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선이의 판타지아]


                                   
              ― 조 현 례




지선이네가 미국에 이민 온지도 어느덧 반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여름도 가고 가을도 가고 길고 긴 눈 오는 겨울도 거의 지나가고 어디선가 봄 향내가 풍겨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 부쩍 지선이에게도 이상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지선이의 귓가에도 지금까지 들리지 않았던 이상한 소리 같은 게 가까이 와서 속삭이는 것만 같습니다. 영어의 이상야릇한 발음소리 같다고 할 수 있는 향긋한 소리가 지선이의 귓가를 간지럽히고 있습니다. 영어로 무슨 말을 자신 있게 쏙 뱉어놓을 수는 없지만 짧은 말이 생송생송 자꾸만 튀어 나오려고 합니다. 마치 꽃망울이 톡톡 튀어나오듯 지선이의 입은 혼자 있을 때에도 저도 모르게 쫑긋쫑긋해집니다.
지선이는 지금 4학년입니다. 영어의 A B C도 모르는 지선이가 부모님과 오빠 언니를 따라 미국으로 이사를 왔기 때문입니다. 지선이네 5식구가 처음으로 리치몬드 학교에 갔을 때 그 학교에서는 마치 큰일이나 난 것처럼 선생님들이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시며 회의를 했습니다. 왜냐고요? 지금까지 이 리치몬드 학교에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학생이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선이네 삼남매가 첫 번째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지선이의 부모님이 교장실에 들어갔을 때 교장선생님은 연상 ‘오 보이 !오 보이!(이를 어쩌나!)를 연발 하고 계셨다니까요.
그 후 지선이는 수업시간이 되면 지선이가 잘하는 산수 시간과 미술 시간에는 다른 방에 가서 언어학자이신 미스 심콬스와 따로 공부를 하도록 시간표를 짜 놓았습니다. 음성학적으로 입안에서 발음대로 소리 나는 입모양을 보면서 선생님을 따라서 발음하며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인 지 요즘은 미스 심콬스 방에 가지 않을 때에도 지선이 입에서는 영어 낱말들이 불쑥불쑥 튀어 나오고 싶나봅니다. 담임선생님도 지선이에게 그럴수록 더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라고 격려해주십니다. 지선이도 새 영어 낱말을 알게 될 때마다 신기하게 느껴지고 용기가 생깁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스테이시도 지선이가 떠듬거리면서도 새로운 낱말을 배우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지선이는 또 제니퍼도 좋아합니다. 제니퍼는 커다란 수영장이 있는 부잣집 애라서 이따금 지선이를 자기 집에 초대하기도 합니다. 제니퍼는 지선이처럼 그림 그리기를 좋아합니다.
온 땅에 울긋불긋한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는 따뜻한 봄 지선이가 다니는 리치몬드 학교에서 4학년 중 그림 잘 그리는 학생을 한 반에서 2명씩 10명을 뽑았습니다. 왜냐하면 지선이네가 이민 와서 살고 있는 이곳 오하이오 주에서 가장 큰 도시인 이 클리블랜드에는 세계에서 유명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가 있는데 이곳에서 금년에 이 도시 안에 있는  9살 난 화가를 뽑는 대회를 주최하기 때문입니다. 9살 된 어린이들만 모여서 그 유명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관현악을 들으며 그 악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대회입니다. 지선이 반에서는 제니퍼와 지선이가 뽑혔고 전교에서 모두 10명이 뽑혔습니다.
마침내 그 대회 날이 다가왔습니다. 지선이네 리치몬드 학교 4학년 학생들 10명은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세브란스 홀에 도착했습니다. 지선이는 이처럼 화려하고 웅장한 강당은 태어나서 처음 봅니다. 서울에서도 물론 보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클리블랜드에 학교가 얼마나 많길래 4학년 어린이들이 이렇게 많을까 싶었습니다. 서울에서는 4학년만 모여서 사생 대회를 열어본 적도 없었을 뿐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들으며 미술 대회를 열어본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지선이는 궁금한 게 너무 많았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요란을 떨어서 무엇을 얻는 걸까. 이럴 시간에 공부를 더 시킬 일이지. 7학년으로 올라가기 위한 실력 고사라면 모를까. 참으로 미국은 부자 나라라서 할 일도 꽤 없나 부다. 아니면 다른 친구들은 영어를 잘 알아들으니까 지선이가 모르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알고 있단 말일까. 지선이야말로 하릴없이 쓸데없는 걱정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어떤 미국 사람이 나와 뭐라고 뭐라고 인사말을 한 다음 커튼이 열렸습니다.

