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해외문학상 시부문 대상 수상작품(미국)

 

날짜 : 11-05-17 04:58     조회 : 139   


[생물도감]
2

임 혜 신

I
나는 생물도감이 무서웠다.
색 좋은 개구리, 윤기 흐르는 털을 가진 사자
화사한 꽃잎 사이로 미끄러지는 뱀
어느 순간 꿈틀거리며 살아나
발목을 물어뜯고
치마를 벗겨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가시장미 덩굴사이로 사라져갈 것 같은
번뜩이는 눈과 긴 꼬리들

독을 가진 이들이 내게 말을 걸어올 것이라는 것
욕망의 뜨거운 혀를 날름거리며
불꽃과 불꽃 사이
어둠과 어둠 사이,
첫 경험의 선홍빛으로
덮쳐올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생물도감을 열지 못하던 어린 시절

상상의 독은
어떤 독보다도 독한 독이라서
입술을 꼭 다문 아미쉬소녀처럼
책꽂이 깊이 숨겨둔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
그들은 이미 붉고 푸른 소음으로
페이지들을 찢고 핥고 어루만지고 있었다.

II
귀퉁이가 낡은 한 권의 책
눈 내린 언덕에 달빛처럼 놓여있다
가늘고 고요한 숲 그림자
나는 녹슨 상자를 열듯 조심스레
찢어진 페이지를 천천히 넘긴다
희고 부드러운 바람의 손길
다리와 기억과 눈을 잃은
토끼와 사자와 바오밥나무
살아있는 듯한 그림들을 들여다 본다
탈출할 것은 모두 탈출하고 난 빈 상자
스스로의 쇄골과 무릎관절을 마찰시켜
마지막 불씨를 티우려는가,
독 없는 세상이 환하게 흔들리고 있다


[토스터 오븐과 아가씨]
-우리들의 첫 번째 오븐에게 이 시를 바칩니다-


부엌일
알 수 없어라, 중고시장에서
평생을 보낸 녹슬고 찌그러진 토스터 오븐이 
가난한 아가씨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네

아가씨는 그를 위하여
감자와 양파와 버터를 사온다네
빨간 앞치마를 두르고
감자와 양파를 자르고 소금과
로즈메리 잎새를 뜯어 넣어준다네

350도로 달아오르는 그의 가슴
아낌없이 타오르는 심장을 들여다보는
아가씨 슬프고도 아름다운 어깨와 코의 25
감자와 양파들도 즐거워 구리빛 몸을 섞는다네

저무는 하루의 능선을 타고
감자꽃 부드러운 흙냄새가 창밖을 불어갈 즈음
아가씨가 빨간 앞치마를 벗으면
식어가는 그의 심장 아프게 아아, 소리치고
골목을 뛰어놀던 오소리며 사슴들까지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신나서 뛰어 들어오는
허기의 묘술

중고시장에서 같이 놀던
잘생긴 믹서도 날씬한 포도주잔도
꿈에도 꿈꾸지 못했었다네
350, 25분 터지고 깨진 가슴 활활 태우며
양파와 감자와 함께 뜨겁게 익어갈
토스터 오븐의 생애에 막다른 기쁨이 있으리란 걸


[깊고 푸른 숲 속의 그들]

1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별빛도 이르지 않는 곳 여린 풀잎처럼 어둠에 기대어 있었습니다 들어야 할 소리도 마주치는 눈길도 없는 곳에 눈 맑게 뜨고 귀 기울이며 있었습니다 결 고운 바람이 스칠 때마다 적막을 뚫고 풀벌레 울음이 흩어지던 거기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깊은 어둠에 싸여 있었습니다.

2
그곳에 등을 달고 싶었습니다 그중 단단한 나무 가지에 등불을 걸면 어두운 숲의 가슴을 열릴 것 같았습니다 저 먼 곳에서 오는 달빛으로는 알 수 없을 숲의 고요, 내부를 비추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내부에서 번져 나오는 주홍의 은밀함 멀리 이르지 못하는 조그만 등불 아래서만 아프게 드러나는 순박한 사랑을 잉태하고 싶었습니다.

3
그 숲을 나는 세상으로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영원히 그곳에 머물고 싶은 것도 실상 착각이었는지 모르지요 어차피 깨어날 바에는 크고 검푸른 알속에서 깨어나느니 밖으로 빨리 나와서 깨어나는 것이 좋았습니다 자라나기 위해선 홀로 있을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늘을 더 깊게 꽃잎들을 더 보드랍게 바람을 더 싸늘하게 홀로 있음을 더 무섭게 하기 위한 뼈아픈 시간이,

  4
숲을 떠나온 지 오래입니다 뒷마당에 참나무 감나무 산딸기나무까지 자라고 그들의 향그러운 가지에 새소리가 떨어집니다 그것들 
은 모두 숲에서 따온 것들입니다 꺾일 때마다 아프다 소리하던 숲, 그 이별이 이만큼 잘 자라난 아침 나는 어딘가에 잘 자라고 있을 숲 그늘   

을 생각합니다 나의 고독만큼 잘 익은 그곳엔 몇 번이나 잎이 지고 피었겠습니다.

  5
숲으로 돌아갈 계획이 서지 않습니다 돌아가 다시 어둠을 배워야할 나는 너무 먼 곳에 살았습니다 바람이 쏟아지는 뒤뜰에 서서 하루 일과표를 찢어버립니다 지난달에는 영이 엄마가 죽고 엊그제는 잔 아저씨가 죽었습니다 용감하게 숲을 뛰쳐나와 살던 이들 긴 산 그림자 속으로 속속 돌아갔습니다 내가 숲으로 돌아가고 싶듯 숲 속의 그들도 세상으로 돌아오고 싶을까요?

