구였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친구의 친구였다. 여자에게 남자를 소개해준 친구의 친구 말에 의하면 남자는 미국의 부자 동네에서 귀하게만 자라나 세상 물정이 어둡고 순진하다고 했다. 남자는 한국의 풍습과 문화를 잘 모르는 편이고 한국말도 서툴렀는데 부모에 대한 효성심이 지극해 한국에 나오게 되었다고 했다. 남자의 부모는 아들이 한국 여자와 결혼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중매쟁이를 통해 한국여자를 소개받았단다. 그리곤 선을 보라며 아들의 등을 떠밀어 한국으로 보냈단다. 하지만 한번 선을 본 뒤 실망을 한 남자는 중매쟁이의 다음 주선을 거절하곤 한국을 더 알고 싶어 여행을 다니고 있단다. 그러다 우연히 여자를 소개받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음… 커피를…마신다요.”
처음 만난 어느 호텔의 커피숍에서 어눌한 한국말로 주문을 하는 남자를 보며 여자는 단번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아, 정말 나를 미국으로 데리고 갈 사람이 나타났구나….
남자는 여자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남자는 취미가 경마와 골프라고 했다. 남자는 자기 집 정원에서 말을 타고 있는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고 골프장에서 ‘타이거 우즈’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나는 대학에 다닐 때 골프 티칭 아르바이트도 했다요…”
남자가 여자에게 미국에 가면 골프를 가르쳐주겠다고 약속을 했을 때 여자는 벌써 미국의 골프장에서 박세리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는 자신을 상상해보며 황홀해하기도 했다.
“… 그 사람은 아침에 눈을 뜨면 창밖으로 바다가 펼쳐지는 그림 같은 집에 살고 있다고 했어요. 침실이 있는 이층 베란다에서 바로 마당의 풀장으로 뛰어들어 수영을 하며 아침을 시작한다고 했어요. 벤츠를 타고 아버지가 경영하는 회사에 출근해 오전 동안만 일을 보고 오후에는 스포츠카로 바꾸어 타고 문화생활을 즐기는 것이 취미라고 했어요…. 그리곤 나와 함께라면 정말 행복하겠다며 자기 혼자서 다니던 모든 곳을 나와 함께 다녀보고 싶다고 했어요. 휴가를 만들어 유럽여행도 떠나자고 했어요……”
여자는 말을 멈추고 후후 웃는다. 그리곤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떨군다. 잠시 후 백사장을 나란히 걸으며 철호는 마음이 답답해진다. 이런 것을 신데렐라 콤플렉스라고 한다던가.
남자는 그야말로 폭풍처럼 달려와 여자의 마음을 빼앗아 버렸다. 남자의 세련된 몸짓과 깨끗한 매너 그리고 간간히 섞어서 쓰는 영어 표현들을 들으며 여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만난 지 삼일 만에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했다. 그리고 꿈결같이 보름이 흘렀다. 이제 남자는 미국에 있는 부모에게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여자는 남자를 혼자 보내기가 싫었다. 이대로 헤어지면 남자를 영영 놓칠 것 같았다. 그 때 남자가 말했다.
“당신도 일단 여행 비자를 만들어 함께 들어가면 좋겠어. 미국에 들어가 결혼식을 올리면 되잖아……. 그리고 당신이 수속을 밟을 동안 나도 여기에 더 머물고 싶어.”
얼마나 기대하던 말인가. 여자는 곧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하지만 쉽게 여행비자가 나오질 않았다. 미혼의 직장 여성인 것이 불리하게 작용하는 듯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남자는 여자에게 생활비를 요구했다. 미국의 아버지가 빨리 돌아오라며 돈도 보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자신이 당연히 생활비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아버지 될 분이 오히려 더 존경스럽기만 했다. 얼마나 건전하게 아들을 키우는 분인가 말이다.
“저는 정성을 다해 그 사람의 뒷바라지를 했어요. 귀한 사람인데 고생을 시키면 안 되잖아요. 그의 씀씀이가 워낙 커 힘들기는 했지만 나는 정말 즐겁기만 했어요…….”
다시 두 달이 지나 겨우 여행비자가 나왔다. 여자는 너무나 행복했다. 이제 출발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때 남자가 말했다.
“우리의 결혼을 위해 당신이 따로 준비할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내가 다 알아서 하겠어. 다만 당신이 결혼 자금을 모아놓았다면 당신을 위해 가지고 가라구.”
남자의 말에 여자는 다시 한 번 감격을 했다. 남자의 부모에게 드릴 최소한의 예물이라도 준비하고 싶었지만 남자는 그것마저 말렸다.
여자는 그동안 결혼을 위해 모아놓은 돈을 모두 찾았다. 한국에서의 결혼식은 생략했지만 주위의 친지들에게 널리 알려 축의금도 받았다. 여자의 부모도 딸의 결혼을 위해 준비했던 돈을 보태주었다. 드디어 여자는 남자와 함께 한국을 떠났다.