[1]

수백 개의 휘황찬란한 등불이 사방에서 켜지며 오케스트라 연주가들이 악기들을 들고 무대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지휘자가 앞으로 나와 우리 꼬마 관중들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다시 돌아서서 지휘봉을 높이 쳐들었습니다. 지선은 긴장은 하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음악은 지선이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음악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지선은 비로소 정신이 든 모양입니다. ‘아차! 이럴 줄 알았더라면 서울서 엄마가 오빠처럼 피아노를 배우든가 아니면 언니처럼 바이얼린을 배우라고 하셨을 때 악기나 배웠었더라면 좋았을걸…’ 지선은 후회해 본들 이미 늦은 것을 깨달았지만 또 한 번 무릎을 탁 치며 아쉬워했습니다.
악기는 어릴 때 배워야 한다며 학교에서 돌아오면 피아노 레슨을 가라고 거의 날마다 애원하다시피 엄마가 말씀하셨지만 워낙 고집이 세고 막내둥이라서 그림만 그리고 싶다고 악기를 배우지 않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케스트라 음악은 아무리 들어도 모르는 곡만 계속해서 흘러나왔습니다. 지선은 조금은 지루하기도 해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는데 느닷없이 이민 오기 전에 다녔던 교회 생각이 났습니다. 미국에 오기 전 지선이가 다니던 대신교회를 크게 새로 지어서 헌당식을 하고 올 수 있었습니다. 그때 엄마는 어른들 성가 대원이었고 지선이는 어린이 성가 대원이었는데 성대한 헌당 예배식에서는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헨델의 메시야를 불렀었습니다. 지선이는 지금 이 순간 그때 그 성스럽고 우렁찬 찬양의 노래가 가슴 속에 울려 퍼지는 것처럼 가슴이 벅차옵니다.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곡은 분명히 헨델의 메시야가 아닌데 말입니다. 지선이는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옆에 있는 제니퍼가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는 게 눈에 띄었습니다. ‘아 참 나는 그림을 그리러 이곳에 온 거지…’하며 눈을 스르르 감았습니다.
지선은 눈만 스르르 감고 귀는 활짝 열어놓았습니다. 아름다운 멜로디가 눈을 감고 있는 지선이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 줍니다. 영어를 모르는 지선이지만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악기들이 저마다 색다른 특별한 묘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지선은 한참을 듣다가 이따금씩은 지금 방금 자기 자신이 들은 소리가 어디서 흘러 나왔을까 하고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 둘러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별안간 커다란 하아프를 타는 예쁜 아가씨의 유연한 손놀림에 지선의 시선이 가서 뚝 멎었습니다. 마치 지금까지 듣고 있었던 아름다운 새소리와 졸졸 흐르는 시냇물소리 같은 자연의 멜로디가 모두 이 하아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나왔다 하는 것처럼 환상적으로 보였습니다.
‘아 이거다!’하고 지선은 하마터면 입 밖으로 탄성을 지를 뻔 했습니다. 지선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눈을 크게 뜨고 하얀 백지에 크레용을 자신 있게 갖다 대었습니다. 맨 먼저 커다란 하아프를 밑에서 한가운데 위로 그려 올렸습니다. 하아프를 타는 아가씨의 길고 빛나는 머리를 뒤로만 보이게 하고 하아프 선율 상에서 미끄러지듯 오르내리고 있는 두 손위에 중심을 모아 전체의 밸런스를 맞추며 그렸습니다. 그리고 양쪽 옆에 있는 빈 자리와 위로 올라가는 공간에는 지금까지 지선이가 듣고 있는 온갖 섬세하고 이색적인 멜로디를 연처럼 띄어 올렸습니다. 비눗방울 같은 색색가지 물방울들도 날아갈듯 두둥실 떠 있고 작은 파랑새도 날개를 펴려고 푸득거립니다. 화려한 오색의 무지개도 멀리 하늘 위를 연결해 줍니다. 높은 음자리표도 의젓하게 한 몫을 한다는 듯 음악인 인 체하며 둥둥 떠다닙니다.
지선이가 참가했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에서 주최했던 미술 대회가 끝난 지 2주일쯤 지났을 무렵입니다. 지선이가 다니던 리치몬드 학교에서는 선생님들과 전교 어린이들이 모두모두 지선이 얘기로 꽃을 피웠습니다. 왜냐하면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미술 대회에 뽑혀서 나갔던 10명중에서 오직 상을 받은 사람은 지선이 한 명뿐이라고 학교 방송에서 발표했기 때문었습니다.
그날 이후 리치몬드 학교에는 “지선이란 애가 도대체 누구지?” “영어 한 마디도 못하는 애였었다면서?” “서울 코리아에서 온 시골뜨기라는데 참말이니?” 등등 지선이를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어린이들은 호기심과 궁금증을 풀기 위해 지선이가 가는 데마다 은근히 따라다녔습니다.
한편 입상한 어린이들의 작품은 세계적인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가 연주되는 세브란스 홀에 전시 되었으며 그들의 부모님들은 그 영광스런 자리에 초대되었습니다.


     
  조현례(동화작가/ 수필가)
  *강원도 출생. 이화 여대.동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졸업.
  *1965년「동아일보」신춘문예 동화 당선 등단.
  *「월간 여성」과「소년 한국 일보」기자 역임.
  *이대, 성균관대, 단국대 강사 역임. 저서로 이민수기「보이지 않는    유산」서간집 [너와 나와 만나는 곳] 등 다수

 

 

날짜 : 11-05-31 03:46     조회 : 62