 

□ 제13해외문학상 소설부문 대상 수상작품(미국)



 [건초더미에서] 날짜 : 11-05-17 04:53     조회 : 134    


박 요 한





숙소로 돌아왔다. 모텔의 방은 따뜻했다. 누가 문을 두드린다. 모텔의 아주머니였다.
“오전에 손님이 찾아 오셨는데요.
오전에 내게 손님이 왔었다고 한다. 내게 손님이 오다니 그럴 리가 없다. 이곳에 투숙할 줄을 세상에 누가 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나를 찾아올 손님이 없다. 그러나 여관집 아주머니는 의아해 하는 내게 계속 같은 소리를 한다.
“오전에 누가 찾아왔다니까요. 젊은 여자 분이던데요.
점점 모를 소리다. 젊은 여자가 나를 찾아 왔다니, 분명 나를 어느 여자가 찾아 왔었다는 것이다. 아주머니는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했다.
“혹시 김 혁 교수님 아니신가요?
“그렇습니다만.
“그것 보세요. 맞다니 까요. 여자 분이 분명 그랬던 걸요. 김 혁 교수를 찾아 왔다고, 자기는 광한루에 가서 기다리겠다고…….
“광한루라고 하셨습니까?
“네 맞아요. 분명 광한루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얘기했어요. 아직까지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이미 오후 네 시가 넘어 있었다. 오전에 여자가 찾아왔다면, 그리고 그녀가 지금까지 광한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은 초겨울이다. 차가운 날씨이다. , 다섯 시간을 추운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다.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나는 모텔을 다시 나온다. 발을 동동거리고 택시를 불렀으나 오늘따라 택시는 구경도 할 수 없다. 내 앞에 서주는 차가 없다. 삼십 분이나 지나서 겨우 택시 한대를 얻어 탈 수 있었다.
“광한루로 갑시다.
택시는 댓바람에 광한루에 도착한다. 나는 차에서 내리자 말자 덮어놓고 뛰어 간다.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도령과 춘향이가 만났다는 오작교까지 냅다 뛰었다. 그리고 사방을 휘둘러본다. 없다. 아무도 없다. 오작교 위에는 아무도 없다. 다시 한 번 사방을 휘휘 둘러보았으나 근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작교 연못에는 금붕어들이 여전히 굼실굼실 돌아다니고 있었다. 군인 시절에 보았던 금붕어들이 지금도 물속을 활기차게 수영하고 있다. 나는 광한루 경내를 다시 이곳저곳 걸어 다닌다. 오작교 다리 위에서는 여학생들 몇이 까르르 웃고 있었으며 경비직원 인 듯 유니폼을 입은 사내가 저쪽에서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정말 그것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눈에 띄는 모습이 있었다. 오작교에서 대각선으로 백 여 미터 북서쪽에 바윗돌이 있었고, 그 옆에는 벤치가 있었으며 그 벤치에 누가 앉아 있었다. 여자였다. 분명 여자였다. 젊은 여자였다.
여자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젤 등 그런 화구를 준비하여 여봐란 듯이 펼쳐놓고 그리는 그런 그림이 아니라 스케치북에 연필로 데생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조용히 앉아 있는 그녀가 그림 그 자체였다.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를 정도로 여자의 분위기는 너무 조용하였다. 아니 여자 자신이 마치 정물처럼 보일 정도로 고요함 그대로였다.
여자가 그리는 그림은 마주 보이는 산이었다. 산을 그리고 있었다. 앙상한 나무들만 몇몇 서 있는 참담한 그런 산이었다. 산을 그리는 여자. 그림을 그리려면 산을 쳐다보아야 한다. 산을 그리려고 하면 여자는 얼굴을 들어야  한다. 그림의 대상인 산을 보아야 그림이 나올 것 아닌가. 그런데 여자는 산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 그림에만 파묻혀 있다. 여자는 자기의 스케치북에서만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그림에 열중하고 있었다. 누가 옆에 있어도 모를 만큼 무아지경에 빠져있다. 그녀는 자신이 그리는 그림에 빠져 있었다. 무엇 때문에 여자는 광한루에 와서 산을 그리는 것일까? 이곳에서는 그림의 대상이 많다. 오작교가 있지 아니한가. 금붕어들이 있지 아니한가. 신혼부부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있지 아니한가.
그런데 여자의 그림은 산이다. 겨울의 산이다. 나뭇잎은 모두 떨어져 나간 앙상한 산. 그것을 여자는 그리고 있다. 메마르고 가난한 그런 산을 여자는 그리고 있다. 광한루, 이 관광지에서 어울리지 않는 앙상한 산을 그리는  여인, 더구나 여인은 그 산에 몰입해 있는 것 아닌가. 그 메마른 산에 푹 파묻혀 있는 것 아닌가.
“혜진!
나는 여인을 불렀다. 너를 만날 수 있다니, 네가 나를 찾아오다니. 네가 정말 나를 찾아온 것이냐.
“혜진!
나는 다시 한 번 여자를 불렀다. 그때서야 여자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혜진이었다. 그녀는 혜진이었다. 죽으러 길 떠난다는 혜진이었다.
“선생님!
여자는 처음에는 누구인가 의아 하는 듯 했으나 나를 이내 알아보았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여자는 울고 있었던 것인가. 그림을 그리면서 그녀는 울고 있었던 것인가.
“혜진아!
나는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나를 마주 껴안는 그녀, 눈물이 동공에 가득 찬 그녀, 메마른 산을 그리고 있던 그녀, 우리는 주저 없이 서로를 뜨겁게 껴안는다. 나는 그녀의 입술을 찾는다. 그녀의 입 속에 나의 절망을 쏟아 부었다. 그녀가 받아 주었다. 서슴없이 그녀가 받아 주었다. 그녀의 눈물이 내 얼굴 위로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진다. 그녀의 눈물 방물은 혀로 흘러들었고 찝찔하며 슬픈 맛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혜진!
나는 그녀를 더욱 힘주어 안았다.
“너를 이렇게 만나다니. 혜진아, 너를 이곳에서 만나다니.
나는 여자를 힘차게 안았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했다. 남녀 관계란 과연 무엇일까. 그녀와는 처음 만날 때, 그 때는 그저 서먹하던 사이였다. 포옹이고 키스고 생각도 못할 점잖은 사이였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그녀를 찾아 다녔고 그녀가 기적처럼 나를 만나러 이처럼 찾아 주었고 그리고 우린 이렇게 포옹을 하며 하나가 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그리고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는지. 그동안 혜진 씨는 어디를 다녔던 겁니까? 내가 찾아다닌 것을 혜진은 알고 있는 겁니까?