- 나는 미국이 무서워요 -

LA 공항에 도착을 한 뒤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코리아타운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호텔을 잡은 뒤 말했다.
“당신이 갑자기 나타나면 우리 부모님이 충격을 받으실 지도 몰라. 그러니 여기서 잠시 머물면서 내가 부모님께 말씀을 드린 후에 우리 집으로 가자구.”
여자는 무언가 혼란스러웠다. 미국에 도착하면 당연히 남자의 집으로 가리라 믿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남자가 자기의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가족들을 오랫동안 미국에 살았으니 이곳의 풍습으로는 그럴 수도 있는 모양이라고 여자는 애써서 남자를 이해하려 했다.
다음날부터 남자는 여자에게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남자는 여자를 데리고 유니버설 스튜디오며 디즈니랜드, 라스베가스, 그랜드 캐년 등으로 돌아다녔다.
여자는 시부모님을 먼저 만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조급했지만 남자는 왠지 태평스럽기만 했다.
“무얼 그래. 평생을 모시고 살 텐데……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고 이런 기회에 마음 놓고 여행을 해보는 것도 괜찮은 거라구….”
여자는 하긴 그렇기도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사이에 또 한 달이 흘렀다. 그 사이에 남자는 부모님을 만나러 간다며 두 번 혼자서 어딘가를 다녀왔다. 한번은 이틀만에 돌아왔고 또 한번은 삼일만에 돌아왔다. 남자는 갈 때마다 돈을 요구했다. 돌아온 남자는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말했다. 여자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를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남자는 세 번째로 여자에게 돈을 얻어 나갔다가 삼일만에 돌아왔다. 밤이 깊어 술에 취해 돌아온 남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부모님이 당신을 안 보시겠다는 거야. 부모님이 만나라는 사람은 만나보지도 않고 아무나 데리고 왔다며 화를 막 내시는 거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여자는 너무나 절망스러워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누구 한 사람 의논을 해볼 사람도 없었다. 한국에 전화를 하는 것도 창피했다. 여자는 그런 형편임에도 자기에게 돌아와 준 남자가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다. 남자는 여자에게 호텔을 떠나 코리아타운에 아파트를 얻자고 말했다.
“… 하지만 길게 가지는 않을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구. 그리고 코리아타운에 있어야 당신도 나도 편리하고 안심이 될 거야…….”
남자는 왠지 태평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한 사람에게 깊은 믿음을 갖게 되면 불신의 징후마저 마음에서 먼저 거부하게 되는 것인가. 훗날 돌아보면 거짓의 증거는 여기저기에서 툭툭 불거져 나왔었는데 그 때까지도 여자는 태평스러운 남자에게서 오히려 어떤 믿음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각들을 애써서 차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라는 주장이 심리학자들 사이에서도 나온 모양이다.
여자가 남자를 따라 미국에 온 지 석 달이 지났다. 남자는 하는 일도 없이 빈둥거리며 여자에게 돈을 타서 썼다. 가끔씩 친구라는 사람들을 데리고 왔는데 하나같이 일자리도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들 같았다. 그나마 남자가 입막음을 했는지 친구들은 킬킬거리면서도 여자 앞에서 그를 부잣집 아들로 불러주었다.
이젠 여자의 수중에 돈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애써서 모아온 오만 불의 돈을 넉 달만에 다 써버린 것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말을 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가지고 온 돈도 모두 써버렸노라고 말을 마치자마자 남자는 퉁명스럽게 말을 했다.
“아니 오만 불 밖에 없었어? 나는 당신이 최소한 십만 불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 겨우 그것을 가지고 미국에 시집을 오려고 했단 말이야?”
여자의 기대가 산산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여자는 신음처럼 말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당신 부모는 백만장자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다……. 거짓말이었어요?”
남자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말을 받았다.
“백만장자라…… 그럼 백만장자였었지. 지금부터 십 년 전까지. 그 때만해도 부자였고말고……. 아니, 그런데 당신 바보 아니야? 정말 모르고 있었어?”
남자가 오히려 여자에게 반문을 했다.
“나는 당신이 이미 눈치를 챘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러니 그냥 이렇게 살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말이야.”
여자는 온 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한참 후 여자가 겨우 말을 했다.
“이렇게 살다니……. 어떻게 말이에요?”
“뭘 어떻게 해. 돈이 떨어졌으니 이제부터 돈을 벌어야지.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막일은 못해. 그러니 내가 취직을 할 때까지 당신이 알아서 일을 하라구.”
남자는 퉁명스럽게 말을 했다. 그리곤 에이, 그렇게 돈이 없었나… 하면서 오히려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 꿈이란 원래 그런 거야 -

그날 밤, 여자는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절망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여자는 비로소 생각을 했다. 자신의 허영이 결국 자신을 망쳤음을 깨달았다. 미국이라는 환상을 꿈꾸며 살아온 자신의 지난날들이 허망하기만 했다. 여자는 옆에서 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 남자를 나는 사랑했는가…. 여자는 고개를 젓는다. 그래, 나는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어. 나는 이 남자를 통해 어쩌면 나의 허영을 사랑하고 있었어. 이 남자가 가졌다는 것들, 그 풍요로움과 외국의 낭만을 나는 사랑하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이 남자를 벗어날 수가 있을까. 아,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다시 며칠이 지난 뒤 여자는 일을 하겠다고 남자에게 말을 했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를 코리아타운의 한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이 식당은 팁이 제법 많이 벌린다고 했어. 내가 특별히 부탁을 해서 자리를 구했으니 잘 해보라구.”
그날부터 여자는 식당의 웨이트레스가 되었다.
사람은 어느 환경에서든지 적응을 하게 마련인가. 식당을 하면서 여자는 놀라운 속도로 이곳의 생활에 적응을 하게 되었다. 그리곤 자신의 처지를 냉정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두 주일이 지난 후. 다시 돈을 요구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차갑게 말했다.
“당신 힘으로 벌어요.”
남자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말을 받았다.
“아니, 뭘 믿고 큰소리를 치는 거야? 내가 없으면 당신은 당장 불법체류자가 되고 말아. 혼인신고를 하고 영주권도 따주려고 했더니 안되겠군.”
여자는 남자를 보고 다시 한 번 차갑게 말을 했다.
“당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예요. 함께 살고 싶으면 일을 해요.”
“뭐라구? 정말, 뭐 이런 게 다 있어?”
남자는 구타라도 하려는 듯 여자를 향해 손을 쳐들었다.
“잠깐, 당신이 나를 때리면 그것으로 마지막이라는 것을 명심해. 나도 들은 것이 있어. 나는 바로 경찰에 신고 할 거야.”
여자의 반발에, 아이구 이걸 정말… 하면서도 남자는 비실비실 물러났다. 그나마 폭력꾼은 아닌 것이 다행이군…. 혼잣말을 하며 여자는 서글픔과 함께 자신을 향해 냉소를 느낀다.
다시 며칠이 흘렀다. 여자의 서슬에 꼬리를 내리고 눈치를 살피던 남자는 어느 날 아무런 말도 없이 슬그머니 나가선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그 사람을 기다렸을까요?”
여자가 느닷없이 철호에게 묻는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자의 이야기에 깊이 귀를 기울이고 있던 철호는 당황하며 말을 받는다.
“글쎄요…. 기다리지 않았습니까?”
“그걸 저도 모르겠어요. 기다렸는지 안 기다렸는지를… 아무튼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한 달이 더 지났으니 안 돌아오겠지요…. 이게 전부예요.”

철호는 생각한다. 그래, 사람들은 흔히 아메리칸 드림을 이야기하지. 하지만 꿈이란 원래 그런 거야.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한 꿈도 그리고 슬프고 외로운 꿈도 아침이 되어 깨어나면 말없이 사라지는 거야.
‘그러니 그냥 꿈이었다고 생각하세요.’
철호는 여자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철호는 다시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의 아메리칸 드림은 무엇이었을까. 무얼 기대하고 나는 미국까지 날아와 택시 영업을 하고 있는가. 나 역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이곳으로 온 것은 아닐까. 이곳에 오면 무언가 좋을 일이 있을 거라고, 무언가 풍요가 약속되어 있을 것이라고, 막연한 기대를 품고 이곳으로 날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이 여자의 소위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나는 과연 비웃을 수 있을까….
철호와 여자는 다시 차에 올랐다. 철호는 왠지 가슴이 답답하다. 철호는 말없이 차를 몰아 여자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여자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든다. 철호는 그냥 앞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여자가 운전석 옆에 돈을 놓으며 말한다.
“고마워요. 제 말을 들어주어서… 그리고…. 이래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제 집에서 차라도 한잔 드실 수 있으세요?”
철호는 비로소 여자를 바라본다. 그리곤 자신도 모르게 불쑥 말한다.
“혹시 맥주가 있으면 한잔 주세요.”
여자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철호는 여자와 함께 차에서 내린다.