나는 그녀에게 한꺼번에 수 없는 질문을 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 여자를 찾기 위하여 나는 얼마나 많은 방황을 했던가? 얼마나 많은 여행을 하였던가? 도대체 혜진은 어디에 갔었으며 또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그녀가 어떻게 알았다는 것인가.
“그러게 말이에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는 그만 웃어 버린다. 그녀가 웃으니 나도 따라서 웃을 수밖에 없다.
“사실은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당시 저의 결심은 죽는 것이었어요. 평생 제게는 우울증이 있었고 죽음으로만 나의 모든 번뇌와 고민이 끝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죽을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저는 잠깐 죽음을 유예키로 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윗 기도원을 찾기로 했어요. 저도 그 기도원 회원인 걸요. 원장님께서 집회 시간에 김 혁 선생님 이야기를 하셨어요. 광한루에 가실 것이라고 말씀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기도원을 떠나 선생님을 찾은 거예요. 운이 좋은지 여관 순방 다섯 번째에 저는 선생님을 찾아냈답니다.
“그대가 이처럼 나를 찾아오다니 그야말로 꿈만 같소.
“선생님이 보고 싶다, 아니다, 그런 것보다는 선생님이 무서웠어요.
“내가 무섭다니…….
“선생님을 처음 만난 날이에요. 허탈과 허무 그런 상념에 가득한 선생님 눈을 보면서 공연히 두려웠어요. 이 남자 때문에 내가 죽어야 할 이유가 또 생기는 것 아닌가.
“세상에 그런 생각을 하다니.
“선량한 모습이지만 이 남자는 나를 또 다시 익사시킬지도 모른다, 하는 그런 두려움.
“두려움이라.
“맞아요. 두려움이었어요. 달이 환한 밤에 고요히 빛나는 호수, 그 물결, 그 호수에 텀벙 빠져 죽고 싶은 강렬함, 그리고 진저리나게 다가오는 고독……. 선생님의 눈을 보며 다시는 이런 늪에 빠지지 않으리라 결심했었어요. 왜냐하면 그런 남자에게 빠져서 횡액을 당했던 일이 있었거든요, 그런 일을 이제 다시는 겪어보고 싶지 않았다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또 만나게 된 것이군.
“모르겠어요.
“어찌되었던 절묘하구나. 이렇게 혜진 너를 다시 만나게 되다니.
우리는 긴 포옹을 하고 있었다. 눈발이 날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 왔지만 우리는 서로 뜨겁게 부둥켜안고 있었다. 얼마 후 광한루가 문을 닫겠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나가자, 혜정. 맛있는 것 먹자. 배가 고픈데…….
“선생님 저 낙지볶음 먹고 싶어요.
“좋지. 가자고.
우리는 누구라 할 것 없이 팔짱을 끼었다. 연인이 따로 없었다. 우리가 연인이고 우리가 애인이었다. 누가 봐도 우리는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우리는 낙지볶음을 먹었다. 매큼한 원한 같은 것이 속을 할퀴고 지나간다. 그녀는  술을 청했는데 내가 술을 못하는 줄 알았는지 내게 마시라고 권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혼자 술을 마신다. 소위 자작으로 술을 마신다. 도리질을 하면서도 소주를 반병이나 마셨다. 그리고 얼큰히 취했다. 우리는 팔짱을 끼고 남원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선생님 저 영화보고 싶어요. 눈물이 나도록 애절한 그런 영화 말예요.
“좋아. 나도 그런 영화가 보고 싶었어.
마침 건너편 극장에서 로망스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로망스, 로망스 얼마나 근사한가. 나와 그녀는 이제 로망스를 시작하는 것 아닌가. 로망스. 우리는 감미롭고 감동적인 그런 영화를 이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로망스라는 제목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완전 포르노 영화였다. 여배우가 궁둥이를 들썩거리면서, 여성상위 모습만 보여주는 그런 영화였다.
“어머, 무슨 영화가 이래요. 제목은 로망스라면서”
“그만 나가자.
조금 보다가 우리는 영화관을 나왔다. 그리고 우리 둘은 킬킬 웃어댔다.
“이것 사기 아녜요? 제목이 로망스라고 해서 나는 눈물 좀 빼려고 손수건을 꺼내 놓았는데.
“결코 틀린 말은 아니지 않는가? 로망스의 결론은 이렇다는 거겠지. 결국 남녀가 벌거벗고 뒹군다는 것.
“선생님 어떻게 그런 표현을…….
그녀에게 너무 심한 말인가 싶었다. 이제 겨우 만나 첫 번 영화를 본 것뿐인데, 너무 앞서가지 않았는가 싶었다.
그 날 밤 우리는 같이 있었다. 같은 방, 같은 침대에 우리는 같이 있었다.
“선생님을 믿어요. 저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죠?
그녀가 그런 말을 했고 나는 공연히 우 하하 하고 웃어댔다. 내가 웃어대자 그녀도 따라 웃었다. 그녀와 같이 모텔 방으로 들어오자 여관의 아주머니가 그것 보라는 듯 의미 있는 웃음을 웃었다. 기어코 두 분이 만났어라잉.
“선생님 너무 편안해요.
샤워를 끝낸 그녀가 내게 가까이 다가온다. 그녀에게서 복사 꽃밭의 싸한 냄새가 다가왔다. 참으로 오랜만에 끼쳐오는 젊은 여인의 향기였다. 여인은 긴 머리의 물을 큰 수건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이 도시는 이십 년이야. 그리고 당시의 소녀를 만난 것도 이 십 년 만이고…….
나는 영인의 얘기를 했다. 군대시절의 얘기를 했다. 그때 만났던 소녀 이야기를 하였다.
“광한루에서였지. 그때 소녀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 산을 그리고 있었어. 그때 그녀는 울창한 산을 그렸었지. 그리고 난 오늘 그녀를 다시 만났어. 다만 울창한 산맥을 그리던 소녀는 여인이 되어 지금은 앙상한 산을 그리는……. 이리 가까이 와요. 말해 봐요 왜 앙상한 산을 그리게 되었는지.
“선생님 저는 신혜진이예요. 영인이가 아니란 말예요.
“내가 얼마나 놀랬겠어. 울창함이 사라진 여인, 그리고 앙상함만 남은 그녀를,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저는 그때 그 소녀가 아니라니까요. 그러나 저러나 선생님의 넓은 품에서 다시 울창해 지고 싶어요.
“혜진, 이런 얘기가 있어요. 열 살 때의 나와 마흔 살 때의 나는  틀리다는 거야. 어릴 때의 나와 어른일 때의 나와는 틀리다는 얘기야. 죽어서만 환생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살아서도 우리는 계속 환생을 한다는 거지. 혜진, 그대는 틀림없어요. 이 십 년 전 내가 보았던 소녀, 단발머리 나풀거리며, 하이얀 주름치마를 입고 내게 달려오던 소녀, 너는 나의 소녀였어. 나의 여자였다니까.
나는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침대 위로 뉘었다. 그녀가 까르르 웃었다.
“선생님 저는 분명히 말하지만 그 때의 영인이라는 소녀가 아니거든요. 지금은 앙상하게 나타난 산, 그런 산 밖에 그릴 수 없는 앙상한 여자 신혜진이랍니다.
“그래, 우리 모두 앙상하지 않느냐? 그리고 이 방황이 끝나면 우리는 다시 울창함으로 만날 수도 있지 않겠느냐.
나는 그녀를 안았다. 그녀는 늘씬했고 탐스러웠다. 나보다도 키가 커서 내가 안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나를 덮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미인대회 예선까지 나간 적이 있다는 얘기를 용인의 다방 아주머니에게서 들은 기억이 있다. 지금 그 말이 실감난다.
“원고는 잘 받았어요. 수상록 말이야.
“…….
그녀가 잠잖고 있었다. 그녀가 갑자기 조용해지는 바람에 나도 따라서 조용해 질 수밖에 없었다.
“죽은 남자의 글, 맞는가?
그녀는 말이 없었다. 계속 잠잠했다. 한참 만에 내 품속에서 그녀가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모천이라는 말 아시죠?
“모천?
“네 모천이요.
“알래스카의 연어 떼가 망망대해 다니다가 결국 임종을 앞두고 다시 알래스카로 온다는…….
“맞아요, 그런데 알래스카가 아니라 한국에서 부화된 연어들 얘기예요. 망망대해 다니다가 결국 한국으로 돌아오지요. 언젠가 TV에서 보니 다시 돌아온 연어 떼를 잡는 모습을 구경한 적이 있어요.
“그래 나도 본 적이 있는 것 같소. 한국도 모천국이 될 수 있다는 신비감, 그리고 알을 죄다 쏟아 놓고 긴 여행 끝에 겨우 고국에 돌아온 연어를 잡아 올리는 한국 국민의 독성 같은 것, 그런 것을 느낀 적이 있었지.
“그 남자는 모천을 잊지 못했어요.
“죽은 남자 말인가?
“맞아요. 자살한 남자의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 남자는 자살로서 속에 품은 알을 쏟아 놓은 것이지요. 그것이 유일하게 남아서 남자의 글이 된 것이고요.
이번에는 내가 잠자코 있었다. 이 여자에게 있어서 첫 사랑이었다는 남자는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혜진을 두고 자살한 남자는 어떤 방황 했던 것일까.
“선생님도 나처럼 야훼 하나님을 신으로 믿는가요?
그녀가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했다. 갑자기 내게 하나님이라는 신을 믿느냐고 했다. 남녀가 껴안고 있는 그런 분위기에서 떠 올리기에는 참으로 면구스러운 질문이었다.
“선생님의 신, 선생님의 신이 하나님이라는 것 내가 기억하고 있거든요”
그녀가 다시 하나님이 나의 신이냐고 묻는다. 이번에는 내가 잠자코 있었다.
과연 나는 신을 믿고 있는 것일까. 수대 째 기독교인으로 살아왔다. 할아버지 때부터 하나님을 믿는 위풍당당한 4대째 신앙의 가문 출신이 라고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느닷없는 질문에 나는 머리가 띵 해 오는 것이다. 내가 믿는 그 하나님이 과연 나의 신이란 말인가. 나는 나의 신을 철저히 신봉하고 있는가?
“혜진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대의 신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겁니까?
나는 그녀를 힘차게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대고 오히려 내가 물었다. 그대는 야훼라는 신을 하나님으로 사심 없이 믿느냐.
“제 첫 번째 남자는 신의 문제를 해결 못하고 결국 그 문제 때문에 미치고 방황하다가 자살하고 말았어요. 신은 결국 풀 수 없는 숙제라면서 우리는 함정에 빠진 인간이라면서 더구나 인류는 신에게 기만당하는 가련한 신세라면서 그는 결국 자살로 신과 대결했거든요. 스스로 목숨을 끊으므로 신이라는 난제, 신의 굴레, 이 문제를 자기 나름대로 해결한 것이 자살이었어요. 저는 죽은 남자를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의 행동이 나빴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신이 있다면 그럴 수가 없는 거잖아요. 나 잡아봐라, 하면서 보일 듯 말듯 하는 신, 과연 신이 왕림하고 있다는 이 지상에 정의가 살아 있는 것인지, 거기에서부터 인간의 번민과 갈등이 시작된 것 아니겠어요? 이기주의와 사디스트로 가득찬 신이라고 그렇지 않은가요. 지금 우리가 찾아가고 또 우리가 믿고 있다는 신이…….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녀의 말은 과연 옳은 것일까? 이 번민과 갈등의 최종 배후는 우리들이 믿는 그 신의 영역에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만약에 우리의 신이 이기주의와 사디스트에 있다면 어떻게 하는가? 신이 무엇인가 잘못 판단하거나, 아니 신이 잘 하는 일이라도 인간의 감성과 너무 동떨어진 것이라면 누가 제어하며 누가 말릴 수 있다는 것인가.
“언젠가 장애자들을 위하여 설교한 적이 있었어. 내가 상담의 권위 있는 교수라면서 명 설교를 해 달라는 거야. 그곳은 선교기관에서 운영하는 재활원, 장애자 수용소였지. 거기서 내가 뭐라고 설교를 했는지 아는가?
“말씀 하세요.
“비록 앞을 보지 못하고, 비록 듣지를 못하고, 비록 휠체어에 의지하며 살아가더라도 여러분은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승리로 이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누구보다 사랑하시는 분은 우리의 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잊지 마십시오. 그 분을 경배하십시오. 그 신에게 예배하십시오. 나는 힘차게 외쳤단 말이야. 그리고 성공적인 설교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설교가 끝난 후 난 그만 충격을 받고 말았던 거야.
“충격이라니요?
“예배가 끝나고 난 후 장애자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보았어. 그들을 보니 그 사람들은 막상 내 설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어. 머리를 계속 흔들어 대는 장애자들, 입만 악하고 벌리고 정신 놓고 있는 사람, 갑자기 뒤로 나가자빠지는 사람, 침과 코를 계속 질질 흘러내는 사람, 그들은 모양만 사람이었지. 도무지 인간이 아니었어. 짐승이나 다름없었어. 그래 짐승들이었던 거야. 일종의 나는 폭력을 휘두른 거야. 그들 앞에서 장애자들 앞에서 영적인 폭력을 휘두른 거야.