- 사람의 육체는 슬프다 -

사람의 육체는 슬프다. 철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철호는 침대에 누워 담배를 피운다. 옆에 죽은 듯 침묵을 지키고 누워있는 여자의 눈에서 이윽고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울지 말아요…….”
철호가 말한다. 여자는 말이 없다. 철호가 다시 말한다.
“내가 또….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어요?”
여자는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철호는 왠지 마음에 안도를 느낀다. 사람의 육체는 슬프다. 다시 떠오르는 한마디. 철호는 생각한다. 이 여자와 나는 지금 무슨 일을 한 것일까. 영혼의 상처를 육체의 상처로 위로 받으려는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몇 시간 전에 처음 만난 여자인데 나는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아니 이 여자는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나와 몸을 섞었는가. 이것은 명백히 부도덕한 일일까…. 철호는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이 여자와 단 한번 몸을 섞었을 뿐인데 나는 이 여자의 모든 것을 알 것만 같다. 그 상처 그 아픔을 위로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이 여자에게서 나 또한 나의 허망한 꿈을 확인했기 때문인가. 아, 이 여자와 나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철호는 몸을 돌려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는 여전히 천정을 향해 죽은 듯 누워있다. 여자가 천천히 말한다.
“고마워요…. 이상하게 이 말을 하고 싶네요….”
철호는 손을 들어 여자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준다. 철호가 말한다.
“내게 실망했지요? 내가 당신을 유혹했잖아요….”
여자는 고개를 젓는다.
“아, 모르겠어요. 당신에게서 위로를 받은 기분이에요.”
다시 침묵이 흐른다. 철호의 손이 은밀한 바닷물 속의 조개처럼 다가가 여자의 가슴을 감싸 안는다. 한 손은 허리를 감싸안고 한 손은 부드러운 다리의 선을 따라 부드럽게 오르내린다.
“이상한 일이죠. 나는 이미 당신의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진짜 위로를 해주고 싶어요……”
여자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면서도 두 팔로 철호의 가슴을 힘껏 끌어안는다. 아, 가벼운 신음과 함께 여자의 온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철호는 감지한다. 여자는 다리를 열어 철호를 깊이깊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철호는 자신이 어떤 가사 상태에서 빠져서 살아가는 것만 같다. 여자에게로 집중되는 마음과 여자를 거부하는 마음이 동시에 동일한 크기로 일어났다 사라져간다. 매일, 매시간, 매순간…….
철호는 여자가 일을 한다는 식당으로 찾아간다. 하지만 식당 주인으로부터 삼일 전에 여자가 일을 그만 두었다는 말을 듣는다.
“한국으로 다시 간다던데……. 아, 바로 오늘이네요. 오후 여섯시 비행기라고 하던데… 정말 참한 색시였는데….”
철호는 마음이 급해진다. 철호는 서둘러 여자의 아파트로 차를 몬다. 여자의 아파트에 도착해보니 문이 활짝 열려있고 두 사람의 인부가 아파트 안으로 이삿짐을 나르고 있다. 철호는 급히 차를 돌려 공항을 향해 달려간다. 오후 여섯시 비행기… 식당 주인의 말이 철호의 귓가에 그대로 맴돌고 있다.(*)


 백 훈: 1956년 서울 태생, 국제대 국문과 졸업.
·문예지 <시와 시론> 소설 추천으로 등단
·저서로는 소설집 <브람스의 추억>, <아름다운 흔들림>, <블루 애비뉴>
·시집 <마음이 시키는 일 하나>
.2권의 동화집, 인터뷰 모음집 <미국속의 한국인>
.각종 문예지에 50여 편의 단편소설 발표
·제 10회 동백문학상, 제10회 가산문학상 수상
·한국 정보통신부산하 별정우체국 중앙회 사무국장(15년) 역임
·SD 라디오서울 운영국장, 주간현대 편집국장 역임.
·현재 주간지 ‘웰빙 프러스’의 편집국장으로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