“폭력이라니요?
“그렇지 않은가. 어떤 젊은 장애자, 그는 맹인이었어. 그가 내게 이런 소리를 했지, 선생님께서 태양을 이야기해도 우리는 그 태양이 어떤 존재인지를 실제로 모릅니다. 태양을 도저히 실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창문이 하나도 없는 어두운 방에 있으니까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선생님은 우리들의 당면 문제 해결책에 대하여 어떤 비결도 말씀 못 했습니다. 선생님은 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꽃처럼 순진한 영혼들이라고. 그리고 그런 영혼들을 우리의 신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그러나 우리는 그 의미를 모릅니다. 꽃의 의미를 모릅니다. 꽃이 어떻게 생긴 지도 모릅니다. 꽃처럼 화사한 영혼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화사함이라는 단어가 다가오지 않아요. 무엇인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승리한다면 무엇을 승리하며 해결이 된다면 무엇이 해결되겠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소경이며 소아마비이며 장애자 일 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저의 심정은 공연히 누구에게 얻어맞은 듯 그런 기분입니다. 그것도 아프게 말입니다.
“장애자들 입장에서 보면 그렇겠네요?
“예배 후 재활원 직원들과 점심식사를 할 때 직원들이 이런 소리를 했어. 교수님 명 강의를 하셨습니다. 명 설교를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훌륭한 말씀이었습니다. 장애자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는 얘기이지만 그러나 나는 그 때 젊은 맹인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어. 그의 말은 진심이었거든, 성한 사람들이 쓰는 용어가 장애자들에게는 전혀 어울리지가 않는 거야. 아니 오히려 저들에게 아픔을 줄 수도 있다는 거지.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그들에게 신을 기뻐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이런 말을 다시는 할 수 없어요. 저들을 저렇게 창조한 것이 신이라면 저들에게 그런 신을 찬양하라 어떻게 말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고.
“신은 의심하지 않고 뜨겁게 믿어야 한다는데, 회의는 신앙을 방해 한다는데, 선생님 어떻게 하면 정말 잘 믿는 거죠?
그녀의 몸은 불덩이 같았다. 몸살로 열기가 있었다. 이런 몸살 속에서도 신을 찾는 그녀, 어떻게 해야 신에게 바로 갈 수가 있느냐고 묻는 혜진, 나는 문득 그녀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혜진, 그대는 무엇 때문에 방황하는가. 죽은 남자가 캐내지 못한 진실을 그대가 대를 이어 규명하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아직도 그대에게는 젊은 치기가 있다는 것인가?
나는 그녀를 뜨겁게 안았다. 그녀는 몇 시간 추위속에 있었다. 감기 기운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몸살기운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몸에서는 열이 나고 있었으며 뜨거움이 있었다.
“나를 기다리다가 감기 들린 것이 아닌가? 하루 종일 눈발 날리는 광한루에서 떨면서 있었다니. 혜진씨, 춘향이와 이 도령이 만났던 오작교에서 우리는 만났다. 그렇지 아니한가?
나는 유머를 썼다. 그러나 맞지 않는 유머였다. 그야말로 썰렁한 유머였다.
“광한루에서 저는 추운 줄 몰랐어요.
나는 아스피린 두 알을 그녀에게 주었다. 춥다고 내 품을 파고들던 그녀가 아스피린을 먹은 후에는 이제는 오히려 너무 덥다며 속내의를 벗어버린다. 그러더니 너무 덥다며 그녀는 이제 드디어 알몸이 된다. 그녀의 몸은 뜨거웠고 땀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혜진”
나는 그녀의 출렁거리는 유방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젊은 여인의 맥박이 뛰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선생님, 지금 우리는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제대로 가고 있다니?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가요? 신에게, 하나님에게 제대로 가고 있느냐고요? 아니 그 신이 그 하나님이, 제대로 된 우리의 목표물이냐고요. 두려워요. 종교라는 것이, 나의 신앙이라는 것이.
그녀의 온 몸에 땀이 흐르고 있었다. 신을 찾다가 처절하게 땀을 흘리고 있는 여인, 혜진이가 아닌가.
14세기에 어느 프랑스 수도사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딜레마에 빠진 어떤 당나귀에 관한 이야기, 그 당나귀는 양쪽의 먹음직스러운 건초더미 사이에 있었던 거야. 이쪽 건초도 먹음직스럽고 저쪽 여물도 맛있어 보이고, 당나귀는 중간에 서서 이쪽 것을 먹을까, 저쪽 것을 먹을까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어. 갈팡질팡하는 거지. 그러다가 그런 상태로 가다가 결국은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야. 먹을 것이 많은데도 결국 갈팡질팡하다가 굶어 죽고만 이야기. 어때, 그대와 내가 지금 그런 형편이 아닐까, 양쪽 건초를 바라보는 당나귀, 신이냐, 인생이냐.
“두 건초더미 사이에 서 있는 당나귀처럼 아둔한 우리들인가요. 이 아둔함으로는 결국 신의 정체를 우리는 풀지 못한다는 건가요?
“그렇지, 나는 부러워 정말 부러워. 그런 생각할 것 없이 뒤돌아 볼 것도 없이 바로 이 길이다, 하고 신에게 뛰어가는 그런 사람들 말이야. 이 길만이 살길이다. 하나님밖에 없다. 그가 나의 신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는 신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힘차게 믿고 나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부러운 거야. 다른 종교는 모두 우상이다. 우상에서 벗어 나와라.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믿는 사람들아 군병 같으니 앞에 계신 주를 따라갑시다.
“그들이 부러워요. 그렇게 믿어야 하는데.
“또한 신이 없다는 사람들, 신이니 뭐니 그런 것에 관계없이 오불관언한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나는 차라리 부럽다니까. 용기라고 할까, 만용이라고 할까. 신이 밥 먹여 주느냐, 신이 떡을 주느냐,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 지면은 못노나니……. 이런 사람들 말이야.
그녀가 처음으로 내 얘기에 키득대며 웃었다. 땀이 흐르면서도 그녀는 웃고 있었다.
“내 얘기가 우스운가?
“그러고 보니 선생님과 저만 불안한 사람들이잖아요. 양쪽 건초를 바라보며 갈팡질팡하는 것은 정작 우리들 아닌가요.
그녀가 우리들이라는 말을 다시 썼다. 그 말에 공연이 눈물이 났다. 안도감이 생겼다. 그녀 입에서 우리들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제 그녀와 나는 우리라는 언어를 쓸 수 있는 동지가 되어가고 있다. 여행객끼리의 묘한 친애 감을 그녀에게서 느껴 볼 수 있지 않은가.
“결론은 무엇일까요? 우리들의 결론은 무엇일까요. 우리들의 여행, 우리들의 끝없는 절망과 허무, 이것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으세요?
“글쎄 말이야. 양쪽에 건초더미는 부풀게 쌓여있어. 그런데 과연 어느 건초더미로 우리는 가야할는지 이것이 문제라면 문제인데…….
“선생님을 제 여행길에서 만난 것 제가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시지요?
그녀가 뜨거운 몸으로 다가왔다. 나는 손수건을 물에 적셔와 그녀의 땀방울을 씻어냈다. 여자는 아픈 신음소리를 냈다.
우리의 잠자리는 처음이다. 예상한 일은 전혀 아니었다. 더구나 우리가 만난 것은 기적일 수도 있지 않은가? 더구나 혜진, 그녀가 이 밤에 자신의 나신을 내게 눈부신 모습으로 보여주다니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혜진!
그녀의 입술에 혀를 대었다. 그녀가 눈을 감고 있었다. 여자가 얕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몸살로 아픈 것인지 흥분하여 내는 소린지 분간이 서지 않는다. 그녀의 긴 다리가 떨고 있었다.
“많이 아픈가?
나는 그녀를 다시 안는다.
“괜찮아요. 참을 만해요.
나는 그녀를 더욱 뜨겁게 안는다. 그녀가 너무나 불쌍해 보였던 것이다. 방황하며 절망을 가슴에 안고 있는 그녀가 불쌍해 보였다.
“언젠가 남미를 간 적이 있었지. 페루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고.
나는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에게 페루 이야기를 하였다. 학생들의 수학여행 인솔교수로 페루를 방문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대학생들이었다. 크리스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남미의 선교지를 우리는 찾아간 것이다. 이른바 단기선교여행이었다. 원주민들을 선교하는 한국인 선교사들과 그들의 교회와 원주민신학교 등을 들러본 후 우리는 쿠스코와 그 유명한 미추비추를 관광하였다. 우리는 잉카문명의 거대한 유적들을 살펴보았다. 당시 잉카인들은 문자가 없었고 심지어 마차 같은 운반 기구들도 없었다. 기계나 도구들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아스라이 보이는 산꼭대기 안데스산맥에 바위를 올려 제단을 만들었고 성채를 쌓았다. 지금 보아도 그들의 천문학, 건축학은 엄청나게 놀라운 것들이었다. 쿠스코 외곽의 수풀이 우거진 고원 지대에는 무게가 족히 수십 톤은 될 만한 바위들로 건설된 성들이 있었다.
“여러분들이 보는 바위들은 사람들이 직접 다듬은 것들입니다. 시멘트라든지 회반죽을 전혀 쓰지 않았답니다. 바위 원석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 성벽은 너무나 정교하여 바위 틈새로 종이 한 장도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면도날 한 개 들어 갈 수 없이 공교하게 건설되었단 말입니다. 자 보세요.
페루 현지인 가이드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오늘날의 레이저를 사용하더라도 이렇게 정확하게 바위를 절단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때 학생 중에 누군가 물었다. 그러면 누가 이렇게 절묘하게 돌을 자를 수 있었느냐. 어떻게 그  시대에 돌을 종이처럼 자를 수 있는 기술이 있었느냐.
“모릅니다. 어떻게 잉카인들이 그런 기술을 가졌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영원한 신비이고 영원한 수수께끼가 될 것입니다.
마차도 없었다. 기중기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저 거대한 바위들을 산꼭대기로 옮겼으며 또 돌을 재단하여 자를 수 있었단 말인가. 학생들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눈앞에 보이는 이 성채가 무엇이냐. 현대의 중장비로도 거의 불가능할 것 같은 난공사를 어떻게 잉카시대에 해 낼 수 있었단 말인가.
“모릅니다. 잉카제국은 문자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미궁에 빠져 있는 겁니다. 잉카의 건축 양식이라든지, 잉카의 역사라든지 이런 것들은 문자기록이 없으니 모두 신비로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가이드의 똑 같은 대답이다. 문자가 없었고 특별한 도구도 없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이런 건축공법이 나왔단 말인가. 그들의 역사를 지금에 와서 아무리 반추해 보아도 도통 알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저 막연한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의 결론은 불가사의라는 것. 학생들의 궁금한 표정을 의식한 듯 가이드는 마지막으로 이런 얘기를 했다.
“분명한 것은 잉카인들이 이 엄청난 성채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도구를 썼는지 모르나 아무튼 굉장히 영악한 도구를 사용하여 이런 건축을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도구가 어떤 도구였느냐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가이드의 결론은 하나였다. 이 엄청난 성채를 만든 것은 잉카인들이다. 잉카인들에게는 절묘한 도구가 있었다. 돌을 옮기고 돌을 자르는 도구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 말로 하면 손오공의 여의봉, 그런 것이 분명한 모양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지금에 와서 신비의 그 도구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인간에게 주었던 괴력의 그 도구, 그런데 지금은 빼앗겨 버린 도구,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요?
혜진이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 도구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 바로 그것이야 혜진, 앞을 보지 못하고 온몸을 뒤트는 장애자들 앞에서 나는 잘못 말을 꺼냈던 것이야. 그들에게 맞는 도구가 아니었어. 처참하게 사는 그들에게 무조건 ‘신의 가호를 받으라. 성령 충만 하라’ 이런 얘기는 마치 잉카의 유적지에서 도구를 찾지 못하는 허망함밖에 되지 않는 거야. 치매에 걸려 용변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예수님은 기쁨이십니다, 하고 말한다면 그것이 과연 올바른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항상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잉카인들에게는 도구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잃어 버렸다는 괴력의 도구, 우리가 신에게 다가가는 도구는 무엇일까.
혜진은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도구를 잃어버렸어요. 도구를 잃고는 엉뚱한 말만하고 엉뚱한 짓만 하고 있다니까요. 도구를 잃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을 훌륭한 크리스천이라고 여기는 교인들도 지금은 교회와는 무관한 삶을 산다. 이런 사람들이 미국에만도 300만이 넘는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도구를 잃어버린 것인가요? 요 근래 한국교회도 정체상태에 있다는데 이것은 도구를 잃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얘기가 되는 것인가요?
그러면서 혜진이 내게 질문이 있다고 했다. 질문이 있다는 말을 할 때 혜진은 열기 때문인지 얼굴이 발그스레해 있었다. 마치 그녀의 그런 모습은 여고시절에 교실에서 손들고 선생님께 질문하는 여학생의 그런 모습이었다. 그녀가 내 품에 있지만 않았다면, 그녀가 알몸인 채로 나와 함께 누워 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너무나 여고생의 청순한 모습 그대로이다.
“말해 봐요. 무슨 질문인지…….
나는 담임선생님처럼 정중하게 말했다. 질문이 무엇이냐고.
“하나님은 과연 공평하신 가요?
그녀가 물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냐고 물었다.
“할아버지가 장로님이셨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어요. 지금까지 저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다 공평하신 분이다 그렇게 배워 왔거든요.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점점 이런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은 절대로 공평하신 분이 아니다. 공의로운 분이 아니시다.
“아.
그녀의 말에 나는 아, 하는 소리를 질렀다. 나도 모르게 그런 탄성이 나왔다.
“욥이란 사람은 마귀의 장단에 하나님이 놀아나서 하지 않아도 될 고통을 당했잖아요. 과연 하나님은 욥의 고난을 그런 식으로 시험하셔야 했던가요? 같은 형제인데도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어요. 공평하신 건가요. 심지어 같은 제자로서 예수님을 배신한 건 둘이 다 마찬가지인데 베드로는 후계자가 되고 유다는 제 갈 길로 가라면서 배가 터져 죽게 만들었어요. 과연 이것이 온당한 일일까요. 아니 공의와 공평이 있는 것일까요.
나는 문득 페루의 어느 선교사 가족이 생각났다. 아마존 밀림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원주민들을 선교하는 한국의 어느 젊은 목사가 있었다. 그는 세속의 영화나 부귀영화를 버린 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목숨을 무릅쓰고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밀림으로 들어 간 것이다. 그의 소원은 밀림 속에서 선교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린 아들을 키워 자신의 선교지에서 성공시키는 것이었다. 밀림의 선교사 후계자로 아들을 키우는 일이었다.
“하나님, 내겐 이제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꼭 하나가 있다면 이 아이가 자라 제 뒤를 이어서 이곳의 복음 전파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아이를 당신께 부탁합니다. 당신의 품에서 키워 주소서.
그들 내외에게 바람이 있다면 아이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아이가 자라서 국회의원이 되라는 것도 아니고, 교수가 되라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재벌이 되라는 것도 아니고, 겨우 밀림의 선교사가 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말라리아로 죽고 말았다. 이제 두 살배기 아이가 맥없이 죽어 간 것이다. 젊은 선교사 내외의 보람이요 기쁨이 사라진 것이다. 아들 하나 살려 달라고 원했으나 아들마저 하나님은 빼앗아 간 것이다.
“어머, 불쌍해, 어떻게 해.
혜진은 한국의 젊은 선교사 내외가 너무 불쌍하다고 했다. 그녀는 아주 슬픈 표정을 지었다. 두 내외는 밀림지역에 아들을 묻었다. 그리고 무덤 위에 화강암 바위를 세워 놓았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그곳에서 사역하고 있다.
“참으로 훌륭한 분들이네요. 그런데 하나님이 어쩜 그러실 수가.
“화강암 돌비를 보면서 방문자들은 많은 감명을 받는다는 거야. 그것으로 아들 잃은 젊은 선교사는 위로를 받는 것일까”
“불공평해요. 하나님은 절대 공평하신 분이 아네요.
혜진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그녀는 분노하고 있었다. 하나님에게 분개하고 있었다.
“무신론자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아요. 그들은 아예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아요. 그런데도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잘 살고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바친 사람은 축복은커녕 저주를 받는다면 이것은 정말 불공평한 일이잖아요. 성경에는 누누이 하나님을 따르는 자 복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복은 고사하고 아이의 생명이나 빼앗아 가다니, 하나님이 그러신 분이신 가요. 인간의 슬픔을 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 신. 우리는 그런 신을 믿고 지금까지 온 것인가요? 인간이 고통 받는 것을 보시면서 공연히 즐거워하시는 사디스트 그런 신, 하나님은 변태신가요?
그녀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얼마 후 그녀가 울고 있었다. 신을 얘기 하다가 남자 품에서 울고 있는 여자. 마치 아빠에게 투정을 부리다가 그냥 떼를 쓰며 울어대는 딸처럼 그녀는 내 품에서 그렇게 울고 있었다. 나는 순간 그녀가 소주를 반병이나 마시더니 술에 취하여 해롱대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나도 문득 그녀와 함께 그냥 취하고 싶어졌다.
“그대의 육신은 이처럼 풍성하거늘 혜진, 왜 너는 앙상한 산만을 그리는 것인가?
그녀의 입술에 손을 대었다. 나의 입술은 작은 술잔이에요. 어느 영화의 대사 한마디가 생각났다. 그녀의 입술은 촉촉했다. 작은 술잔이었다. 목덜미가 희고 고왔다. 유두를 만지작거리자 그녀가 까르르 하고 웃었다. 배꼽을 만질 때까지 그녀는 웃었다.
“이 안에 뭐가 들었을까? 금방 열리게 될 콜크 마게 같다니까.
그녀의 배꼽을 만지며 나는 그런 말을 했다. 배꼽이 열리면 거기서 뭔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다이아몬드, 금강석, 보석들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한여름 젊은 여인들이 배꼽을 내놓고 다닌다. 나는 여인들의 배꼽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콜크 마게 같다. 잡아 다니면 열릴 것이고 무엇인가 신기한 것이 쏟아져 나올 것 같다.
“제게서 다이아몬드, 금강석을 기대하지 마세요. 방황과 좌절 번민과 연민의 단어들이 쏟아져 나올 거예요. 내 배꼽이 문을 연다면 말예요.
숲이 있었다. 아주 작은 숲이었다. 이쁘고 귀여운 숲이 손안에 가득 잡혀 있었다.
“그대가 이처럼 젊음인데…… 그것이 나는 슬프다.
여자의 숲을 만지며 나는 여인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저도 그것이 슬퍼요.
여자가 말했다.
“그대의 육신은 풍성한데, 그대의 산은 왜 헐벗어 있다는 말인가?
나는 다시 한 번 묻는다. 그녀가 그림은 산이었다. 메마르고 앙상한 산이었다. 숲의 모든 잎사귀는 떨어져 낙엽이 되었고, 무성함은 사라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그런 나무들 몇 개가 그려 있는 가난한 산, 불쌍한 산.
“선생님 추워요. 항상 추워요. 지금 오한이 나요. 제 산에는 항상 앙상함만 있을 뿐이에요.
그녀가 아주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산에는 언제나 허무와 고독, 그런 것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새벽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때서야 우리는 자기로 했다. 내일 아침 밝은 웃음으로 만나자고 그녀와 약속했다.
“잘 자, 혜진!
“안녕히 주무세요. 선생님.
우리는 정중하게 밤 인사를 했다. 마치 스승과 제자처럼 정중하고 친근한 인사를 나누며 우리는 자기로 했다. 서로 안은 채 그런 인사를 한 것이다.
그녀의 육신은 풍성했다. 오랜만에 맡는 여인의 살 내음이었다. 그녀의 살 내음에 나는 몇 번 혼란스러웠으나 그러나 자제하기로 했다. 오늘은 거룩한 밤이 아니던가. 오늘밤은 성스러운 밤이 아니던가. 광한루에서 혜진을 만난 전설의 밤이 아니던가. 오작교에서 만난 그리운 여인에게 예우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녀가 먼저 잠이 들었다.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그녀의 자는 모습이 너무 평화스러워 보였다. 어린아이의 수면처럼 고요하고 천진한 그런 잠이었다.
늦잠을 잤다. 긴 잠에서 깨어 난 것 같다. 햇빛이 방으로 성큼 들어선 한 낮까지 나는 잠을 잤다. 너무 편안한 그리고 긴 잠을 잤던 것이다. 그 동안의 여행이 얼마나 힘들었던가. 더구나 간밤 혜진과의 대화 등으로 너무 피곤해 있었던 것 아닌가. 나는 길고 긴 잠을 잤다. 혜진의 품에서 달콤한 잠을 잔 것이다. 꿈까지 꾸면서 잔 것이다. 나는 꿈에서 산에 있었다. 앙상한 산이었다. 가난한 산이었다. 그리고 너무 추웠다. 너무나 추웠다.
“혜진아 나 춥다.
나는 너무 추워서 그 뜨거운 혜진을 껴안는다. 그러나 이것이 웬일인가. 깨어나서 보니 나 혼자였다. 나는 깨어 있었고 혜진은 없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화장실에 있나 싶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화장실에 없었다. 잠깐 아침 산보라도 나갔나 싶었다. 같이 식사하려고 나는 그녀가 들어 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다시 들어올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것은 경대 위에 써놓은 그녀의 메모지를 발견한 때문이었다. 그녀는 세모로 접은 편지를 경대 위에 올려놓고, 떠나 버린 것이다. 나를 두고 어디론가 그녀는 떠나버린 것이다.
“제 일생에 가장 아름답고 성스러운 밤이었답니다. 이런 밤을 제게 주신 선생님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앙상하고 메마른 그런 나의 산으로 갑니다. 선생님 어느 건초더미로 가야 되는지요. 잉카인 전설의 도구를 찾게 되시는 날 뵙기를 바랍니다. 혜진 올림.
달필이었다. 예쁜 글씨였다. 그러나 내용은 슬픔이었다. 쓸쓸해졌다. 갑자기 허무가 휩쓸어 왔다. 이것이 무엇인가. 여자가 가다니. 혜진이가 다시 나를 버리고 앙상한 산으로 가버리고 말다니. 나는 갑자기 외로워진다. 그녀는 이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기 때문에 더욱 외롭다. 그녀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그런 예감이 자꾸 들었다.
나는 서서히 행장을 꾸렸다. 배낭을 메고 나왔다. 남원 시내를 걸었다. 다시는 이 도시를 오게 될 것 같지 않았다. 공연히 쓸쓸해진다. 나는 허공을 향해 소리친다.
“혜진아 -
눈발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눈길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